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왜 욕하십니까?

왜 욕하십니까?

 

 

 

 

 

 

 

 

 

 

 

 

 

 

욕하십니까?  (23:13-39)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내가 무엇을 했기에 그렇게 욕을 퍼붓고 저주를 퍼붓습니까?

오늘 말씀을 읽으며 느낀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평생 참은 욕을 다하십니다.

듣기 민망할 정도로 심한 욕을 예수님은 지금 퍼붓고 있습니다.

 

있을진저~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26구절 동안 무려 8번의 욕과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왜입니까?
이렇게 예수님께서 욕과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까?

무엇을 그들이 그렇게 잘못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조상들이 지은 죄를 동일하게 지을 있는 사람들,

그들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도 그럴 있기에

나도 얼마든지 그런 사람이 있기에,

오늘 말씀은 너무 민망해서 그냥 살짝 넘어가려 했으나

궁금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이런 욕과 저주를 퍼붓는지 묵상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들이 내가 있고,

그들이 행하고 가진 마음이 나와 같을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걸림돌 인생입니다.

막고 있을 아니라 교회로 데려온 사람을 배나 지옥 백성이 되게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23:13)

 

누가 이렇게 하고 싶습니까?

누가 교인을 지옥 백성이 되게 하며 천국 문을 막고 싶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보편적 상식의 오류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취하는 인생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부름에 응답하고 청함에 응답하는 인생이 예수 믿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부름은 온데 간데 없고

청함은 외면하는 인생이어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존재 기초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부르심과 상관없이 사는 인생이 천국 문을 막고 서있는 사람입니다.

데려온 사람을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이유입니다.

 

부름에, 청함에 응답하지 않는 인생은 진멸한다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부름과 상관없이 살아갑니다.

내가 원하는 목표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보다 앞섭니다.

 

그래서 모든 순서가 바뀌어서 모든 우선 순위가 바뀌고 모든 가치가 바뀌었습니다.

주님은 이제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둘째, 뒤바뀐 가치의 인생입니다. 

 

성전과 성전의 금의 가치가 바뀌었습니다.

성전으로 맹세하면 지키든지 안지키든지 상관이 없고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키라합니다.

 

제단으로 맹세하면 상관이 없고

제단 위의 예물로 맹세하면 지키라합니다.

 

성전은 성전 안에 계신 분을 봐야 하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오직 사람이 드린 금의 가치만 생각합니다.

제단이 예물을 가치 있게 하는데 제단은 온데 간데 없고

예물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뒤바뀐 가치입니다.

우리의 가치가 바뀌면 형식은 남지만 정신은 사라집니다.

 

성전으로 시작했다 금으로 끝나고

제단으로 시작했다 제물로 끝이 나는 인생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임재 하는 임재의 장소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사죄의 은혜인 성전으로 시작했지만

성전보다 누가 많이 내냐

누가 좋은 것을 드리느냐

누가 많이 가졌냐의 가치인 금이 성전을 대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크고 많고 화려하고

많이 가진 것이 우리의 가치가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이 가치의 기준이 되고

얼마나 가졌느냐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행복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것이 십일조는 많이 하는 것으로 그들은 오해했습니다.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렸습니다.

이것들은 약용식물입니다.

그들은 너무 작은 것까지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거룩한 모습을 보입니다.

신앙이 좋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버렸다고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23)

 

율법의 형식,

신앙의 표준이 십일조와 형식이 대치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이 드리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를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도 하지만 긍휼과 정의와 믿음도 저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신과 형식의 가치가 바뀌어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할수록 형식이 목표가 됩니다.

율법은 더더욱 기준이 높고 많아집니다.

하지만 사람 하나 소중히 여기고 사람 용서하고

품고 용납하며 믿음으로 그들을 용납하는 마음을 없다는 말입니다.

사정의 칼날은 높아지고 비판의 소리는 커집니다.

그들이 외치는 소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작은 부분까지 기준을 세운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말씀의 정신을 함께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정신을 빼고,

복음의 정신을 빼고 형식만 남는 신앙은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포도주를 먹다 하루살이는 채로 걸러는 비유를 들어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고 하십니다.

 

"맹인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 내고 낙타는 삼키는도다"(23:24)

작은 죄는 문제를 삼고 진짜 문제는 아무 상관없이 마시는 인생입니다.

주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가볍게 여기고

가벼운 문제는 목숨 걸고 따지고 지키려는 우리의 오류입니다.

 

십일조는 철저히 강조하고 십일조는 철저히 기준을 요구하면서

이웃에 대한 용서와 어려운 자에 대한 긍휼과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의 기준은

희미합니다. 이것이 <뒤바뀐 가치의 오류>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핵심 내용은 버리고 핵심을 담은 그릇만 취하는 잘못된 오류의 인생으로 남았습니다.

저들이 욕먹는 일이,

조상들도 그러하고 그들도 그러한 잘못된 오류 속에 내가 없다고 말할 없기에

오류의 질주 속에 바람의 시원함을 즐기면서도

바람이 두려운 이유입니다.

 

 

셋째,  속과 겉이 다른 인생입니다.

 

사람은 속과 겉이 달라야합니다.

속에 있는 말을 다하면 어디 관계가 남아 나겠습니까?

가면을 써야 하고 변장을 해야 하고 그러다 속은 환장을 하는 거지요.

그것이 참고 인내하고 사람을 세우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겉과 속이 다른 것으로 욕을 엄청합니다.

 

주님은 이들을 맹인이고 눈먼 자들이라고 칭하십니다.

봐야 속은 보지 않고 겉만 본다는 것입니다.

겉은 회칠한 무덤,

속은 시체가 썩어 가는데 겉만 하얗게 칠해 보기에 좋은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탐욕> <방탕>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겉은 옳게 보이지만 속은 <외식> <불법> 가득합니다.

 

기억 해야합니다.

누군들 처음부터 탐욕과 방탕했겠습니까?

누군들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겠습니까?

살다 보니 속과 겉이 달라지고

살다 보니 속보다 남들 보이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생이 것입니다.

 

이게 어디 이들의 문제 겠습니까?

바로 나의 문제입니다.

바로 목사의 문제이고

바로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되고 우리가 그들과 같이 되었습니까?

 

다른 사람의 <걸림돌 인생> 되고

<뒤바뀐 가치> 살아가고

<겉과 속이 다른 인생>으로 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보다 잘살려는 마음입니다.

남들보다 뛰어 나려는 마음입니다.

일등 하려는 마음

바로 <비교>입니다.

 

비교의 끝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살고 싶은 에덴동산의 욕심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주님이 놓으신 죄의 근본 해결이 무엇인가?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걸림돌 인생,

뒤바뀐 가치,

겉과 속이 다른 모든 이유의 근본은

내가 높아지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려는

<하나님과 같이> 에덴동산의 유혹이 죽을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닙니다.

 

유혹이 걸림돌 인생을 만들고

뒤바뀐 가치를 낳고

겉과 속이 다른 인생을 만듭니다.

 

하나님의 ,

하나님이 놓으신 세상을 위한

<하나님과 같이> 태초에 찾아온 유혹,

인류가 잘못된 오류 속에서 살아날 유일한 답은

오직 <>입니다.

 

주님이 땅의 길로 진리로 찾아오신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버리고

<>으로 오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백성들의 장로와 대제사장들을 향한 많은

욕과 저주와 심판의 말씀의 이유는

하나님으로 살려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인

<종의 모양> 없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하신 창조의 (Key)

바로 <섬김>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삼위일체의 비밀은

<>으로 서로에게 서는 것입니다. 

 

 

인류를 지탱하며

천지창조를 지탱하는 핵심은 바로 섬김과 종의 형상입니다.

인류를 보존하는 핵심은 먼저 자의 <섬김>입니다.

다음 생명을 위해 희생하는 <종의 형상>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이것이 보입니다.

비도 보이고 바람도 보이고

풀도 보이고 개미도 보이고 사슴도 보이고 소도 보이고 초식동물도 보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풀도 안보이고

사슴도 안보입니다.

오직 일등인 사자만 보이고 호랑이만 보입니다.

일등만 보이고 최고만 보입니다.

 

인류가 죄가 찾아오면서 남은 것은 이름없이 섬기는 평범한 자들의

섬김의 일상,

종의 형상은 보이지 않고

오직 최고로 하는 사자와 같은 하나님의 자리만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은 잃었던 믿음을 회복함으로 영원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영원은 오직 종의 형상으로의 회복을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고

주셨던 서로를 섬기는 종의 형상 말입니다.

종의 형상으로 서로를 섬기는 세상이 천국입니다.

 

예수를 믿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회복이 아니라

세상의 영인 사자의 영성을 구하고 찾고 두드립니다.

잘못된 상식의 오류입니다.

 

교회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에 목숨을 겁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예물인 금에 마음이 가고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기는 일을 하고 잇습니다.

 

모든 오류의 핵심은

<종의 형상> 거부한 교회의 보편적 상식의 오류로부터 기인합니다.

 

 

예수를 믿을 예수 믿고 천국 것에 대한 것만 확인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태초의 하나님의 형상인

섬김의 형상,

종의 형상과 모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총리만 보이고

평생 한번도 발을 뻗고 자지 못한

종의 형상으로서의 요셉을 말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200 대군의 리더만 말하지

평생 그들을 섬겼던 모세의 종의 모양을 말하지 않습니다.

 

 

종의 모양,

종의 형상의 회복이 보이지 않으면

성경은 사자의 영성만 보이고

사자의 용맹함만 보이고

사자의 하나님과 같은 형상만 보이게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을 장로들이 무엇을 그렇게 잘못해서

이렇게 예수님은 욕과 저주와 심판을 목이 터져라 외치십니까?

누구보다 하나님을 믿으려고 했고

누구보다 헌금을 하려 했고

누구보다 율법을 지키려 했고

목숨을 놓고 교회를 다닌 그들입니다.

 

그런데 ,

그런데 이런 욕을 먹어야합니까?

 

모든 것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뛰어 났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회복하고 싶은,

하나님이 원하는 회복,

하나님이 알아 주기를 원하는 유일한 한가지는 빼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잃어버린 형상,

천지와 세상이 운행되는 하나님의 형상의 원리

<종의 형상>입니다.

<종의 모양>입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주님을 믿었지만

주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

종의 형상을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태초에 에덴동산에서 잃은 것은 <종의 형상>입니다.

사단이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 하다 실패하고

인간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게 하려고 찾아와 !

하나님처럼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섬기는 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 이름을 지어주고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말에 속아

지금까지 살아온 인류는 세상에서 <사자의 영성>으로 살려했습니다.

그것이 <보편적 상식의 오류>입니다.

보편적 상식이 오류를 낳으면 사람도 망하고 나라도 망하고

교회도 망하고

믿음도 망합니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회복하고 싶은 것을 회복 해야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의 DNA속에 심어 놓으신

하나님의 형상인 <섬김의 형상>,

<종의 형상>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 만이 우리 교회를 살리고

나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 이라크교회 부흥회를 2 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양철교회를 짓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다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나는 <섬기는 >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인이 아닙니다.

그들을 부리는 종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고 후부터 지금껏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많이 섬기기 위해 많이 나누기 위해

종의 형상을 삶으로 이루어 내기 위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때로 뛰어 나고 싶고

때로 다른 사람과 다르단 이야기를 듣고 싶고

때로 뛰어난 사역과 일로 칭찬을 듣고 싶은 욕심이 생길 때가 있었지만

저는 저를 압니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

실력도 능력도 배경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요.

 

저는 1때부터 예수를 믿었습니다.

교회 청소하고 교회 잡일 하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을 부서의 작은 일들을 섬기고

계단에 있는 방송 장비 부여잡고 추운 겨울날 추운 바람을 맞으며

주를 위해 섬기는 남모르는 섬김이 좋았습니다.

매일 오후는 학교를 마치고 교회서 살았고

토요일 주일은 거의 교회에서 지냈습니다.

대학 동안은 방학이면 각부서의 각종 수련회를 섬기느라 어려운 집안 형편을 알면서도

한번도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섬기는 것이 좋았습니다.

종처럼 사는 것이 좋았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저는 <종보다 못한 인생>입니다. 

주를 처음 만난 ,

나를 찾아오신 예수님 앞에 나의 실체를 것입니다.

부적을 들고 수련회를 악하고 악한 자인데 주님은 그날 저를 부르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 악하고 더럽고 추하고 모든 죄로 인해 죽을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평생을 섬기기로

평생을 주를 위해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사역자도 목회도 몰랐습니다.

그저 교회의 작은 일들,

교회의 어떤 사람이라도 섬기는 자리가 주를 위하는 일인줄 알았습니다.

 

주를 믿고 주를 위해 산다는 !

종으로 산다는 것을 그때 알았습니다.

주인으로 자격도 주인으로 어떤 것도 없음을

주님을 만난 첫날 나는 알았기에

나는 평생을 지금껏 종으로 살기를 작정하고 살아갑니다.

 

섬겨야 사람들이 많습니다.

기억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선교사이어서 가지 못하고 연락도 못하고

겨우 가까운 분들을 섬기는 안타까움으로 살아갑니다.

 

평신도로 살았으면 많이 섬기고

평신도 살았으면 귀한 분들 가까운 곳에서 많이 대접하는 인생을 살고 싶었는데

하나님은 여기 멀리 아프리카로 보냈습니다.

 

내가 섬겨야 영혼들이 여기에 있어서겠지요.

내가 아는 분들보다 못하고

초라하고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흑인들의 영혼을 섬기며

낮아진 삶으로 살라고 여기에 보내셨겠지요.

 

낮은 사람,

초라한 사람,

말이 통하고

상식이 통하는 여기 사람들을 섬겨야 만큼

나는 초라하고 흠이 많은 사람이기에

묵묵히 <종의 형상> 회복하는 이곳에서

주님의 시간까지 섬김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

많이 섬기는 삶의 기쁨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진정한 의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