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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롯유다는 저입니다.

가롯유다는 저입니다.

 

 

 

 

 

 

 

 

 

 

 

 

 

가롯유다는 저입니다. (27:1-10)

 

하루도 지나지 않아 후회할 일을 합니다.

우리는 작게는 마음으로 후회하고 크게는 인생을 두고 후회할 일을 합니다.

후회에는 <법칙> 있습니다.

 

 

 

첫째, 친분이 깊은 관계의 사람 사이에 후회할 일이 많이 생깁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를 판지 하루도 되지 않아 후회를 합니다.

모든 재판 과정을 지켜보다 예수님이 유죄가 선고되고 사형대상자라는 것을 알게되자 그는 뉘우칩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27:3)

 

 

그러나 여기 <뉘우쳐>라는 말은 삶의 전적인 변화를 뜻하는 원어보다

단계 낮은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 뉘우쳐는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괴로워하며 후회하는 정도의 뉘우쳐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후회할 일을 합니다.

그런데 후회가 남는 일은 관계적 측면에서 찾아옵니다.

어떤 실적에 대한 것보다 <관계적 측면>에서 남는 후회가 훨씬 우리의 가슴에 오래 남습니다.

그런데 후회에 깊은 상처는 가까운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사람에게 많이 믿고 많이 바라고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많이 기대해서 그렇습니다.

 

 

 

둘째, 많이 기대해서 많이 후회합니다.

 

가룻유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시대를 바꿀 위대한 지도자가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기대에 미치자 가롯유다는 가지 이유에서 예수님을 팔아버립니다.

 

하나는 사형까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입니다.

설마 사형당할까라는 자기 생각에 빠지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죄는, 죄의 결과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엄청난 파장으로 돌아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으면 분명히 메시야적 능력을 나타낼 것이라는

자기 <계산> 근거한 것입니다.

 

우리가 후회하는 것은 자기 계산에 사람을 기대하고 사람을 대해서 그렇습니다.

나는 이렇게 했는데 너는 어떻게 이럴 있느냐?

나는 이렇게 대접했는데 너는 어떻게 이럴 있느냐?

내가 생각한 기대에 미치고 내가 바라는 것에 미치는 우리는 후회하게 일을 하게 됩니다.

 

죄는 내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죄는 < 30>으로 시작했지만 자신의 <목숨> 가져가는 것이 죄의 결과이고 후회입니다.

 

 

 

셋째,  돌이킬 없는 것이 후회입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이 유죄선고를 받자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30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돌려주려 해도 대제사장들은 네가 값을 당하라고 하면서 받지 않습니다.

그는 돈주머니를 성전에 던져 놓고 가서 목매어 죽습니다.

 

후회하고 무르자고 해도 돌이켜지지 않는 것이 후회입니다.

<후회> 대가는 <생명> 갈아 먹는 것입니다.

후회는 반드시 돌이킬 없는 일이 생깁니다.

그것이 죄의 대가입니다.

 

죄는 반드시 대가를 묻습니다.

그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더더욱 거래가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넷째, 목적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면 반드시 후회합니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사람과 관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적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목적을 관계는 반드시 후회를 낳습니다.

 

가롯유다는 자신의 이상과 꿈이 있었습니다.

나라를 살게 하고 나라를 해방하고 교회를 회복하고 사람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꿈입니까?

그러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누군가를 이용하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죄의 결과는 결국 자신의 파멸입니다.

 

우리는 자주 실수 하는 중에 하나는 내가 세운 거룩한 명분을 이루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 시킨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화려한 목회와

화려한 선교와

인생의 화려한 성공을 위해 누군가 이용하고 누군가 희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라도 선교도 목회도 사람의 인생도

결국 이용하고 희생 시키는 이유는 사람의 영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희생시킵니다.

 

 

어떤 의미에서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한번 바꾸려 했습니다.

그것은 가롯유다와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롯유다와 다른 제자들이 다른 것은 <거래> 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말을 실수하면 말로 고백하면 됩니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실수 하면 스스로 돌이키면 됩니다.

그러나 거래는 아닙니다.

그래는 약속이고 약속은 결과가 있습니다.

거래가 무서운 것은 거래의 조건이 있습니다.

 

가롯유다의 <거래의 조건> 바로 예수님의 < >입니다.

가롯유다가 돌이킬 없는 길을 것은 피를 팔아서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생명을 넘긴 것입니다.

생명은 반드시 생명으로 갚아야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내어 주신 것은 이세상이 죄의 피로 물들어서입니다.

자신의 거룩한 피로 우리를 정결케 하기 위해 자신의 피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생명의 대가는 생명입니다.

생명을 값은 자신의 생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생명을 던져야 합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의 값의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놓아야 했고

예수님은 세상의 , 생명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 생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목사입니다.

목사는 생명을 살리는 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자는 생명을 내어놓고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면 자신도 구하지 못하고 다른 생명도 구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생명을 얻고자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후회하는 인생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는 삶이 생명을 살립니다.

자신의 생명은 자신의 목적과 자신의 이상과 자신의 꿈이라고 말할 있습니다.

가롯유다는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는 이상과 꿈을 이루기 위해 생명을 팔았습니다.

 

목회자이고 선교사입니다.

꿈과 이상과 뜻을 이루기 위해 생명을 파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사역의 목표를 위해 현지인들을 이용하고 그들의 생명을 이용하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이미 죽은 대통령을 위한 추모예배가 드려졌다는 소식으로 온통 한국에선 난리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가롯유다와 같은 후회를 남깁니다.

 

일제시대 목사들이 돈을 받고 신사참배는 신앙과 상관 없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돈에,

자신의 이상과 꿈에,

사람도 이용하고 하나님도 이용하는 목사는 안되어야겠습니다.

 

비록 꿈이 망가지고

비록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세상과 거래하는 일은 없어야 것입니다.

 

 

선교라는 명분을 이용해

뜻을 이루지 않아야 합니다.

목회라는 거룩한 명분으로 후회할 일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가롯유다가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것은 사단이 마음에 들어가서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22:3)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외치는

 <나의 거룩한 명분>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메뉴인지 모릅니다.

 

거룩한 명분이 어쩌면 하나님의 생명을 팔아 버리는 일이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가정과 모임을 어지럽게 하는 분들 중에 정말 상식이 없는 분들이 있지만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단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사용하는

<나의 거룩한 명분>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팔린 것은 누군가의 <거룩한 명분>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목사이기에

나는 선교사이기에

내가 세우는 <거룩한 명분>

내가 외치는 <거룩한 꿈과 이상과 비전>

사단이 가장 좋아하는 외침일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묵상하면서 가롯유다와 예수님의 결정적 차이는

가롯유다는 대의명분과 거룩한 이상에 전부를 걸었지만

예수님은 <거룩한 명분> 현장으로 

<작은 소자> 사람에게 전부를 거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이상과 뜻과 목표는 없었습니다.

다만 소박한 꿈으로 수없이 쏟아 놓는 말씀 후에는

반드시 병든 자와 함께 하셨고

죄인들과 함께 하셨고

말씀에 맞는 죽어가는 자들을 고치시는

소자의 삶과 동행하는 발걸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성경을 다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 후에는 반드시 작은 소자와 함께 하시는 주님,

고치시는 주님을 발견하게 것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명분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선교를 위하여…

 

그러나 이상과 꿈은 작은 소자 하나 붙들고 씨름하는

예수님의 발걸음 속에 있었지

가롯유다의 이상과 꿈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외침 속에는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치기만 합니다.

작은 소자 사람 붙들고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에도 맞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의 능력에도 어울리지 않는

작고 초라한 죄인과 세리와 장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그분의 동행은 보지 못합니다.

 

명분이 클수록

이상이 높을수록

말이 많을수록

우리의 발은 작고 작은 소자들과

우리의 손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억눌린 자들과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인류 역사이래 눈길을 떼지 못하는

신음하는 자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롯유다의 결말을 보면서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초라하게 죽은 사람의 죽음이라도 우리는 거기에서 삶을 보아야 합니다.

인생을 보아야 합니다. 나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작은 소자에게는 마음도 삶도 없으면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한

<가롯유다> 어쩌면 나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 마을 전도를 다니며 찍은 사진입니다.

꿈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

하나님의 꿈이 삶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그것은 명분을 외치고

어디로 가자고 외치는 말이 아니라

작은 소자와 함께하는 동행의 발걸음임을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깨닫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어둡고

각자 소견에 옳은대로 사는 시대에

그저 묵묵히 작은 자들과 함께하는 발걸음만을 사용하시는

그분의 세상과 다른 방법을 믿습니다.

 

나도 언젠가 있는 가롯유다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작은 소자의 삶과 함께 머물기를 스스로 다짐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