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오는 시험 3 -경험의 한계 (마22:23-33)
믿음의 반대인 이성과 합리의 한계가 어디인가?
이성과 합리의 한계점은 바로 경험입니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리를 편다 할지라도 그 한계는 바로 <자신의 경험>까지입니다.
사람들이 믿음의 길로 나아가는데 가장 걸림이 되는 실제적인 문제는 <나의 경험>입니다.
우리는 살아온 대로 생각합니다.
생각한대로 살지 않습니다.
습관으로 살아갑니다.
그 <습관>은 바로 나의 <경험>이 길잡이가 됩니다.
우리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고 늘 했던 것을 반복하는 이유는
자신의 경험이 자신의 세계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의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은 아닙니다.
늘 새로운 것에 대한 시도를 하게 하십니다.
늘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가는 기초는 무엇인가?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은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전제입니다.
그 길에 대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전제 될때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걸림돌은 <경험>입니다.
그 경험 안에 갇혀버리는 인생입니다.
오늘 세 번째 시험은 바로 <경험의 한계>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다시 시험합니다.
질문합니다.
그 질문의 한계는 바로 자신들의 경험입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질문의 한계는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 중에 자신들이 가장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모세>입니다.
모세를 거론하면서 질문합니다.
모세의 말에 한 남자가 결혼해서 죽으면 그 아내는 남자의 형제를 남편으로 맞아야 하는데
그 아내가 일곱 형제와 결혼을 한다면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논리는 펴는 말의 가장 강력한 논리의 끝은 무엇입니까?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아본 사람,
그렇게 말한 사람입니다.
경험의 끝을 아는 사람이 그들 논리의 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마디로 이들을 정의하십니다.
"경험의 세계 안에 갇힌 사람은 성경도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22:29)
우리의 한계는 바로 경험의 세계입니다.
그 경험의 수치로 성경을 재고,
내가 경험한 그것으로 성경을 보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내가 경험한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절대로 경험되어지지 않습니다.
왜 예수님은 오직 믿음만을 요구하실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경험의 한계를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경험으로 믿음도, 부활도, 생명도,
하나님 나라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르치기 위해 하신 일은 오직 한가지 입니다.
경험하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험에 근거한 이성과 합리적 삶이 아니라
초월적 삶으로 그들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신자들에게는 이 초월적 신앙의 경험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경험한 것은
초경험적 은혜입니다.
광야 반석에서 물이 나고,
하늘에서 날마다 만나가 떨어지고 해가 뜨면 곧 사라지고
어느 곳에선가 메추라기가 날아와 떨어지고
광야에서 구름으로 해를 가리고
신발과 옷이 헤어지지 않는
가장 기초적인 경험에서 얻지 못하는 초월적 경험을 통해
믿음으로 사는 맛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세상이 있구나!
내가 알고 있는 경험에 근거한 이성과 합리를 뛰어 넘는 초경험적 세계가 있구나하면서
믿음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맛을 보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죽고 난 후에 일어나는 부활의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살아서 초경험적 은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내 마음속에 임한 성령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도 성경을 오해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경험의 세계에 갇힌 사두개인들에게 이렇게 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니"(22:32)
우리는 늘 그렇습니다.
경험되어지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해서 논리를 폅니다.
남아공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모여서
남아공에 대해서 논쟁한다면 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 갔다온 사람이 한마디를 하면 끝입니다.
믿음의 눈이 없으며
초경험적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활은 죽은 사람들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늘 죽은 이야기를 우리의 대화로 삼습니다.
그래서 그곳에는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있는 초경험적 믿음의 대화 안에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늘 내가 경험하지 않은 <불확실성>에 대해서 논쟁합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일에 대해서 논리를 폅니다.
그것이 <죽은 자>의 일입니다.
그것이 죽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반석에서 물이 난 이야기를 하십시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떨어지고 그것을 먹은 초월적 경험을 나누십시오.
하늘의 구름과 불기둥이 내 인생을 인도한 초월적 경험을 나누십시오.
그것이 살아있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경험의 한계를 넘어난 이야기가 우리를 죽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일어나지 않은 불확실성에 대한 논쟁보다
나의 삶에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초월적 경험을 이야기 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만 여호와를 섬깁니다.
내가 아는 초월적 경험,
내가 경험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 사람만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 "(수24:31)
왜 우리가 타락하고
왜 우리가 각자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할까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해서입니다.
경험한 하나님이 없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도록 때로 가나안 땅에 이방민족을 남겨놓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삿3:2)
너무 좋아야 할 신앙생활이
너무 행복해야 할 믿음생활이 왜 가시 같은 이방민족 같은 일들이 찾아옵니까?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경험의 울타리를 내가 보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의 세계로 확장하시려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경험한 사람만
세상이 시험하는 논리와 이성과 합리의 논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논리와 이성에 갇혀있는 분이 아닙니다.
남겨두신 이방민족들,
남겨두신 내 인생의 걸림돌들을 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시고
한계를 초월하는 은혜로 그분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을 아는 사람만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 시대는 <논쟁>만 많고 하나님의 초월적 <경험>이 희미한 세대입니다.
그 시대는 늘 경험되지 못한 것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아픔은 우리의 앞 세대가 가졌던 하나님을 아는 경험이 점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시대는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경험이 없는 세대는 하나님을 떠납니다.
신앙의 부흥은 지금 세대의 부흥을 만들지만
신앙의 부흥을 경험한 그 다음 세대는 경험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습니다.
이론이 남고 살아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쇠퇴입니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해야합니다.
아이들이 전쟁(각 가정과 개인의 문제)이 하나님을 통해 이긴다는 것을
경험하게 해야합니다.
그래서 <풍요함>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최대의 적입니다.
가나안을 들어가기 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염려한 것은
풍요함 때문에 하나님을 통한 전쟁의 경험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몇 민족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 하사 <남겨 두신> 이방 민족들은 "(삿3:2)
하나님을 경험할 기회가 없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려 하지만 부모들이 다 해주니 아이들에게 하나님은
부모가 되었습니다.
부모가 없으면 살지 못하는 아이들,
부모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의 신앙으로 얻어먹는 세대가 지금 세대입니다.
이 세대가 몇번 거듭하면
우리의 아이들에게 남는 것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고
죽은 자에 대한 이야기
옛날 옛적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손들이 예수님과 싸우고 있고 시험하고 있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대제사장들 백성들의 장로들입니다.
직책의 문제가 아닙니다.
목사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얼마나 형식적이며 제도적인 것에 충실하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경험함으로 아느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세대!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성경도 오해합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오해합니다.
예수님도 시험하고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아픔을 나누십시오.
가나안의 남은 민족들을 나누십시오.
내 인생의 이루지 못할 산들을 나누십시오.
그리고 그 아픔과 민족과 산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기게하시고
초월적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게하십시오.
그것 만이 우리가 살고
우리의 자녀들이 살고
교회가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한 경험이 아니라
내 인생의 경험에 갇힌 이성과 논리의 한계속에서 산다면
우리는 오늘도 예수님과 대적하는 자녀들을 키우는 꼴이 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늘 살아 있는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야합니다.
경험되어 질 때 만이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 됩니다.
하나님!
우리의 머리속에서 세상 밖으로 모셔 내야합니다.
그것이 믿음을 가진 우리의 할 일입니다.
* 다빈이와 수빈이는 남아공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살다보니 눈을 알지 못합니다.
감사하게 배목사님 강원도 집회에 함께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많은 눈은 처음 보았습니다.
책으로 알고 들어서 알던 이 눈이란 것을 지겹도록 보았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일부러 여행을 다닙니다.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합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아이들이 경험을 통해서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들에게 오직 한가지를 가르치기 원하십니다.
더 높아지고
더 많이 가지고
더 좋은 환경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한가지를 위해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남겨두십니다.
전쟁이고
아픔이고
싸워야하는 목숨을 내건 일이지만
오직 한가지!
하나님을 아는 세대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에게 주어야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좋은 환경,
양질의 교육,
물질적 풍요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험하게 함으로 얻어지는
하나님을 아는 초월적 경험입니다.
그 경험이 그들을 영원히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교회는 지식도 많아졌고
물질적 풍요도 넘쳐나고
예배의 수도 많아졌지만
그렇게 많아지고 좋아진 것에 비해
하나님을 아는 초월적 경험가 지식이 적은 세대입니다.
우리가 회복 할 것!
하나님을 경험하는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바다로 나가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처럼
내 생각과 갇힌 세상을 나가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믿음의 세계에 들어가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나를 살리고 나의 자녀들을 살리는 것!
경험적 한계를 초월하는 믿음의 발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