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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고향

두려움의 고향

 

 

 

 

 

 

 

 

 

 

 

 

 

두려움의 고향(21:21-46)

 


권력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의 본심은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백성입니다.

자기의 권력의 자리를 누군가 앉으려 하면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밀어 내려합니다.

이유는 권력과 자리가 것으로 착각해서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일수록 권력을 잡으려합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사람일수록 거짓말을 잘합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 나무를 마르게한 사건은 기도와 믿음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묻습니다.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자기의 권위를 위협하는 사람이 나타나자 사람이 무엇을 가르치고

사람이 어떤 선한 일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고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복음의 길을 제시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의 자리,

내가 있던 자리에 앉아서 그일을 하는 것이 싫을 뿐입니다.

 

주님은 질문합니다.

세례요한은 하늘로부터인지 사람으로부터인지를 묻습니다.

그들은 가지 때문에 답을 못합니다.

첫째는 하늘이라하면 하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믿음 없는 사람이 되어서이고

둘째는 사람에게서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선지지로 믿기에 사람들이 두려워서 말을 못합니다.

 

우리가 두려운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결국 두려움은 사람입니다.

권세를 가진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타락합니까?

언제부터 자리에 연연합니까?

언제부터 두려워지기 시작합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보이기 시작하면 두렵습니다.

사람들의 소리,

사람들의 말이 들리면 두렵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는 사람들이 무섭습니다.

하나님보다 말입니다.

목회자와 장로,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이 의식하는 것은 바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뭐라 말하는지

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이것이 두렵습니다.

사람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의 본심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나의 자리,

나의 권세,

나의 권위가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대답은 <모른다>입니다.

 

"예수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21:27)

 

두려움의 다른 말은 <모른다>입니다.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리를 뺏길 것에 대한 두려움의 표현이 <모른다>입니다.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 앞에 머리를 숙이고

약하고 실수하고 부족한 것을 고백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이유는 약함과 불편함과 실수를 고백하는 것은

자기의 자리를 뺏길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입니다.

 

권위를 물은 그들에게 세례요한의 권위를 물은 예수님은 다시 질문합니다.

아들에게 포도원가서 일하라했는데 하나는 대답하고 안가고

하나는 간다고 했지만 뉘우치고 갔다면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했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둘째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본심을 말씀하십니다.

둘째는 세리와 창녀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21:31)

 

그럴까요?

세리와 창녀들이 둘째 아들과 같다고 하실까요?

이유는 세례요한의 외침에 먼저 회개한 자들이어서 그렇습니다.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21:32)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세리와 창기들이 둘째 아들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상을 엎도,

매매하는 자들을 쫓으시고

바꾸는 자들을 쫓으셨습니다.

핵심이 뭡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성전을 엎으신 핵심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고

기도는 믿음이라고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시 백성을 무서워하고

자기의 자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권위를 설명하시면서 다시 믿음을 설명하십니다.

 

너희들이 문젠가?

세리와 창녀들이 귀한가?

너희는 요한이 와도 믿지 않았고

내가 와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오직 믿음으로 세례요한에게 나아갔고

믿음으로 다시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믿음>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예수님의 권위뿐 아니라

세례요한의 외침에 회개하고 나아가지 않은 것은 믿지 않아서입니다.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유,

믿음을 가지 못하면 자기의 권력을 끝까지 버리지 못합니다.

권력이 자기것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권력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권력뿐만 아니라 더한 권력을 가지려합니다.

 

예수님은 아들의 비유에 이어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떠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런데 농부들이 주인이 보낸 종을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치고 다시 보내도 그렇게 하자

자기 아들을 보냈는데 결국 농부들은

아들은 상속자니 죽이고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 하고 결국 아들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권력이 자기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권력과 자리가 영원히 자기의 것으로 착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권력을 주신 분도 외면하고

권력을 주신 분이 보낸 사람도 무시하고 죽입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믿음이 사라진 <인간>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악하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21:41)

 

 

악한 것은 믿음 없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것이 악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은 악한 것입니다.

 

그럼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을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떤 하나님의 권위라도 말씀이 오면 그것에 머리를 숙이고

그것에 회개하고

삶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권위를 물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세례요한이 와도 말씀에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와도 권위를 하나님의 권위로 받지 않습니다.

 

이유는 권위를 포기하지 못해서입니다.

편하고

안락하고

세상이 인정하는 높고 화려하며

세상이 존경하는 자리를 포기하지 못해서입니다.

 

권위를 가진 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반응 하는 ,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길입니다.

주님이 성전에서 찾으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이 사라지면 권위와 권력과 힘이 남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표입니다.

단지 지금은 하나 버티는 것이 목적이지만

조금 힘이 생기고 자리가 생기고 인기가 생기면

그것을 놓기 싫어서 거짓말도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이미 목사의 말도,

누구의 말도 듣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그를 죽여버립니다.

죽여서 아들보다 내가 크다는 것을 증명하여

세상에 자리와 권세를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언제요?

<믿음> 사라지면 말입니다.

 

 

믿음은

첫째, 나의 권세가 누구에게서 왔는지 아는 것입니다.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인 힘의 집합체,

권세의 집합체인 그들은 믿음이 사라지자 나의 권세가

나의 능력에서 나온줄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권세인 하나님의 아들도 세례요한의 회개하라는 외침에도 외면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자리,

지금 나의 나된 것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것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지금이라도 돌이키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갔다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말씀이 기준이 되어 있는 그대로 자기를 하나님 앞에 인정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를 지었다.

죄인이면 죄인이다.

회개할 일이 있으면 회개할 일이 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권세가 인생의 목적이고

세상에서 사는 것이 목적인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받는 것이 죽기보다 싫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사는 사람의 공통점은

나의 약함을 보여주기 싫어합니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믿음은 있는 그대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가던 길을 멈추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하나님 나라를 빼앗긴다 했습니다.

그리고 열매 맺는 백성이 받는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21:43)

 

 

하나님 나라를 뺏앗기고 받는 기준은 하나입니다.

열매입니다.

열매의 핵심은

누가 이야기를 하든 돌이키는 것입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셋째, 믿음은 권위와 권세와 힘도 내려놓는 것입니다.

 

권위와 권세와 힘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른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권세를 집착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습니다.

가진 것을 놓칠까 두려워하고

사람들이 두렵습니다.

 

그래서 잘못한 것에 대한 시인을 하지 않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는 주님의 질문에 <모른다> 답합니다.

 

자기의 가진 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사람이 기준입니다.

사람의 ,

사람의 칭찬,

사람의 존경…

하나님의 기준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물으실 정직하게 답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목사의 말씀,

비록 인간적으로 흠이 있고

약함이 있고 부족함이 있는 사역자,

어리고 경험이적은 사역자가 전하는 말씀이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믿음이 없어서 어떤 말씀에도 정직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정직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정직합니다.

역대왕들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기준은 정직함이었습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기준은 오직 <정직함>이었습니다.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15:5]

 

 

하나님 보시기에의 기준은

오직 <정직>입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실수를 죽음으로 연결하지 않습니다.

다만 정직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의 약함을 아시는 주님은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의 문은 바로

<정직>입니다.

 

역대기서의 왕들의 유일한 하나님의 기준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더라>입니다.

다윗에게도,

여호사밧에게도,

요아스에게도,

아마샤에게도,

아사랴에게도,

요담에게도 그들이 잘한 것은 정직히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것들은 오직 한가지 기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지 아니하고>입니다.

 

믿음의 시작이 뭔지 아십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른다>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처럼 틀린 것은 틀리다라고 고백하고

잘못한 것은 잘못했다 고백하는 정직한 마음이

우리를 믿음의 문으로 인도합니다.

 

 

정직하지 못할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가진 권력과 힘을 놓치기 싫어합니다.

 

목회자에게 필요한 것은,

선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 보기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치루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는 마음입니다.

 

두려움의 고향은 무엇입니까?

<두려움의 고향> <정직>입니다.

 

정직하면 두려움은 사라지지만

정직하지 못하면 두려움은 찾아옵니다.

정직하지 못하는 이유!

권력에 대한 욕심입니다.

가진 것을 놓치기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미 가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들과

아무것도 없는 세리와 창녀들을 대조해서

많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종류의 사람들의 차이점은 오직 믿음입니다.

<믿음의 시작> 바로 <정직>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오직 하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들어가고의 기준은 하나!

믿음입니다.

믿음의 문은 바로 <정직>입니다.

 

 

 * 한인교회 벧엘에서 개척하는 이라크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벧엘은 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하기 전까지의 청년모임입니다.

귀한 발걸음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한국에서 선교지를 오려고 수백만원씩 돈을 모아서 오는 청년들입니다.

가장 선교지에서 가까운 곳에서 사는 한인교회 청년들이 제가 온지 10 만에 선교지를 왔습니다.

그전에 대학생들로 구성된 실로암 청년들이 매년 성경캠프를 인도해주셨습니다.

이제 열정이 직장을 다니는 청년들에게로 옮겨졌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다양한 활동을 하지만 선교지를 공식적으로 것은 처음입니다.

 

감동이 되고 감사했습니다.

다들 한국에서 최고의 기업에 다니는 청년들이고

나라에서 좋은 대학을 나오고

어릴적부터 영어로 모든 것이 되는 엘리트들입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아프리카에 사느냐?

아프리카에 오고 싶어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있으니 여러분이 여기 남아공에서 사는 것이다.

사람은 돈을 버는 ,

남보다 사는 것이 사명으로 살면 세상과 다를 것이 없다. 

살려고 살면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오직 하나님이 아프리카에 살게 하신 이유를 삶에 충족할

그때 우리는 행복해 지는 것이다.

 

남아공에서 이런저런 이유를 사십니다.

어쩔 없이 사는 분도 있고

돈을 벌기 위해, 자녀 교육 때문에 사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으로 우리가 행복해 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땅에 살게 하신 이유를 삶으로 채울 우리는

하늘의 행복과 기쁨을 인생에 채울 있습니다.

 

그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보내신 목적에 맞게 사는 것이 <정직>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돌이키는 ,

그것이 세리와 창녀들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들의 행복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교회,

지금 여러분이 다니는 교회,

지금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보내신 이유를 충족할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는 항상 나의 필요를 교회가 채우라합니다.

우리는 항상 나의 필요를 다른 사람에게 채우라합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나의 즐거움을 위해서 교회가 하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정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두려워서입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할 것에 대한,

내가 사람들로부터 버림 받고 인생이 망쳐질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우리의 행복과 기쁨은 오직 정직한 것입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부름에 정직하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를 보내신 이유,

사람들에게 나를 보내신 이유인 하나님의 사명을 충족할

우리는 행복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놓치기 싫은 나의 작은 권세를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할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이유에 정직하는 !

그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찾아오신 벧엘에게 감사하고

하나님이 주신 행복의 기회를 평생 놓치지 않는 아름다운 청년들

정직한 청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모임을 마치고 사역자들과 함께…)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