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어드림 (마26:47-56)
늘 그렇습니다. 세상은 두 얼굴을 하고 찾아옵니다.
속의 마음을 감추고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를 합니다.
반가운 인사는 관계를 좋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밟으려는 기회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가롯유다는 오기 전에 이미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에게서
파견되어 칼과 몽치를 든 큰 무리와 말을 맞추었습니다.
내가 입을 맞추는 그가 예수니 그를 잡으라 한 것입니다.
그는 예수께 와서 랍비여 안녕하십니까?라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26:49)
늘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와 관계하기 위해서 입을 맞추지 않습니다.
다른 속셈이 늘 있습니다.
자기들의 목적, 즉 우리를 죽이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아간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그리고 장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대한 것은 그를 죽이려는 거짓증거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증인을 많이 불렀습니다.
세상이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거짓>입니다.
속과 겉이 다르고
어제 말고 오늘 말이 너무 쉽게 다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 이 세상입니다.
거짓뿐만 아닙니다.
할 수 있으면 그들은 칼도 들고 몽치도 들고 옵니다.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 큰 무리를 대동합니다.
거짓은 늘 힘으로 진리를 억압하려 합니다.
거짓은 늘 힘과 함께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려 합니다.
자리를 이용하고
힘을 이용하고
권력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사람 하나 죽이고 죽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것이 세상입니다.
수 많은 전쟁과 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간 곳이 이 세상입니다.
다 자기들의 자리를 지키고 자기들의 이익을 지키고
자기들의 욕심을 유지시키기 위해 거짓도 이용하고 힘도 이용합니다.
이 한 사람을 그들이 무서워하는 이유는
힘보다 권력보다 그들의 칼과 몽치 보다
<진리>가 더 힘이 있어서입니다.
어떤 힘보다 강한 것이 바로 <진실>이고 <진리>입니다.
한 사람이냐 한 민족이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진리인가 진실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이고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진리와 진실을 싫어합니다.
그 진실과 진리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밝혀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렇게 설명합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어둠이 깨닫지 못한다 했습니다. (요1:5)
그리고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에서 자신의 정체성과 세상의 정체성
그리고 왜 이 땅에 왔는지를 설명하십니다.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요18:37]
예수님이 빌라도와 나눈 대화는 자신의<진리>를 세상에 알게 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 한 사람을 이렇게 싫어하고 죽일 만큼 미워할까요?
진리여서 그렇습니다.
빛이 찾아오면 어둠이 증명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비록 한 사람이지만
그가 진리이기에 진리가 오면 세상의 악함과 죄와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기에
자신을 감추기 위해 그 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죄를 은패 하기 위해 증인을 죽이는 것과 비슷한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이유는 그것입니다.
진리의 사람 한 사람,
빛을 소유한 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을 무리가 싫어하는 이유는
그가 진리를 가졌고 삶이 빛이기에 그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증명하는 방법>
그러나 우리가 기억 할 것은 예수님의 이 진리를 증명하는 길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과 피를 온 세상을 위해 내어주고
팔려가고
뺨을 맞고 고문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세상과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빠집니다.
욕을 하면 욕을 하고
때리면 다시 때리고
속이면 같이 속이고
미워하면 같이 미워합니다.
예수님은 칼과 몽치를 들고
겉과 속이 다른 모습으로 찾아온 가롯유다와 무리에게
그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함께한 제자 중에 하나가 칼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 드립니다.
주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하늘의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낼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26:52-53)
원수된 세상을 심판으로 망하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진리>가 걷는 길은 <믿음의 대로>입니다.
세상이 진리를 무서워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걷는 길은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의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걸음이 진리의 대로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 진리의 대로를 성경은 <시온의 대로>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근거는 오직 한가지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참고 참으며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라고 하십니다.
<성경을 응하게>입니다.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26:54)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26:56)
예수님 자신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의 진리의 권위를 성경에 두고 있습니다.
<성경>이 자신의 모든 권위와 진리의 근거입니다.
진리를 걷는 자는
성경의 말씀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목숨을 건 스스로와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일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몸을 다하여 진리 안에 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의 약함과 부족함은 당연하고
그것을 초월한 어떤 하나님의 힘을 기대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사들을 부르고 구하는 능력을 하늘에 구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들이어서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진 하나님이어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그저 가져다 쓰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쓰지 않고 오직 성경이 성경으로서 권위를 가지는
마지막 진리의 울타리가 되도록
겉과 속이 다른 세상에 오른쪽 뺨을 치면 왼쪽 뺨도 내어주고
오리를 가자 하면 십리도 가고
겉 옷을 달라하면 속 옷도 내어주는
성경의 말씀을 내 삶으로 이루어 내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있을 때
우리 안에 있는 진리가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성경의 진리의 바다에 나를 내어놓지 않으면서
그 바다에서 다니는 유람선만 얻어 타려합니다.
진리의 바다에서 헤어치는 고기는 잡아 먹으려 하면서
그 진리의 바다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진리의 삶,
유람선을 포기함으로 성경이 이루어지는 내 삶의 진리를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의 능력,
하늘의 열두 군단이나 되는 천사를 늘 구하고 싶은 우리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하늘의 열두 군단의 천사를 나를 호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천사가 비록 나에게 없고
세상이 나를 욕하고 나에게 거짓으로 찾아올지라도
성경이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게 하는 십자가를 향한 거룩한 드림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은 거짓과 칼과 몽치고 찾아오고
함께한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합니다.
그 때에도 자신의 하늘의 열두 천사 군단을 부르지 않는
진리를 믿는 믿음,
진리가 내 삶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열정이 더 강할 때
우리는 십자가의 아름다운 영광,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내 삶의 영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자신이 지킨 거짓의 사람들,
자신의 한 몸 지키기 위해 도망한 제자들,
그리고 자신의 영광을 하나님께 맡기고 성경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아무 힘없는 연약한 한 인간으로 드린 예수님!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의 그 발걸음에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길을 믿는 것입니다.
세상이 비록 겉과 속이 다르게 찾아오고
속을 감춘 입맞춤으로 찾아오고
말이 안되니 칼과 몽치와 권력과 힘으로 나를 억압해도
진리를 믿으니
성경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의뢰하는
믿음의 발걸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온의 대로>를 걷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발걸음입니다.
* 진리는 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이 있는 장사도 오는 봄을 막을 수 없습니다.
가는 여름을 잡지 못합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진리가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하늘에서 수 없는 우박이 떨어졌습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러나 그 큰 나무도 작은 풀들도 그것을 막으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도망하지 않습니다.
숨지도 않습니다.
우박으로 입은 상처는 가고 오는 계절이라는 진리로 회복되고 다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을 그들은 믿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진리에 옷을 입힙니다.
믿은 진리를 향해 웃습니다.
진리가 진리로 내 삶에 환한 웃음으로 찾아 올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우박과 폭풍과 바람에도 진리의 발걸음을 믿기에
웃음으로 다시 옷을 여미고 내 삶의 진리에 옷을 입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진리는 어떤 우박과 비바람에도 나를 내어주는
<내어드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