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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만찬, 때 그리고 기회

성만찬, 때 그리고 기회

 

 

 

 

 

 

 

 

 

 

성만찬, 그리고 기회(26:16-30)

 

우리가 기다리는 때는 열매를 많이 맺는 때를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때는 다른 사람에게 이름이 알려지고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다른 사람에게 뭔가 자랑할 일이 이루어지는 때를 말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초라함

지금의 낮은 상태를 벗어나서 뭔가 세상을 향하여 할말 있는 때를

기대하며 지금의 힘듦을 이기려합니다.

 

오늘 가지 (Time) 나옵니다.

오늘 사람이 나옵니다.

사람은 가롯유다고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사람 모두 때를 말씀합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잡을 기회를 기다립니다.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26:16)

 

여기서 말한 기회는 바로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람,

인류 역사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준비하십니다.

 

"이르시되 성 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26:18)

 

여기서 사용된 때라는 말은 우리가 아는 그리스어로 <카이로스,kairos>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간을 가지 단어로 표현합니다.

한가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는 보편적이면 일반적인

연대기적인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 말합니다.

그래서 말에서 연대기를 뜻하는 영어 'chronicle' 또는 'chronalogy' 나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물리적 의미의 시간, 모두에게 주어지는 일반적 시간입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때라는 시간에서 사용한 것은 바로 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일반적으로 모두에게 주어지는 시간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시간을 말합니다.

 

가롯유다가 말한 기회는 바로 카이로스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기회는 유카이로스(원어 표기가 안되네요) 좋은 기회, 시기가 좋은 때(time) 말합니다.

 

예수님도 가롯 유다도 모두 카이로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크로노스 일반적인 물리적 시간을

카이로스 의미 있는  특별한 뜻이 이루어지는 시간으로 만들려합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그러하고 가롯유다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반적 시간인 크로노스가 사람은 파는 일로

사람은 자신을 내어주는 일로 달라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때에 관해 말씀하신 것으로 있습니다.

 

첫째, 진정한 카이로스 세상에 의미를 주는 시간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는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기전 초막절이 가까와지자 그의 형제들이 유대로 가라고 했습니다.

이유는 자기를 나타내는 사람은 묻혀서 지내지 않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7:4)

 

그러나 주님은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

이유는 예수님의 카이로스는 자신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때가 되면이라고 말하는 카이로스를 나를 높이는 시간,

나를 드러내는 시간,

세상에 알리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어려움과 아픔과 슬픔을 이기는 모체로 삼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은 나에게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가집니다.

 

그런데 주님은 요한복음 7장에서 카이로스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때는 자신을 드러내는 시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때인 카이로스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7:6)

 

예수님은 때를 말합니다.

< >

<너희 >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카이로스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하고

너희의 카이로스는 준비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의 때는 자신을 드러내는 때를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일반적 물리적 시간에서 의미를 부여하여 살라고합니다.

그래서 카이로스를 향해서 달려갑니다.

그러나 카이로스의 진정한 의미는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생각해야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카이로스를 향하여 가는지

아니면 주님의 카이로스인지를 말입니다.

 

 

둘째, 진정한 카이로스는 무엇입니까?

 

진정한 카이로스는 자신의 몸을 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섬김으로 놓는 것이 하나님의 카이로스입니다.

예수님의 때입니다.

 

주님은 18장부터 계속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의 형상입니다.

종으로서의 섬김을 말씀하십니다.

말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포함한 예수님을 대적하던 사람뿐만 아니라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제자들을 향하여 더더욱 강하게 말씀하시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간의 의미는 바로 섬김으로 자신의 몸을 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 성만찬을 준비하십니다.

이것을 시간을 예수님은 기다리고 기다렸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을 능력을 내놓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때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카이로스는 세상을 위해 친히 종으로 섬기는 자신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과 피를 드리는 기념,

몸과 피를 섬기는 자로 드리는 유월절 예식전에 것은 바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3:14)

 

예수님의 카이로스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육체의 모든 것을

세상을 위해 놓는 것입니다.

 

셋째, 카이로스의 의미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카이로스의 때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크로노스가 카이로스로서 의미가 있게 되는 진정한 의미는

가장 <가까운> 사람의 발을 씻기는 무릎 끓은 <종의 형상>입니다.

 

 

가롯 유다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자신을 드러내고

세상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용했습니다.

진정한 카이로스의 의미는 자신을 드러내는데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같은 카이로스를 향해 가지만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기회를 보고

사람은 자신의 몸과 피와 전부를 주기 위해 달려갑니다 .

 

사람의 깊이는 말의 깊이가 아닙니다.

좋은 미사여구를 조심해야합니다.

아름다운 말을 하는 목사를 조심해야합니다.

진정한 카이로스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발을 씻기는 <종의 형체> 가질 때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위해 가는 카이로스라는 의미속에

십자가와 고난을 말해도 누가 높으냐고 자신을 높이려는 제자들을 향해

자신의 몸으로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끓는 씻김의 섬김을 표현하셨습니다.

 

 

말의 깊이와 말의 진실은 몸과 피를 드리자 명분과 함께

가장 가까운 사람의 발을 씻기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나타납니다.

주님의 카이로스와 가롯유다의 카이로스가 결정정으로 다르고

주님의 형제들과 주님의 제자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카이로스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종의 형상>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회복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이고 물리적인 시간인 크로노스에 각자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카이로스를 만들어갑니다 .

그러나 카이로스가 하나님의 카이로스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몸을 세상을 위해 내어 놓는 <드림>입니다.

 

드림이 의미가 있게 만드는 것은

지금 가장 가까운,

의도를 알아주지 않는 제자와 같은 저들에게

모범의 삶을 드러내는 섬김의 모범입니다.

 

 

몸과 피를 세상을 위하여 주려한다고 말씀하시던  주님은

말이 진정한 카이로스 임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가까운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이 많습니다.

카이로스,

진정한 하나님을 위한 명분을 가지고 달려갑니다.

크로노스가 카이로스로 만들기 위해…

 

그러나 십자가를 향해가는 인생의 여정에서

가장 가까운 자들의 발을 씻기를 종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을 지나야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말속에는 자신을 드러내려는 인간의 본질적 상향성이 있습니다.

주님을 죽여서라도 내가 높아지려는 제자들처럼,

가롯유다 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주님의 죽음 앞에

누가 높으냐고 싸웠던 본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

하나님의 때는 명분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주님의 카이로스가 나의 삶에 수반되는 함께함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안에 회복된 종의 형상의 무릎 꿇는 씻김과

섬김이 나타날 때부터입니다.

 

 

시간은 두가지 입니다.

가롯 유다의 자신을 드러내는 기회를 찾고 기다리는 카이로스와

십자가의 명분과 함께 지금 가장 가까운 사람의 발을 씻기는

하나님의 형상의 본질인 종의 형상을 회복하는 무릎 꿇음의 자신을 드림입니다.

 

우리 앞에는 <기회>라는 자신을 <드러내기> 원하는 카이로스와

진정한 하나님의 <> 이루는 종의 형상으로서의 <드림> 있습니다.

 

 

세상의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크로노스는

인류 역사를 지나면서 섬김의 카이로스를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카이로스는 드러냄이 아니라 드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명분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의 발을 씻김으로 말입니다.

 

그것이 <성만찬>,

진정한 카이로스를 향하는 시간의 의미로서 떡과 포도주를 먹는 시간입니다.

 

 

 

 *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러다 우박이 한참을 내렸습니다.

해가 났습니다.

그리고 무지개가 떴습니다.

이것이 인류의 시간입니다.

 

시간속에 정점으로 있는 우리의 크로노스에

섬김의 카이로스가 더해질 세상은 보기에도 아름답고

아름다움은 서로의 인생에게 아름다움으로 찾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어려움을 당하는 나의 사역자 사람에게

아름다운 섬김의 마음을 보냈습니다.

인생의 크로노스에 카이로스의 의미가 창조되도록…

하나님은 카이로스의 새로운 창조를 우리를 통해 이루어가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비도 주시고 우박도 주시고 태양도 주시고 무지개도 주신 하나님!

하나님은 새로운 카이로스를 우리의 삶을 통해 창조하기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