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백과 삼 십(마26:6-16)
믿음의 걸림돌은 <계산>입니다.
한마디로 논리입니다. 칭찬의 말로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합니다.
"너 참 논리적이다"
칭찬일까요 욕일까요?
세상적으로 본다면 그 말은 칭찬일 것입니다. 논리적인 사람이 잘 살아 보이니까요.
하지만 믿음적인 측면에서 그것은 너무 큰 약점이 됩니다.
오늘 두 가지 사건을 대조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는 여인이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이고
또 하나는 가롯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판 내용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에는 여인의 향유 사건에 대해 가롯유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12:5)
가롯 유다의 일은 돈을 맡은 자 즉 회계였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닐 때 가롯유다가 돈을 맡았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감이러라"(12:6)
계산이 빠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계산합니다.
계산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계산의 논리에 자신이 빠져드는 것입니다.
그는 여인이 향유를 붇자 삼백 데라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를 위해 쓰지
왜 그것을 머리에 부어서 다 허비하느냐고 책망합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12:5)
<삼 백> 입니다.
삼 백은 논리의 숫자입니다.
가롯유다는 자신의 능력을 포기하고
자신의 하나님 됨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에 논리가 걸림돌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논리와 계산으로 바라봅니다.
논리와 계산의 숲에는 믿음의 거목이 자라지 못합니다.
오직 잡풀만 무성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잡풀이 아니라 에덴 동산을 만드십니다.
그 에덴 동산은 오직 계산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여인은 믿음으로 장례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가롯유다는 믿음이 아니라 논리로 삶을 살아가니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으로 보입니다.
삼백 데라리온은 그에게 엄청난 돈입니다.
돈을 늘 만지는 사람은 돈으로 망합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 돈의 논리, 돈의 계산법 때문에 믿음으로 걸어갈 길을 잃어버립니다.
그는 계산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한 사람의 하루 일당이니 삼 백은 일년치 일군의 연봉입니다.
그 돈이면 얼마나 엄청난 사람을 먹일 수 있느냐는 것이 그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인을 향하여 책망합니다.
그것도 스승인 예수님 앞에서 말입니다.
논리와 계산법에 익숙한 사람은
모든 예의와 체면이 없습니다.
오직 돈의 논리와 계산법이 모든 것 위에 있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앞에 있어도 그는 그 여인을 책망하고
스승을 위하는 그 행위도 비판 받아 마땅한 일이어서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더 논리적이고 효과적이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계산과 논리가 앞서는 사람은 그렇게 면전에서 욕하는 것만 하지 않습니다.
논리가 앞서고 계산이 앞서는 사람은
면전에 대고 욕할뿐 아니라
그 사람도 돈으로 계산합니다.
결국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으로 계산 하던 가롯유다는
예수님은 은 삼십으로 계산합니다.
삼 백을 계산 하던 논리는 사람을 삼십으로 여깁니다.
삼 백의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향유보다 못한 인생으로 그의 스승,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 버립니다.
은 삼십은 종의 몸 값입니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출21:32)
구약에서 소가 종을 받아서 죽이면 주인에게 은 삼십을 주어야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종 같은 인생으로 취급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종의 몸 값으로 팔려 버린 것입니다.
그 삼 십,
종의 몸값으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합니다.
결국 주님은 <종>으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종으로 세상에 팔린 것입니다.
은 삼십은 종의 몸 값입니다.
주님은 결국 종으로 이 세상에서 취급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의도였고
주님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세상의 종으로 사는 것!
이 세상의 종이 되는 것!
그것이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가롯유다는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취급한 예수님의 가치 은 삼십은 바로 종으로 사신 주님의 삶,
우리 인생을 위한 주님의 신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세상은 주님을 종으로 취급하여 아무 쓸모 없는 인생으로 취급했습니다.
그저 소에 받쳐 죽은 종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세상이 복음을 매기는 가치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계산하는 가치입니다.
세상에 치여 소에게 쳐 받혀 죽은 인생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삼십의 돈을 쳐준 대제사장들,
성경을 너무 잘 알고
율법을 너무 잘 알고
논리와 계산에 익숙한 사람들이 우리를 취급하는 가치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향유 삼백 데나리온,
일년을 벌어 한 순간에 다 붇고도 모자라서
머리로 흘러내린 발의 향유를 닦아 내도 감격이 되는 것이
종으로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가치를 아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은 삼십도 안되는 가치,
세상의 논리와 계산법으로 종 하나의 값도 되지 않고
소에게 치어 죽은 인생도 안되는 쓸모 없는 인생으로 보입니다.
<삼백>으로 보이십니까?
<삼십>으로 보이십니까?
사람들은 당연히 삼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손의 삼십이 욕심이 나지
삼백 데나리온은 내 놓지 않습니다.
드리지 않습니다.
둘 다 예수님을 세상의 종으로 여겼습니다.
여인은 주님을 세상을 섬기는 종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하나님 됨을 포기하고 자신의 능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온 세상을 위해 드린 세상의 종으로 여겼기 때문에
삼 백 데나리온이 아깝지 않습니다.
머리만 아니라 발까지 씻겨드릴 수 있습니다.
가롯유다는 동일하게 종으로 여겼습니다.
세상에 치여서 소에 받혀 죽은 종,
아무 힘없고 의미 없는 종으로 여겼습니다.
소에 받혀 죽은 종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그 대가로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주님은 율법대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는 돌로 쳐 죽임을 당한다 했습니다.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출21:32)
논리로 시작한 인생은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주님은 율법의 끝은 종으로 죽는 것입니다.
복음의 끝도 종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율법도 따르지 못하면서
복음도 따르지 못합니다.
주님이 향한 율법과 복음의 방향은
<주님의 종 됨>이고
<우리의 종 됨>입니다.
삼 백과 삼 십의 의미는 둘 다 <종 됨>입니다.
한 사람은 그 종 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한 사람은 그 종 됨으로 소에 치어 죽은 의미 없는 종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됨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인생에 거룩한 <드림의 삼 백>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으로 모자라는 <발 씻김>의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주인됨과 왕 됨으로 산다면
예수를 통해 <은 삼십>만 찾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드리지 못하고 나의 은 삼십만 찾는
논리적이고 계산적인 가롯유다와 같은 논리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삶에 드리는 <삼 백>이 있습니까
계산의 <삼 십>이 있습니까?
*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구역 방문이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제는 13,14구역이 워터발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워터발교회는 현재 건축이 준비중이라 텐트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비록 텐트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얼만 뜨겁게 찬양과 예배를 드리는지 모릅니다.
매년 오시는 집사님께서 올 때마다 교회가 너무 귀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이라고 하십니다.
아이들 장남감세트와 어른들 설탕 한봉지 그리고 과일 두개를 가져오셨습니다.
설탕한봉지를 받아 들고 춤을 추는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였습니다.
어디 설탕이 문제겠습니까?
멀리서 삶의 고달픔으로 시름하는 그들에게 누군가 친구가 되고
벗이 되고 함께 걷는 인생의 위로자가 있다는 것,
그것이 위로입니다.
사람들은 왜 허비를 하느냐고 합니다.
사람들은 늘 계산의 기초위에 인생을 쌓아갑니다.
아닙니다.
인생은 계산과 논리의 기초가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위에 살아왔습니다.
그 은혜 때문에 우리도 종의 거룩함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알아서 일까요?
여느 뷔페 식당 못지 않은 깔끔하고 맛있는 점심을 워터발교인들이 준비를 했습니다.
물론 재료비는 구역에서 주십니다.
그러나 음식이 재료비만으로 해결되지 않지요.
그들의 마음을 알고 교인들이 고급뷔페 같이 준비하고 세팅을 했습니다.
계산으로 될 수 없는 복음 안에서 섬김은 우리의 인생을 더욱 힘나게 합니다.
구역은 또 조그만 선물과 전도지를 들고 집집마다 전도를 다닙니다.
그들의 역사가 백인들에게 억압을 당했기에
외지인에게 닫힌 마음으로 살지만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는 이들의 마음이
그저 슬프게만 느껴집니다.
고단한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저의 마음에 내려 앉아서입니다.
설탕 한봉지에 춤을 추고
3시간을 달려 여기까지 와준 친구들이 고맙고,
그들의 종됨을 고백하는 거룩하게 버리는 향유로 인해
우리들의 예배는 늘 하늘의 잔치가 넘쳐나는 아름다운 노래가 되어
우리 곤한 영혼에 휘파람이 됩니다.
우리는 삼 십이 아니라
거룩한 삼백으로 누군가에게 위로와 힘을 주는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삼백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말하고 기억함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가는 걸음에 힘을 실어주는 여인의 거룩한 향기 때문입니다.
구역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삼 백의 의미가
나와 우리 선교지 사역자와 성도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아프리카 검을 땅을 걸으면 부르는 신나는 휘파람이 됩니다.
13,14 구역 모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