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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종말론

진정한 종말론

 

 

 

 

 

 

 

 

 

 

 진정한 종말론 (24:1-25:46)

 

어머니의 사랑이 어렵습니까?

어머니의 사랑은 어렵지 않습니다. 너무 쉽고 너무 아는 것입니다.

복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복음처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사랑을 논리로 설명하고

색으로 표현하고 하신 행동과 말을 분석하고 해석하고

한마디 말씀에 없는 해석을 다는 것자체가 복잡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린아이도 알아 들을 있도록 십자가와 복음,

예수 믿는 것을 간단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 그리고 이웃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오직 남편 사랑 자식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들었습니다.

율법으로 복잡하게 법을 만들고 그러다 율법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종말이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합니다.

당연합니다.

복음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으니 종말은 복잡하게 되는 것이지요.

 

오늘은 주님께서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 종말의 징조입니다.

 

세상 마지막에 있을 일입니다.

한마디로 말할까요?

<갑자기> 입니다.

아무도 모르게입니다.

세상이 갑자기 아무도 모르게 임하는 것이 종말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싶어합니다.

왜요?

미리 준비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단들이 이렇게 극성일까요?

두려워서입니다.

무서워서입니다.

특별한 자신들만의 구원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상식도 모르고 하나님의 본심도 모르는 자들의 열심이 이단을 낳습니다.

 

이런 저런 일들이 세상에 많이 일어나지만 진정한 종말은 한순간에 일어납니다.

인류 역사상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순간에 일어납니다.

노아의 홍수와 다른 일순간에 일어나는 입니다.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23:21)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한순간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없는 일들입니다.

 

 

둘째,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때와 시도 모르고 장소도 모르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와 시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사람들은 이상합니다.

예수님도 모른다고 하는데 자꾸 알고 싶어합니다.

왜요? 미리 준비하려구요?

아닙니다.

진정한 준비가 뭔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럼 그들이 종말에 대해서 그렇게 열정적입니까?

두려움입니다.

버림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

선택 받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단들의 광신의 특징은 두려움이 기초입니다.

두려움의 기초는 버림 받을 것에 대한 의심입니다.

무서움입니다.

특별한 선택과 특별한 사람들만 구원한다는 선민 사상이 종말론 이단의 사상에 들어 있습니다.

 

주님은 때를 알려주실 같으면 성경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이 오심을 미리 예언한 것처럼 주님은 정직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종말론자들은 이상하게 성경을 믿습니다.

뭔가 있을 거라고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날짜와 때와 시를 알려주는 교주를 신봉합니다.

하나님보다 정확하게 날짜를 말하는 교주를 절대적으로 믿습니다.

자신들의 특별한 구원이 달려있고

자신들의 두려움을 안심시켜줄 근거로 교주의 말로 삼습니다.

 

 

셋째, 그러나 성경은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도적이 갑자기 오는 것처럼 마지막은 갑자기 오니까 깨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해야함을 강조하기 위해 주님은 습관이 나옵니다.

반복입니다.

주님은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반복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세가지 비유로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준비 해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종말에 무엇을 준비 해야합니까?

종말을 준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깨어 있는 것입니다.

 

번째 비유는 밭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남기게 됩니다.

그리고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24:42)

 

두번째 비유는 주인이 없을 주인의 일을 대신 하는 종입니다.

동무들과 먹고 때리다 주인을 맞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시는 비유는 열처녀 비유입니다.

다섯은 기름을 준비하고 다섯은 준비하지 못해서

신랑이 맞이하지 못한 자들입니다.

비유의 핵심도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25:13)

 

주님이 오실 때까지 깨어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세가지 비유를 들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면 깨어 있는 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안자고 밤을 새는 것입니까?

무엇이 깨어 있는 것입니까?

 

 

둘째, 남기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으로 달란트 비유를 설명하십니다.

사람에게 다섯, 사람에게 , 사람에게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결산을 합니다. 얼마나 남겼는지를 말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남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착각합니다.

세상에 얻은 것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의 오류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가진 전부는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가진 것으로 주님께 간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주님께 심판 받는다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주님이 주신 것으로 심판하지 않고 주님이 주신 것으로 얼마나 남겼는지를 보십니다.

 

다섯과 둘을 받은 사람은 남겼습니다.

달란트는 사람의 재능이고 능력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것으로 천국에 가면 망합니다.

반드시 남겨야합니다.

 

사람들은 남기는 것을 돈으로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적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학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적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너무 중요해서 세번이나 거듭 말씀하시는 깨어 있으라는 것이 과연

돈을 남기고

업적을 남기고

학력을 남기고

세상적 가치를 남기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

내가 모은 것으로 하나님 앞에 선다 생각합니다.

내가 이룬 업적을 가지고 가려합니다.

세상의 영이 잘못된 깨어있음입니다.

 

그럼 깨어 있는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마지막 비유에 있습니다.

주님이 마지막에 우리가 남긴 것으로 심판합니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남긴 어떤 것으로 심판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종말을 준비하고 깨어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셋째, 작은 소자를 섬기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인자가 양과 염소를 나눕니다.

그리고 임금이 심판을 합니다.

무엇에 근거해서 양과 염소를 나눕니까?

 

작은 소자 하나에게 것으로 심판의 기준을 삼습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25:40)

 

종말의 준비,

깨어 있음의 하나님의 기준은 바로 작은 소자 하나를 아는 능력입니다.

마지막 심판은 바로 작은 하나에게 것으로 결정 한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씀의 비유로 주인이 없을 주인을 준비하는 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때도 주님이 원하시는 종의 모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양식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24:45)

 

주님은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자기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나눠주고 사용한 사람이

같은 자기와 같은 형제를 남기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자기가 받은 양식을 다른 이에게 나눠주는 것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임금의 심판도 동일에게 그것을 설명하십니다.

작은 자에게 것이 결국 종말의 준비이고

깨어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잠을 안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기름은 성령의 기름이라고 말하기도합니다.

성령의 방향성은 작은 자를 향합니다.

성령의 마음으로 채워진 사람을 말합니다.

성령이 가는 방향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은 작은 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성령의 방향은 작은 소자,

작은 자에게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세상에서 높아지고 커지려는 마음으로 살기에

성경과 성령의 보편적 상식의 오류 때문에 깨어 준비하지 못해서

그들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이렇게 종말의 결정적 비유로 임금의 심판을 이야기 했는데도

우리는 말씀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듣고 나면 다시 우리는 살던 대로 살아갑니다.

내가 가는 길대로 갑니다.

성령이 향하고 성령이 가게하시며 이끄시는 곳은 마음이 없습니다.

 

언제 성령의 역사가 우리 삶에 충만합니까?

성령이 이끄시는 곳에 때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

작은 소자,

작은 자의 신음과 눈물을 향하여 내가 나아갈 성령의 충만이 일어납니다.

 

높고

크고

놀라운 것을 기대하며 살면

죽을 때까지 성령이 보게하시는 것은 보지 못하고

허전함으로 살아갑니다.

열심히 살수록 많이 허전합니다.

 

왜요?

성령의 방향

깨어 있는 살아 있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라

나의 인생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성령을 나에게 이끌어 오려 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세상의 법칙대로 대단한 것을 해야 대단한 사람이 된다 생각하고

대단한 어떤 일을 찾아 평생을 다입니다.

평생에 놀라운 일을 한번 이루기 위해 목숨 걸고 살아갑니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인생입니다.

 

주님은 대단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작은 소자의 삶과 배고픔과 눈물에 숨어 계십니다.

그것을 보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눈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 인생,

작은 소자가 하나님으로 보이지 않는 인생이 깨어있지 않는 인생입니다.

 

깨어 있기 위해 기도를 죽어라 하는 분을 봅니다.

하십니다.

그렇게 기도만 하다가 죽으십시오.

주님은 배고프고 목마른 작은 소자에게 있습니다.

 

깨어 있기 위해 죽어라 금식하는 분을 봅니다.

하십니다.

그렇게 금식하다가 죽으십시오.

주님은 나의 금식을 통해 깨어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없어서 굶어가는 그들의 배고픔 속에 있습니다.

그들의 눈물속에 있습니다.

 

깨어 있기 위해 죽어라 성경을 보는 분을 봅니다.

하십니다.

그렇게 성경 읽다가 죽으십시오.

주님은 외로운 광야의 길과 홀로 슬픈 인생의 발걸음 속에 있습니다.

그들의 외로운 인생길에 계십니다.

 

어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기도를 안해서 욕을 먹고

어디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금식을 안해서 저주를 받고

어디 이스라엘이 성경을 몰라서 멸망을 당했습니까?

 

기도를 못해도

금식을 평생 한번도 하지 않아도

성경이 66권인지 나훔이 어디에 붙었는지

디도서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됩니다.

 

주님이 물으시고 깨어 있으라는 것은

평생을 살면서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작은 소자에게 있는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왜요?

인류는 작은 ,

작은 소자에게는 절대 마음을 두지 않는 하나님처럼 사는 인생들이어서 그렇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

깨어 있다는 ,

달란트를 남긴다는 것은 앎에 있지 않고

나와 같은 작은 소자 하나 마음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고

그들의 눈물 흘리는 인생에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남기는 것이고

깨어 있는 것이고

종말에 주님이 찾으시는 유일한 것입니다.

 

 

종말론자가 문제입니까?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특별한 구원을 찾고 선민사상

나만 특별한 구원을 얻는 다는 소망만 있지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이 있는 작은 소자에게는 마음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특별한 구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껏 다시 오시지 않는가?

종말이 지금껏 임하지 못하는가?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여전히 구원받지 못하고

복음으로 배부르지 못하며

위로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를 대신해서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여전히 많아서입니다.

그들이 눈에 밟혀서

그들을 아직도 우리를 통해 마시게 하고 먹이게 하는 일을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 25장은

특별한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성경입니다.

선민 사상으로

나만 구원받고

높고 것을 기대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성경입니다.

무엇이 종말에 일어날 일이고

무엇이 깨어 있는 일이며

무엇을 남겨야 하는지 절대로 보이지 않는 성경입니다.

 

복음을 알아야합니다.

성경을 알아야합니다.

높은 말고

세상에서 나가기 위해서 성경을 보지 말고

그냥 성경이 말하는 성경을 봐야합니다.

 

그래야 보이고 그래야 들립니다.

내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나를 읽어야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들만 보이는 하나님의 비밀이 보여야합니다.

 

 

그래야 종말을 진정으로 준비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직도 무엇을 남겨서 가져가려하십니까?

달란트가 세상적으로 남기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달란트는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신것으로 주님이 우리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주신 것으로 얼마나 작은 자를 섬겼는지로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마태복음 18장의 누가 크냐라는 질문부터 주님은 숨가쁘게 복음을 설명하셨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우리의 오류가 무엇인지

우리가 어디를 가야하고

무엇을 준비해야하는지…

 

그러나 복음은 간단합니다.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천국을 사는 것은 작은 자를 섬기는 섬김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님처럼 살기로 작정한 죄악의 인류에게

오직 한가지만 요구하십니다.

종으로 작은 자를 섬기느냐 섬기지 않느냐!

그것이 종말의 준비입니다.

천국에 들어갈 준비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45-46)

 

 

주님은 작은 하나에게 것이 나에게 것이라고 단정하실까요?

세상은 자신이 하나님처럼 살려고 하는 것이 본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되지 않고 천국을 살려는 사람의 유일한 기준은

작은 자를 섬기는 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심판은 오직 한가지를 보십니다.

안에 전부가 들어 있어서입니다.

지금까지 18장부터 기초부터 설명한 내용의 마지막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에게 것을 자신에게 것으로 결정하십니다.

왜요?

주인을 포기하는 !

하나님 되기를 포기한 인생!

징표는 오직 예수님처럼 종이 되어 세상을 섬기는

작은 자를 섬김으로 크고 높아지려는 세상의 영을 거절한 삶의 증명이기 때문입니다.

 

종말!

깨어서,

남겨서,

영원을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설악산입니다.

남천교회 몇분의 권사님과 집사님께서 섬겨주셔서 설악산을 다녀온적이 있습니다.

귀한 섬김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의 섬김을 통해 저희들이 힘을 얻고 위로를 얻습니다.

한국 사람 한번 보기 어려운 이곳에서 사람들과 함께 어딘가를 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선교사는 선교사라고 위로를 받습니다.

선교사라는 타이틀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안식년을 때마다 주시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골에서 홀로 외롭게 사역하시는 목사님들입니다.

저에게 이분들에 대한 마음이 있습니다.

안식년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이분들을 섬깁니다.

마음을 주시면 섬기라는 하나님의 인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라고 이곳 저곳에서 설교를 요청합니다.

그러면 감사의 마음으로 강사료를 주십니다.

강사료는 그런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는 사모님들께 전해드립니다.

목사님이야 그렇다 하지만 사모님들은 남모르는 아픔도 눈물도 많으십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써야 돈도 많고 본인 신발 하나 속옷 하나 사지를 못하십니다.

주시는 봉투 얼마가 되었든 그분들에게 마음을 전합니다.

누구 사람 시골에서 목회하며

어렵게 사시는 그분들의 삶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렇게 안식년은 그런 분들을 찾아 다니며 식사를 대접하고

섬기려 했습니다.

 

어디 이분들 뿐이겠습니까?

평생 목회를 하시다 은퇴를 하신 목사님들은 어떻겠습니까?

한국교회가 가장 잘못하고 있는 중에 하나는 은퇴한 목사님들에 대한 섬김과 대접입니다.

이것은 다음에 기회가 있을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배부름을 위해 살아갈 동안 우리의 형제들은

외롭고 슬슬히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교사는 선교사라고 위로를 많이 받습니다.

너무 많이 받아서 한국을 갔다 오면 살이 키로씩 쪄옵니다.

그것도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선교사보다 더한 수고와 인내로 각자의 맡은 시골 구석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감당하는 아름다운 분들임을 저는 압니다.

그분들과 함께한 사진을 올릴까하다 마음이 힘드실까 하여 대접을 받은 사진을 올렸습니다.

 

잊지 않아야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크고 높아지기 위해 달려가는 동안

그들의 눈물을 누가 닦을지

그들의 목을 누가 적시고

그들의 배를 누가 채울지 기다리십니다.

 

평생에 잊지 말아야

우리의 마음과 시선입니다.

그런 분을 아신다면 위로의 전화 한통,

위로의 봉투라도 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것이 깨어 있는 삶의 아름다움입니다.

 

 

외로운 그들의 삶의 현장과 사역의 현장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위로와 평강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