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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과 시인 사이

부인과 시인 사이

 

 

 

 

 

 

 부인과 시인 사이(26:57-75)

 

우리는 나에게 이익이 되면 나를 증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증명하는 것은 해를 당한다 할지라도

내가 누군지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다시 사람을 대조 시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입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앞에서 신문을 받고 베드로는 그의 뜰에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대조시켜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무엇에 관해서 사람을 대조 시키고 있습니까?

자기가 누군지 부인하는가 자기가 누군지 시인하는가 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대제사장의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지 말하라고 합니다.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26:63)

 

말에 예수님은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고백합니다.

고백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렇습니다.

내가 높아지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내가 누군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얼마만큼 되는 교회의 목사이고

내가 의사이고

내가 교수이고

내가 사장이고

내가 어느 학교를 나왔고..

내가 누군지에 대해서 말이 없으면 내가 아는 사람이 누군지를 말합니다.

유명한 목사가 친구고

유명한 사람과 내가 친분이 있고…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익>입니다.

뭔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는 어떤 이익을 기대합니다.

 

하다못해 병원을 입원을 해도 내가 아는 모든 지인을 동원해서

나는 병원장을 알고

나는 어떤 의사를 알고

나는 어떤 유명한 사람과 친분이 있는 사람이고…

실제 간호사들의 이야기는 다들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나에게 돌아올 유익입니다.

나에게 돌아올 특별한 대접입니다.

 

베드로가 오늘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시는 뜰에서 앉았습니다.

여종이 묻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으로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라고 하니

처음에는 부인하여 나는 사람을 모른다 합니다.

맹세도 하고 부인도 하고 그리고 저주하며 맹세하여 모른다 합니다.

그리고 닭이 울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 죽음이고 손해고 핍박이기에

자신이 누군지를 부인합니다.

어디에서 왔고 누구의 사람이고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도 부인합니다.

맹세합니다. 저주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누군지를 세상에 알리면 찾아오는 것은

손해를 보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죽음임을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에 알립니다.

죽음인데 말입니다.

 

내가 누군지에 대한 시인과 부인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에 대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시인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인과 시인의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3]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시인하면 죽음이 찾아오는데도

사람 앞에서 자신을 시인하고

우리는 사람 앞에서 부인하다 못해 저주하고 맹세까지 할까요?

 

 

첫째, 눈에 보이는 것이 기준이면 그렇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죽이는데 결정적 제보는 성전을 헐고 일에 다시 짓는 다는 것입니다.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26:61)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것에 전부를 걸고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들이 모든 것입니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성전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의 성전 됨은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의 외형은 보이는데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몸은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을 보는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의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 사는 인생은

믿음으로 가는 길도 결코 보이지 않고 그들이 이상하게 보입니다.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사람은 겉의 의미만 말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사는 사람은 속의 의미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사람이 말하는 성전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고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보는 관점이 다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이 하나같이 육체를 초월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유는 오직 한가지 입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갇혀 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을 주관한다고

믿음장인 11장은 서두에 밝히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3)

 

많은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이 원리를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초월한 눈에 보이지 않는 원리를 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그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원리의 총체적 삶을 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자는 결론을 냅니다.

 

오늘 예수님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 됨을 시인하십니다.

그것이 죽임이고 고난이고 아픔이어도

그분은 세상에 보이는 것의 원리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원리가 있음을 알고

원리를 창조하신 분이기에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내가 누군지 세상에 나를 알리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는 예수님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

 

눈에 보이는 것이 원리가 되어 사는 사람은 십자가와

내가 누군지를 밝히는 것은 <부끄러움>입니다.

세상이 욕을 하고 세상이 침을 뱉고

세상이 얼굴을 때려도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힙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인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지를 밝히면 부끄러워합니다.

아닙니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아야 합니다.

한국에서 목사로 산다는 ,

한국에서 예수를 믿는 성도로 산다는 것이 지금은 부끄러움이 된다고

교회들은 말합니다.

 

아닙니다.

그럴수록 더더욱 우리는 나의 목사 됨

나의 성도됨,

나의 하나님의 백성 됨을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침을 맡고

뺨을 맞고

수치를 당한다 할지라도 내가 누군지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시인하는 근거가 됩니다.

 

세상이 욕할 수록

세상이 챔을 뱉을수록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의 자녀됨을 고백해야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모범입니다.

 

비록 손해가 나고

비록 돈을 벌고

비록 유명해 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자녀 됨을

세상 사람들이 알도록 우리는 시인해야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상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이어서 그렇습니다.

 

 

둘째,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두렵습니다.

우리 사는 인생,

몸에 갇혀 사는 우리의 인생이 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러다 인생이 끝이 나면 어떡하나?

이러다 인생이 망하면 어떡하나?

이러다 인생 이런 곳에서 끝이 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나의 됨을 시인할 찾아오는 세상의 핍박과 욕과 손해와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세상에 알릴 찾아오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미리 아시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이미 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10:28)

베드로는 몸과 인생이 어떻게 것에 대한 두려움에 부인했고

예수님은 두려움보다 것을 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인간이 사람 앞에 자신을 부인하는 본질은 두려움입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입니까?

<인생> 잘못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인생만 보게 됩니다.

<단절> 대한 두려움입니다.

세상과 분리 것에 대한,

사람들과 분리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죽음>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가 누군지 시인함으로 나에게 찾아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생의 기초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진정한 단절은 나의 인생만을 붙잡을 찾아오는 하나님과 세상과의 단절입니다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나를 세상에 고백할 진정한 회복과 하나됨은 찾아옵니다.

죽음은 죽어야 이깁니다.

죽어봐야 부활을 알고

죽음을 택해야 생명의 탄생을 압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군지 죽음으로 증명합니다.

죽어야 부활을 알기에

주님이 자신을 증명한다는 것은 부활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나를 포기 하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의 인생의 잘됨과 사람들과의 단절과 죽음을 넘지 못하는 유일한 한가지 이유는

안에 부활에 대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의 원리와 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대안은 무엇입니까?

셋째, 성령입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났습니다.

살아 앞에서 물고기를 잡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손의 못 자국을 만지고

옆구리의 자국을 만졌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자신이 없습니다.

왜요?

 

육체가 인간의 한계는 육체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초월의 삶을 살아도 육체는 눈에 보이는 것만 보게 됩니다.

그것이 세상에서 부인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육체의 한계를 아십니다.

사람의 한계를 아시고

인간의 한계를 아십니다.

자신의 인생을 소중히 여기고

세상과 단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주님은 이해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신 마지막 답은

<오직 성령>입니다.

 

주님의 답은 성령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기준인 인생에게 해답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밖에 없습니다.

문제를 풀지 못하던 인생에게 문제의 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주를 부인하고

주를 저주하고 도망한 제자들을 주님은 찾아가셨습니다.

그러나 부활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이야기를 들어도 그들은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것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 보았을 자신을 세상에 드러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되어졌다는

히브리서 113절의 말씀이 안에 믿어질

우리는 <부인> 아니라 <시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신앙교육이 무엇이 잘못 되었습니까?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교육은 너무 많이 시킵니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되고

어떻게 하면 인생이 풀리고

어떻게 하면 높아지고 잘나가는지 이런 프로그램과 무슨무슨 학교가 유행입니다.

 

아닙니다.

우리 삶의 근본은 날마다 성령의 음성으로 안에

눈에 보이는 세상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이 있음을 인식하는

<성령의 확신>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십니다.

죽음을 지나야 부활을 알고

절망을 지나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요.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줄 알고 달려가는 인생을 향하여

목마를 때까지 가는

절망의 걸음을 아픔의 눈으로 쳐다보시는 주님의 애처로운 눈길이 보여야합니다.

그래야 내가 보이고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영혼들의 신음 소리가 들립니다.

그때 성령의 말할 없는 불쌍히 여김과 탄식과 기쁨이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는 문은 열어 놓아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는 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열심도 아니고

나의 의로움도 아니고

오직 나의 절망의 고백과

오직 기도를 통한 겸손의 고백입니다.

 

기도는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절망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마지막 <동아줄>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고 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26:75)

 

눈에 보이는 통곡의 벽을 지나야 합니다.

그래야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의 길을 만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심으로 그의 눈이 멀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을

눈에 보이지 않던 세상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세상 일이 너무 된다고 절망하십시오.

절망을 지나야 동아줄이 보이고

동아줄을 잡아야 눈에 보이지 않던 성령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세상 것이 많이 보이면 사람 앞에서 우리는 부인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안에 찾아오면

우리는 나를 시인하고 하나님을 시인하고 해야 일을 있는 사람이 것입니다.

 

<부인> <시인> 사이에서 당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많이 보게 되는 당신이기를 기도합니다.

 

 

 * 엔틱(antique) 가구점에서 만난 오래된 피아노입니다.

피아노가 너무 예쁘고 고풍스러웠습니다.

어디서도 보지 못한 피아노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아도 피아노는 치는 사람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한번의 터치에도 피아노는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있어 보이려고 해도 우리는 보기만 좋은 피아노입니다.

아무리 좋은 자리에 놓인 피아노라 할지라도 조율하고 연주하는 사람이 없으면

피아노는 자리만 차지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

나를 조율하고 나를 연주하는 주님의 존재를 인정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조율과 연주가 나의 인생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조율도 없이

연주도 없이는

아무리 좋아 보여도 고물피아노입니다.

우리 인생은 부인하면 고물 피아노입니다.

나의 됨을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조율하시고 연주하시는 생명의 연주가 시작됩니다.

 

나는 고물 피아노입니다.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도망하고

주님을 저주하고 맹세한 세상이 버린 고물 피아노 입니다.

고물 피아노에 주님이 손을 대시면

생명을 연주하는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그것이 나의 인생입니다.

고물을 고전이 되게 하시는 주님의 조율과 연주로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