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오는 시험 2 - 말 (마22:15-22)
공적인 사역을 시작하기 전
사단이 첫 번째로 물은 것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입니다.
성전에서 십자가를 코 앞에 두고 다시 물은 것은 <자격>입니다
그 자격의 본질은 <나의 것>입니다.
나의 배를 위해,
나의 것을 먼저 채우기 위해 사는 인생이 우리의 시험입니다.
세상은 늘 우리에게 자격을 묻고
그 자격을 채우기 위해 내 것을 먼저 채우는 인생을 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격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인생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수 있습니다.
나에게 자격이 없으며 그저 청함과 부름에 응답하는 인생이 우리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입니다.
그 시험은 <말>입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22:15)
자격을 내려놓고 사는 인생에게 찾아오는 세상의 두번째 시험은
<말>입니다.
말의 올무에 걸리도록 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영성의 척도1>에서 말씀드린 것같이 의도를 가지고 접근합니다.
그것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그 마귀는 늘 의도를 가지고 접근합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말에 대해서는 세상에서 최고입니다.
우리는 말로 세상을 이기려해서는 안됩니다.
말로는 이기지 못합니다.
목사로서 제일 듣기 싫은 말이
"그 목사 말 참 잘하네"입니다.
말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이 잘합니다.
마귀가 잘합니다.
늘 말의 약점을 알고 말로 속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앞에둔 예수님께 찾아온 시험하는 자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말로 시험을 합니다.
말로 시험을 해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첫째, 말로 적을 만들게합니다.
그들의 질문은 그것입니다.
'당신은 참되고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고 겉모습을 따지지 않는 사람으로 압니다.
그러면 질문하겠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닙니까?'
한마디로 가이사와 적을 만드는 것이 질문의 목적입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 신경 안쓰고 본질에 충실한 사람이니까
세금 문제에 대해서도 좋은 답을 주십시오.
가이사에게 세금을 줘야합니까 아닙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지금 원수 관계로 있는 정치적 적인 로마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늘 그렇습니다.
나의 의로움을 치켜세우면서 다른 사람과 원수를 맺게합니다.
당신은 의로우니 의롭게 해야합니다.
그 사람의 나쁜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담임목사나 어떤 사역자에 반감을 품은 사람이 그렇게 접근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대통령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악의를 품은 사람은 그렇게 질문합니다.
'당신을 보니 참 지혜롭습니다. 당신은 그렇지 않을줄 압니다.
당신은 내가 만나본 어떤 다른 교역자와 다릅니다.
당신은 지금 담임목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사역을 참 남다르게 하시고 정직하십니다.
이번 일에 대해서 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어떤 의도를 가지고 질문합니까?
내가 말하는 그 사람에 대해서 같이 적의를 품자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생각의 정당성을 당신으로부터 얻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나의 말 한마디에 적을 만들도록 합니다.
그것이 시험하는 자의 의도입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22:18)
그 시험을 이기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시험에 빠지지 않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둘째, 시험에 응답하지 않는 것입니다.
40일 광야 시험의 두번째 본질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서 천사가 지켜서 안다치는 것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우리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복음을 받은 자로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말에 대한 시험에 주님의 방법은 광야 40일의 시험에서도 그 시험에 대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요구인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라는 말에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복을 주셔서 잘 되는 것,
하나님의 축복하셔서 예수 믿는 자로 잘 사는 것,
부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하는 일마다 복을 받는 것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증명하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복을 주나 안 주나를 늘 계산하면서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말에,
세상이 우리에게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이 원하는 능력을 보이라는 그 말에
대응하지 않습니다.
그저 시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오늘도 주님은 그 말에 본질만 말씀하십니다.
그 본질이 무엇입니까?
셋째,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십니다.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22:21)
말의 올무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세상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세상의 것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으로 나의 나 됨을 증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말에 실수를 합니까?
사실을 사실로 받지 않고
감정으로 받고,
관계로 받고
이해 관계에 따라 받고
내 의로움과 내 능력을 증명하려 하기 때문에 말에 실수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답은 간단합니다.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고 세상의 것은 세상의 법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로,
하나님께 속한 자로 두가지 의무를 다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도된 질문을 가진 자는
그 두가지를 원수 맺게 합니다.
그 두가지를 갈등관계로 만들려합니다.
즉 의도된 질문의 핵심은 <구분>입니다.
<분리>입니다.
말을 통해 서로 <적>을 만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에 대한 정확한 구분이 있으면
우리는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말의 올무에 빠지지 않습니다.
광야 40후 사단이 시험한 세번째 시험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다 보여주고 나에게 절하면 이것을 주겠다.
세상의 영광은 결국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사단이 가진 세상의 것은 곧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세상을 구분하고
세상이 하나님 없어도 세상에 절하면 되는 것으로 시험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말의 올무에 걸리지 않은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구분하는 지혜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되지 않으면
세상의 것을 하기 위해 하나님을 버립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기 위해 세상을 버립니다.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것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사단이 보여준 세상의 부귀와 영광과 높음은 결국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것으로 여기면서 우리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에 넘어가는 이유는
세상의 것이 세상의 것이라고 착각해서입니다.
그래서 말로 거짓말을 하고
속이고 그 세상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버립니다.
아닙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상도 하나님의 다스립니다.
그 세상에 부여하신 권한을 인정하고
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말의 유혹에 넘어갑니다.
세상의 말은 하나님의 것을 세상의 것으로 속입니다.
다 하나님의 것인데 말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말이 누군가와 분리 되게 합니다.
적을 만들게 합니다.
편을 만들고 분당을 만들고 누군가와 원수 맺게합니다.
이때 우리의 지혜는
그것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세상의 그것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내 것이 없습니다.
내 편 네 편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고
하나님의 보내신 사람입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에 대한 명확한 구분,
즉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구분하지 않아야합니다.
그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구분하는 순간
편을 만드는 순간
우리는 말의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말!
<구분>짓는 순간 시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 십자가입니다.
어느 동네를 지나가 찍었습니다.
십자가를 보며 그런 마음이 듭니다.
십자가는 하나되게 하는 능력인데
교회는 끊임없이 나뉘려하는가?
<말>입니다.
말로 자기를 증명하려해서입니다.
말로 자기 의를 증명하려면 결국 자기 의의 증명은
<분리>가 됩니다.
<나뉨>이 됩니다.
<원수>가 됩니다.
다 그렇습니다.
세상이 주님을 찾아온 방법처럼
처음은 우리를 참되고 선하고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고 치켜세웁니다.
자기 의에 취해서,
자기 위를 증명하기 위해 말하기 시작하면
십자가가 가는 길과 반대로 갑니다.
<하나>가 아니라 <분리>가 되고
내 말이 맞음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만들게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증명하기 위해 부름을 받고 청함을 받았지
나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됩니다.
내 말이 맞는지
내 일이 맞는지 하나님께 증명해 달라는 것은 시험입니다.
아닙니다.
나를 증명하지 마십시오.
나를 증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축복을 시험하지 마십시오.
나를 죽이고 십자가를 증명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 일이 교회 안에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