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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필요한 것!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필요한 것!

 

 

 

 

 

 

 

 

 

 

 

 

 

 

최후 승리를 얻기 까지 필요한 !(26:31-46)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부인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나를 버리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잠시 깨어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내가 괴로울 ,

내가 고민이 ,

내가 어떤 인생의 중요한 문제 앞에 힘들어

그저 나와 함께 시간 만이라도 <함께>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버리고 도망한다는 것을요.

목자를 치면 양들은 당연히 흩어집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26:31)

 

목자가 죽는데 남아 있을 양들은 없습니다.

각자 갈길을 가게 됩니다.

그것을 모르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도망할 뿐만 아닙니다.

베드로가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목자가 없는 양의 기본적인 마음의 양심이지만

목자 없는 양은 당연히 흩어집니다.

주님은 버릴 뿐만 아니라 베드로가 부인할 것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도망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인하지 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망하고 부인하는 것은 결정적 어떤 문제가 해결 되어야 도망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을 있음을 예수님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없는 그들은 당연히 그런 결과를 아시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잠시 시간 동안 나와 <함께 깨어>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26:38)

 

 

목자를 하나님이 흩으십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예언이고 하나님의 입니다.

목자가 죽은 상태에서 양들이 목자를 버리고 도망하고

부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래서 버리지 말라고도 부인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잠시 나와 <함께 깨어> 있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몸을 내어 주고

피를 내어주고

스승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제자들과 죄인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단순하면서 간절한 바램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 대단한 명분을 세웁니다.

결코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합니다.

결코 도망하지 않겠다 합니다.

주를 위해 인생을 걸고

주를 위해 전부를 걸고

교회를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각오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에 대해서는 일체 말이 없으십니다.

다만,

내가 목마를

내가 하나님 앞에 몸부림 ,

내가 홀로 걷는 길이라고 생각이

그때 나의 옆에서 함께 있어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명분에 가려서 다만 시간만이라도 함께 있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간단한 소원이 외면당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은 그렇게 작은 자들에게 주님의 마음을 심어두셨습니다.

우리의 대의명분과 교회와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를 위해 목숨을 건다 하면서

정작 지금 <함께 깨어> 있어 주어야

외로움과 고민과 고통에 신음하는 자들과 함께 있는 것은

어찌보면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목마른 자에게 우물을 파는 것이 아닙니다.

배고픈 자에게 공장을 지어주고 직업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다만 목마른 자의 옆에 함께 있어주는

배고픈 자에게 손의 조각을 함께 먹는

작은 함께함의 < 시간>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생을 말하지만

시간에 함께 깨어 있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주님은 인생을 말하지 말고

대의명분을 말하지 말고 다만 나와 함께 깨어 있는 시간을 원하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정말 행복을 느끼고 위로를 느끼고

절망의 순간에 힘을 얻는 것은

생각지도 않은 자들이 나에게 걸어주는 한마디 였습니다.

생각지조 않은 자들이 나와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

 

소망도

희망도

이것이 끝인가라고 느끼는 순간에

새로운 인생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작은 이유는

그저 나와 함께 식사의 시간,

그저 나와 함께 그들에게 존재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시간의 대화였습니다.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고난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당해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몸부림도 칩니다.

소리로 호소도하고 눈물로 아픔을 외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압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란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더더욱 내가 가는 길에 나와 시간을 동행하는

함께하는 사람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사람들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불렀습니다.

열둘 모두가 아닙니다.

따로 기도하시기 위해 명만 따로 불렀습니다.

이유는 평생에 가장 가까이 하고

남들이 데려가지 않는 그곳에 데려가고

변화산에도 함께 가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들을 이들에게 알게

정말 마음을 나눈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시간의 함께함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잠자는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아픔입니다.

내가 평생 함께,

다른 이들과 다른 마음으로 함께한 이들에게

나의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 그들에게 바랬던 시간의 함께함이

잠자는 것으로 돌려주는 것은 아픔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버리고 도망한다는 것을 나눌 때도

번이나 나를 부인한다는 것을 말할 때도 담담한 마음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시간 동안 함께 깨어 있지 못하는 나의 친구들

나의 동역자들,

나의 제자들에게 섭섭함을 표현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26:40)

 

나와 함께…

 

인생의 힘을 얻는 것은 대의 명분이 아닙니다.

인생을 어떤 것이 아닙니다.

내가 힘을 얻는 것은 내가 당신 옆에 있다는 간단한 마음이었습니다.

 

나를 향한 마음을 느낄

인생의 고달픔과 인생의 고민과 인생의 아픔도 이기고 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답이 무엇입니까?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대안이 무엇입니까?

 

<함께>입니다.

 

예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인생의 답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어떤 명분도 어떤 목표도 그것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흩으시면 흩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이 세우시면 세워지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와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역사 속에

인간이 가장 원하며 가장 약한 것은 바로

누군가 나와 <함께 걷는 인생>입니다.

 

예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답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주셨던 것은 사명이 아닙니다.

실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인생을 너무 거창하게 살지 않으십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인생을 향한 답은 함께함인데

우리는 도망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고

교회를 크게 세우고

인생이 높이 올라가고

뭔가 세상이 놀랄 일을 꾸미느라고

정작 인생의 답으로 주신 잠시

< 시간의 함께함> 온데간데 없는 것은 아닙니까?

 

행복을 내가 채우지 못합니다.

행복은 누군가 나와 함께해주는 시간의 함께함입니다.

우리는 행복을 내가 채우려 합니다.

기억 해야합니다.

그곳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행복은 내가 누군가의 옆에 시간 함께 있어주는 하나됨이고

나의 행복도 누군가가 나를 찾아와 함께해주는 < 시간의 카이로스> 있습니다.

 

 

십자가의 등잔 밑은

시간 함께하는 동행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향하여 가는 동인 우리가 대의 명분을 외치면서

잊어버린 !

 

시간 함께 하는 우리의 동행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기 가장 목말랐던 외침!

 

" 시간 동안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없었더냐!"

 

 

인생은 모두다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무거운 이유는

나와 함께 시간 동안 함께 있어주는 친구가 없어서입니다.

 

주님은 오늘 십자가 앞에서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의 부인을 욕하지 마십시오.

베드로의 부인을 욕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욕하지 않고 그들을 위해 믿음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다만 주님의 바램은 그들이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없지만

십자가 앞에서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을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바램이고

작은 자들의 바램이며

그들의 속에 함께 거하시며 우리의 시간

함께 하는 <동행> 원하시는 하나님의 바램입니다.

 

 

 

  * 김동인목사님입니다.

젊은 시절 20대를 함께한 목사님입니다.

옆에 있었습니다.

평신도로 있을 때도 신학교를 준비하며 죽을 만큼 고민과 아픔의 시간을 보낼 때도

옆에 있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남들 말하는 대의 명분도 없었습니다.

서로의 삶이 무거워 힘겨울 그저 함께 있음이 버팀목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대의명분을 말하는 것도 사치였습니다.

겨우 오늘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힘겨운 날들이었습니다.

그럴 마다 확인 것은 옆에 변함없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를 위해 기도 한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내가 다음에 사람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지금 내가 당한 죽을 만큼의 고민 앞에

옆에 함께 있어주는 사람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나와 동행했고

그는 나와 아무 말없이 걸었습니다.

내가 결정할 없고

내가 없는 앞길에 대한 막연함의 무거운 폭풍 앞에서도 그저 묵묵히 함께 걸었습니다.

 

제가 신학교를 들어 가면서 사역지를 옮기셨습니다.

그리고 거의 10 만에 다시 아프리카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아프리카의 광야를 함께 걸었습니다.

서로의 앞길을 없는

확정되지 않은 우리의 미래 앞에 사람은 그냥 걸었습니다.

차를 타고 달렸습니다.

선교지를 동행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함께> 걷고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 인생을 살면서 광야를 걸어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압니다.

광야의 걸음에 그는 곁에 함께 없이 걷고 있을 것이란 것을 말입니다.

나는 종종 말합니다.


"함께 하는 친구 사람만 있어도 나는 남극을 걸어갈 있다"

 

십자가는 명분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친구와 걷는 발걸음입니다.

<함께> 말입니다.

 

예수님에게,

작은 소자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를 대신 져줄 사람이 아니라

십자가 앞에까지 같이 함께 걷는 친구입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말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