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의 의미-싸워서 이기려 하십니까? (마26:1-13)
우리는 <싸워서> 이기려합니다.
그래서 칼도 들고 몽치도 들고 싸울 준비를 합니다
만반의 전략과 싸움의 결의를 다집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죽이려던 사람들의 준비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관정에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의논을 합니다.
전략을 짜고 의욕을 불태웁니다.
그것이 세상이 싸우는 방법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도 싸울 준비를 하십니다.
그 싸움의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향하여 칼을 들고 몽치를 들고
전략을 짜서 찾아온 그들을 대적할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맨 몸으로 자신의 몸을 내어줍니다.
이유는 싸움의 본질은 그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싸움의 본질은 그들이 아니라
십자가에서도 뛰어 내릴 수 있는 자신,
<하나님 됨>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힘든 것은 하나님의 아들됨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싸우려는 사람들을 저주하지 않고
능력으로 하늘의 불을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가장 힘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능력입니다.
자신의 신분입니다.
나를 위해 사용하고 싶은
나를 위해 이 길을 피하고 싶은
나를 이 세상에 증명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됨을 능력으로 증명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리스도인데
세상 모두에게 증명해줄 힘과 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는 것,
그것이 싸움입니다.
주님은 압니다.
주님의 진정한 싸움은 자신 속에 찾아오는
사단의 전략,
사단의 무기,
바로 나 자신이란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지막 기도는 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의 싸움입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26:39)
예수님은 이 싸움의 본질을 아십니다.
이 싸움의 본질은 나와 하나님의 뜻의 싸움입니다.
나의 나 됨과 하나님의 뜻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나의 나 됨을 증명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단이 우리 안에 넣어둔 죄악의 DNA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시니까?
죽음의 고통일까요?
그럴수 있습니다.
목마름 일까요?
그럴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 있는데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 올 수 있는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능력을 나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능력을 나를 죽이고 있는 그들을 위해 참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고 있는 그들을 향하여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기 위해 나를 증명하는 길을 택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증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증명합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꿈꾸는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나를 이 세상에 알리고 증명하는 것이고
주님의 꿈은 나의 꿈을 산산히 조각을 내고
나의 꿈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꿈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를 증명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나를 죽이려는 사람을 위해 <죽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싸움입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싸움의 본질이 사람이 아니란 것을 말입니다.
싸움의 본질은 사람이 아닙니다.
싸움의 본질은 혈과 육이 아닙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엡6:12]
우리는 늘 사람을 상대하려합니다.
우리는 늘 사람이 보입니다.
우리가 늘 싸움에서 지는 이유입니다.
그들을 이기려합니다.
그들을 나의 능력,
아니 하나님의 능력도 끌어다 이기려합니다.
나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늘의 불로 멸하려합니다.
아닙니다.
진짜 싸움은 그들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나를 증명하고
내 안에서 나를 증명하기 위해 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하늘의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다 쓰려는
바로 나 자신의 <하나님 됨>입니다.
이런 때
한 여인이 향유를 가져와 머리에 붇습니다.
사람들은 욕을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사용하면 얼마나 좋은 일인데
그 귀한 것을 머리에 붇느냐고 <분개>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여인의 한 일을 복음이 전파되는 모든 곳에서 말하여
이 여인이 한 일을 기억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26:13)
사람들이 분개하고
사람들이 욕을 하고
사람들이 비방하는 이 일을
주님은 왜 행한 일도 말하고 기억할 것이라 말하십니까?
주님의 싸움의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전쟁이 무슨 전쟁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과 싸우고 전쟁하는 그 핵심은
겉으로 보기에 그들과 싸우고 그들과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의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능력이 강할수록 자신의 뜻이 강해집니다.
힘이 강할수록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가능성이 많아집니다.
주님은 세상도 무릎을 끓는 자신의 능력을
자신의 뜻대로 십자가에서 뛰어 내려오지 않고
묵묵히 자신을 내어 놓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 길에
그 여인의 향유를 격려의 행위로 인식을 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던 하늘의 음성처럼,
변화산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소리처럼
이 여인의 향유를 부은 일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앞에 자신의 모든 하나님의 아들 됨의 자격과
자신의 모든 능력을 내려놓는 결심에 격려를 더해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장례를 위하여 부은 것입니다.
장례는 싸워서 이기지 않고
<죽어서>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싸워서> 능력을 증명하려는 곳에는 결코 천국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직 나의 나 됨과 나의 뜻만 나타날 뿐입니다.
아직도 싸워서 이기려하십니까?
아닙니다.
죽어서,
십자가에 죽어서 증명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됨입니다.
커져서 나의 나 됨과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명하려 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그런 곳에 없습니다.
주님은 싸워서 이기지 않고
죽어서 이겼습니다.
주님이 죽어서 이긴 것을
나는 죽지 않고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여전히 싸우고 여전히 자신을 증명함으로 살지는 않으십니까?
복음을 거꾸로 이해하고 계신 것입니다.
복음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지 않고
오직 성령 안에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내가 나를 능력으로 증명하고 싶을 때
작은 소자,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을 섬김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을 향해
나를 대적하고 나를 욕하고
나를 죽이려는 세상을 향해 수 없는 욕을 퍼부었습니다.
심판을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 욕과 심판을 모두 주님 자신이 받으셨습니다.
목사를 욕하고
교회를 욕하고
세상을 비판하십시오.
그러나 그 욕과 저주와 비판을 자신이 잘 됨으르 증명하지 않고
오직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섬김으로 십자가에 죽음으로 증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가 진정 싸워야 할 싸움과 전쟁의 본질입니다.
두 DNA의 싸움입니다.
나를 증명하려는 와
십자가에 죽음으로 나를 증명하려는 입니다.
왜 그들과 싸우려하십니까?
싸움의 본질은 내 안입니다.
십자가에서 뛰어 내림으로 나를 증명하려는 나와
십자가에 그대로 있으면서 그들의 욕과 저주를 몸으로 받아 내려는 나입니다.
부활은
생명은 내가 싸운다고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야합니다.
그러려면 십자가에 죽어야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우리는 늘 내가 나를 부활시키고
내가 나를 살리려합니다.
하나님이 살리실 기회를 드려야합니다.
하나님이 일 하실 기회를 드려야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사람과 싸우지 않고
싸움의 본질인 나를 십자가 앞에 두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살리고 하나님이 일으키십니다.
향유를 부은 여인은 그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위해 놀라운 격려와 박수와 기념을 하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을 싸워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음으로 증명하는 그 주님을 위한 위로입니다.
우리 그런 사람들을 위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능력을 증명하는 사람들,
높고 큰 것으로 증명하지 않고
묵묵히 영혼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려 섬기고 아끼고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을 기념하는 일들이 있기를 바랍니다.
어디 예수님만 그렇겠습니까?
선교지 구석구석에서 피부색과 문화가 다른 곳에서,
몇 명의 교인들 붙들고 평생을 씨름하는 작은 교회의 목사님들과
자신의 삶을 어린 영혼 붙들고 씨름하는 선생님들과
각자의 삶 구석구석에서 자신을 증명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이 아니라
아파하고 눈물 흘리는 그들을 위해 귀하게 사용하는 작은 예수들이 말입니다.
그분들이 각자의 십자가를 완성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완성합니다.
복음을 완성해 갑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고 기억하리라"
자신을 증명하지 않고 하나님을 증명하는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위로가 될 것입니다.
*정택섭 윤여현집사님 가정입니다.
저희가 서울에 갈 때면 언제나 마음을 써주시고 일정을 잡으시고
마음으로 몸으로 섬겨주셨던 가정입니다.
윤집사님의 기나긴 병 투병 중에서도 늘 부으셨던 사랑은
우리 가정을 향한 위로와 격려였습니다.
세상적으로 올라 갈 곳까지 다 올라가신 정집사님 같은 분이
저희 같이 변방에 이름없는 선교사를 향한 극진한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시고
섬겨주신 것이 어찌 한번 감사로 기억하겠습니까?
윤집사님은 어려운 중에도 묵묵히 이기시고
모든 병을 완치했다는 소식에 나의 일처럼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특별히 안성으로까지 길을 여시고
아내를 위해 여러 자리를 마련해 주신 사랑은
예수님을 향한 여인의 격려와 위로처럼
저희들에게도 큰 위로와 힘이 되었답니다.
늘 그렇게
자신의 높음과 자신의 큰 것을 증명하지 않고
오직 복음,
오직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내어 놓으시는 두 분의 사랑이
오늘도 가슴 깊이 감사로 남는 시간입니다.
세상 사람과 싸우지 않고
자신과의 싸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감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런 분들이 많을 때
저와 같은 자들은 위로를 얻고
하나님의 복음을 아름다운 소식으로 온 세상에 전파 될 것입니다.
또 감사의 마음을 다시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