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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오는 시험 1 - 자격

다시 찾아오는 시험 1 - 자격

 

 

 

 

 

 

 

 

 

 

 

 

 

다시 찾아오는 시험 1 - 자격(22:1-14)

 

예수님은 사역하실 한가지 버릇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버릇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같은 내용의 비유를 거듭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거듭 반복해서 말씀하신 것이 많습니다.

믿음에 관해서 그러하고

누가 크냐 누가 높으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그러합니다.

또한 영생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다시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22 1절은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22:1)

 

 

오늘은 무슨 문제로 이렇게 예수님은 다시 비유로 말씀하실까요?

그것은 당신의 <권위> 대한 질문을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의 질문에 대해 거듭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이르되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1:23)

 

 

권위에 대한 질문이 주어지자 예수님은

세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간다라고 말하고 가지 않은 아들과 안간다 말하고 아들의 비유입니다.

 

둘째는 주인이 포도원을 가꾸고 준비해서 농부에게 주었는데

농부들이 열매를 드려야할 종들을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치고 하나는 때렸습니다.

급기야 아들까지 죽이는 일을 했다는 비유입니다.

 

오늘이 세번째 반복되는 비유입니다.

바로 잔치를 베푼 임금의 이야기입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22:2)

 

오늘 세번 거듭되는 비유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대화들에서 나온 비유입니다.

시험의 핵심은 예수님을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약점을 잡는 것이 목적입니다.

약점을 잡아 가두고 죽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세상이 다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려고 예루살렘에 왔을 했던

번째 말의 올무는 바로 <귄위>입니다.

 

권위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오늘 번에 걸쳐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오늘 마지막 비유입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자격> 묻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의 일을 그들이 마지막으로 묻는 질문은 <자격>입니다.

네가 일을 할만한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올무에 걸려 넘어지게 하기 위해서 가지고 찾아오는 것은 <자격>입니다.

 

예수님의 버릇은 너무나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거듭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우리가 올무려 걸려 넘어지도록 묻는 질문은 바로 <자격>입니다.

 

자격에 대해서 주님은 거듭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귄위를 따지는 세상에 대하여 주님이 주신 자격에 대한 답입니다.

 

첫째, 자격은 <청함> <부르심>으로 얻는 것입니다.

 

주님이 권위에 대한 질문에 대한 비유 세가지는

포도원에 일하러 가는 아들이고,

포도원을 가꾼 주인이 농부에게 일을 시킨 것이고

잔치를 베푼 임금이 청한 사람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권위를 묻는 질문의 답은 자격은 <청함>으로 얻어지고

<부르심>으로 얻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격은 부르심입니다.

우리의 자격은 포도원 주인의 청함이고 임금의 청함이고

아버지의 부르심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격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갑니다.

자격을 가지면 하나님이 부르시고 청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부르심을 확인하고

청함을 확인하지 않습니다.

오직 세상적인 자격을 얻기 위해 인생을 허비합니다.

 

세상이 악해질수록 자격에 대해 엄격할 것입니다.

그것은 살며시 교회 안에서 들어왔습니다.

상놈이 장로가 되고

백정이 목사가 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으로 모든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누구나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청하는 자도 자격을 가져야 하고

부르는 자도 자격을 가져야합니다.

청함의 기준도 높고 부르는 자격의 문턱도 높아졌습니다.

 

교회가 타락할 때는 자격이 엄격합니다.

특별한 사람만 성경을 읽고

특별한 사람만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타락입니다.

 

예수님께 질문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묻습니다.

사람이 누구기에 이런 일을 행하느냐?

사람이 누구기에 이런 권세를 행하느냐?

 

자격을 묻습니다.

누가 자격을 주고 권세를 줘서 이런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세상은 자격 없이 시작했으나 자격으로 자기를 증명하는 세상이어서 그렇습니다.

제자를 부르실 때도 잔치에 포도원에 농부로 부를 때도 우리를 자격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자격을 부르고 자격으로 구분하고 자격으로 판단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시니 우리가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니 우리가 헌신하고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자격을 찾으면 답이 없습니다.

나에게 이유를 찾으면 평생 일하지 못합니다.

주님의 ,

포도원의 일은 주인이 불러고 늦은 시간에도 가는 것이고

임금이 잔치에 청하니 감사해서 가는 것입니다.

자격을 논하는 세상은 은혜를 몰라서 하는 것입니다.

 

둘째, <자격>보다 <자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간다 하고 가지 않은 첫째 아들도

포도원에 하러 농부들도

임금이 청했지만 오지 않은 청함 받은 사람들도 모두 자격이 주어진 감격보다

<자기 >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아버지 말에 간다 하고 가지 않은 첫째 아들도

포도원에 주인이 보낸 종들과 아들까지도 죽인 농부들도

임금의 청함에 거부한 사람들도 한결 같이 자격이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아니라

자기의 것을 소중히 여긴 사람들입니다.

 

포도원이 자기 것인줄 알았기에 주인의 것을 뺏으려 했습니다.

잔치에 부름을 받았지만 그것보다 좋은 자기의 것을 즐기려 했습니다.

 

사업을 해야 하고

자기 밭에서 농사를 지어야 하고

찾아온 종들이 싫어서 모욕하고 죽여버립니다.

 

자격보다 자기의 것이 중요하게 생각한 결과입니다.

자격보다 자기를 소중히 여긴 사람들의 결말은 진멸되는 것입니다.

 

포도원 농부와 잔치를 베푼 임금의 청함에 거부한 자들의 결말은 진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21:41)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22:7)

 

<자격> 우습게 여긴 사람들의 결말은 <진멸>입니다.

진멸은 애굽에서 나올 백성이 하나님의 부르심,

하나님의 청하심을 믿지 않고 거부한 군인들이 죽었을 사용한 단어입니다.

 

"모든 군인이 사망하여

 백성 중에서 <진멸>된 후에"[신2:16]

 

아이성을 진멸할 사용한 단어,

가나안에 있던 가나안 족속들을 멸망시킬 사용한 단어가 바로 <진멸>입니다.

 

단어를 지금 <자격 없이>부르신 부름에,

자격 없이 부름 <청함> 응답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값없이 부른 포도원의 ,

값없이 부른 잔치에 청함 받은 ,

값없이 아버지의 일에 초청 받은 일에 응답하지 않는

자격이 아니라 자기 것에 인생을 거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응답이

<진멸>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가지는 공통점은

자격이 <하나님으로부터>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들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일이라고 아버지의 일을 무시했습니다.

포도원에서 일하는 일군들은

주인이 일을 잊어버립니다.

주인은 포도원 가꾸고,

산울타리로 두르고

포도틀을 만들고 망대를 만든 주인의 일을 잊고

자기가 이곳을 누리고 싶어하고

이곳이 자기의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셋째, <나의 > 아버지와 포도원 주인 그리고 임금이 주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이 진멸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나의 >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해서입니다.

 

나의 포도원은 아버지의 것입니다.

농부의 포도원은 주인의 것입니다.

임금이 청한 잔치는 임금의 명령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자기 것으로 착각을 했습니다.

<시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업>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생>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이 진멸의 이유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보냄을 거부하고

포도원 주인의 열매를 거부하고

임금의 잔치 초청에 오지 않았나요?

 

자기 것이라 여겼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 것이라 여겨서입니다.

 

이것이 진멸의 이유입니다.

아이성에서 죽은 아간의 잘못은 전쟁의 전리품이 자기 것으로 삼으려 했을 진멸 당했습니다.

전쟁인데 말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는데 말입니다.

포도원의 일도

잔치의 일도 일이 아닙니다.

부름을 받은 일이고

청함을 받은 일입니다.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격을 묻습니다.

세상의 자격을 따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거주 주시는 자격을 무시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자격은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주신 자격 없음에 대한 은혜는 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도,

시간도,

봉사도,

헌신도 거부하고 것으로 사용합니다.

결과는 진멸입니다.

 

 

오늘 임금은 잔치에 청한 자들이 오지 않자 아무나 부릅니다.

아무나 사거리로 가서 데려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합니다.

청함을 받으나 택함을 받는 자는 적습니다.

누구든지 지금은 청함 받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임금이 잔치 하는 곳에 오셔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발을 묶고 밖으로 보내라 합니다.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22:13)

 

청함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청함이 자격이 아닙니다.

자격은 내가 가진 것이 것이 아니라는 삶의 고백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곳에 가는 것입니다.

포두원 주인이 원하는 결실의 열매는 놓는 것입니다.

임금이 원하는 잔치에 원하는 예복을 입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위를 물은 자들에 대한 주님의 답입니다.

예수님의 버릇입니다.

중요한 일에 대한 거듭 비유로 말씀하시는

주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문제에 대한 반복의 교육입니다.

 

너무 중요해서,

알지 못하면 망하게 되고

알지 못하면 청함을 받지만 결국 쫓겨나게 되는 일이 발생하는 문제여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꾸 세상의 자격을 따집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자격 없이 부르시고 청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격을 묻습니다.

자격을 묻는 그들에게 것을 위해서 살면 그것을

주님의 부름에 거부하는 것이고

자격을 묻는 그들에게 것을 청함과 부름에 맞게 드리면서 살면

그것은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자꾸 자격을 따라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세울 사업에 바쁘고

밭일에 바쁘고

인생의 열매를 쌓는 것에 바쁩니다.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것이 것이 아니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오라는 곳에 오고

가라는 곳에 가고

주라는 곳에 주는 것이 것이 것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의 삶입니다.

 

 

은혜라고 말합니다.

나의 나된 것은 은혜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주셨다고합니다.

주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의 자격을 위해

가지 않고

주지 않고

부름에 응답하지 않고

청함에 인생에 전부를 걸지 않는 어러석은 일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결과는 <진멸>입니다. 

 

<자격> 대한 바른 인식이 없을

우리는 <자기 >으로 자격을 삼으려합니다.

자기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포도원 안에 일군으로 있고

아버지의 포도원에 아들로 있고

임금의 잔치에 청함을 받은 인생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격으로 살려하고

일군이 아니라 포도원 주인으로 살려하고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임금으로 살려하는 인생을 향한

예수님의 거듭되는 버릇!

거듭되는 이유로 우리를 깨우치십니다.

 

깨우침의 은혜가 삶으로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청함을 받으나 택함을 받지 않도록

택함 받은 감격으로 청함을 넘어서는 기쁨의 삶이 이어지기를 기도합니다

 

 

 * 김성주형제입니다.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청년 벧엘회가 개척교회인 이라크교회를 방문할 함께 왔습니다.

남아공에 초에 왔는데 지금 LG전자 남아공 현지에서 발령을 받아 한국에서 왔습니다.

형제는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 대학을 나왔고

한국에서 군대를 가서 레바논에서 파견 근무를 했습니다.

중동쪽에 선교에 마음이 있어서 기도를 그렇게 했답니다.

 

군대를 나와서 취업을 준비하는 시간을 보낼때 갑자기 하나님이 금식을 시키시더랍니다.

그래서 삼일을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새벽에 하나님이 너를 이라크로 보내겠다는 마음을 너무 강하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라크 대사관에 시험을 치고 입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자격이 우수한데 다른 사람이 뽑혔습니다.

이유는 그곳에 다른 사람이 자격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우연히 LG전자에 특체에 지원을 하게 되고 남아공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속한 벧엘회가 이라크로 선교를 간다고 해서 깜짝 놀랐답니다.

"이라크?"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이라크에 보내겠다'라고 하셨는데???

중동으로 선교를 가나요? 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게 아니라 남아공 현지에 중동의 이라크와 같은 이름의 이라크(IRAQ) 개척교회가 있다고 설명을 하고

그가 이번에 함께 와서 저와 만나 이런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중동의 이라크로 자기의 인생을 보내는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중동의 이라크가 아니라 한인교회 선교지의 이라크로 결국 보내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내고 싶어 하고 보내시고 청하는 곳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에 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 됩니다.

 

우리 인생에 내가 원하는 <이라크> 있습니다.

내가 그곳에 가기 위해 자격을 따지고 자격을 따고

그렇게 열심을 향해 인생을 달려가는 나의 이라크 말입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는 이라크를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의미 없이 이곳에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의미 있게 부르시고 준비하시고 지난 세월을 그렇게 준비 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격 없이 부르시는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나의 것이 나의 것이 아님을 고백하고

나의 시간,

나의 물질,

나의 인생을 드려야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세상의 자격와 행복을 위해 나의 사업과 나의 밭을 향하여 가고

청함과 부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주형제가 볼일 없어 보이는 선교현장의 이라크교회를 위해 평생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일에 전부를 거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각자 부르신,

청함 받은 자리와 교회가 있습니다.

부름 받은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일을 우습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자격 없는 은혜가 아니라

나은 자격을 위해 사업도 하고 밭에 가서 일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부르신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임을 기억하고

언제든 부를 달려가는 겸손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청함은 많으나 택함을 적습니다.

택함을 나의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는 나의 작은 삶의 현장이

택함의 길로 인도하는 이유가 것입니다.

 

(왼쪽이 김성주형제이고 오른쪽이 벧엘회장인 이장환형제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