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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척도 4- 질문을 잘 해야합니다

영성의 척도 4- 질문을 잘 해야합니다

 

 

 

 

 

 

 

 

 

 

 

 

영성의 척도 4- 질문을 해야합니다 (20:20-29)

 


사람이
화를 내는지 아십니까?

내가 마음이 있는 것에 화를 냅니다.

사람이 상처를 받는지 아십니까?

내가 마음이 있는 것에 상처를 받습니다.

 

오늘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을 했습니다.

우리 야고보와 요한이 당신의 나라에서 좌우편 자리에 앉게 달라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배로 고기를 잡고 그물을 깁다가 어느날 갑자기 세상 모든 사람이 주목하는

예수님을 만나 인생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뿐만 아니라 시골에 있는 어머니가 우리 아들 인생이 바뀌는 기회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바로 <자리>입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바로 자리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너희가 지금 구하는지 알지 못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20:22)

 

사람은 누구나 자리를 원합니다.

한자리 차지 하고 싶은 마음은 세상에 살면 누구나 가집니다.

그것이 세상의 영이 시작된 본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다른 모든 제자들이 분을 내고 분개하고 화를 내었습니다.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20:24)

 

제자들이 분개하고 화를 내고 분히 여겼습니까?

<자리> 제자들도 <마음> 있어서 그렇습니다.

 

<마음> 있기 때문에 <> 나고

<마음> 있기 때문에 <상처> 됩니다.

 

사람은 마음이 없는 것에는 절대 화가 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없으면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상처와 화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부터 받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세베대의 아들들과 어머니로 인해 화가 났습니다.

자신들은 지금 마음은 있지만 노골적으로 말을 못하였을 뿐인데

그들은 지금 어머니를 이용해서 자신들의 본심을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어서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제자들도 노리고 있는 자신들의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는 때문에 화가 나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마음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자리가 불안해서 입니다.

자리에 마음이 있는데 같은 제자 중에,

정확히 말해 경쟁자 중에 자신의 배경을 이용해서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세습에 대하여 화가 납니까?

자리가 자리가 수도 있다는 희망입니다.

희망이 사라지는 세상이 싫은 것입니다.

세상은 자리가 탐이 납니다.

높이 오르려는 자리,

누구의 자리가 될지 모르는 자리에 대한 <희망의 모호성> 앞에

화가 나고 분개하고 분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자리가 주는 매력 때문입니다.

어떤 매력입니까?

 

바로 자기 맘대로 있는 힘입니다.

자기 임의대로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을 움직이는 파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들의 청탁과 제자들의 분히 여김을 보고

정확하게 세상을 분석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20:25)

 

 

세상 집권자들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임의로> 주관하는 것입니다.

 

 

'임의로'라는 말은 <주인 행세하다>라는 원어적 의미를 가집니다.

그리고 권세를 부린다는 말은 <휘두르다>라는 원어적 의미를 가집니다.

 

한마디로 세상은 오직 한가지를 위해 자리를 찾아갑니다.

<주인 행세하면서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자리를 차지 하려는 제자들의 본심이 무엇인지 세상의 집권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사실 너희 들이 옆에 있기를 원하지만 본심은 바로

<주인 행세하면서 사람들을 마음대로 휘두르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리가 생기고 권력이 생기고 힘이 생기면 한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맘대로 하고 싶고 사람들과 조직을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희열을 느끼고 왕이 된듯한 마음,

인간의 본질인 왕의 자리에 앉아 하나님 흉내를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휘두르지 않고 임의로 하지 않습니다.

의와 진실과 원칙을 지키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세상을 움직이는 운행 원리는 보이지 않고

오직 임의대로 하고 싶고 세상과 사람,

돈과 권력,

힘과 조직을 맘대로 휘두르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자리가 없을 때는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보이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자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우리는 자리에 마음이 생깁니다.

왜요?

우리의 본성,

임의대로 휘두르고 싶어서입니다.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선교지에서 가장 타락하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선교를 못하는 것입니까?

선교의 열매가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선교지의 타락은 선교사가 현지인들을 마음대로 휘두를 때입니다. 

선교사의 영향권 안에 안에 있는 사역자들을 임의대로 대하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 타락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열매가 적고

재정이 적고

사역지가 많지 않은 선교사님들이 훨씬 타락할 가능성이 적어집니다.

그러나 열매가 많아지고 선교의 사역자가 많아지고

영향력이 커질수록 우리는 천국에서 지옥에 훨씬 더 가까와지는 것입니다.

 

현지 사역자들에게 욕을 하고

인격적인 대화와 존경과 섬김은 찾아 없을

나는 타락하는 선교사가 되는 것입니다.

재정을 맘대로 사용하고

교회를 맘대로 움직이려는 마음이 바로 타락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린 전도사 시절 목회를 배우는 부목사 시절은 그럴 가능성이 적습니다.

그런데 작은 교회라도 자신이 작은 교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 앉으면

어김없이 나오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높아지고 싶은 상향성,

그리고 자기가 교회의 주인행세를 하고

사람과 조직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싶은 욕망이 올라옵니다.

그때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어김없이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의 교회,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임의로> <휘둘리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지와 목회만 그런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처한 어떤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지나 목회 현장이나

그리고 어느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휘두르고 싶은 우리의 본성이 문제입니다.

 

가정에서도 우리는 우리의 약한 자들,

내가 높은 위치에서 낮다고 생각하는 작은 아이들이게 우리 마음대로 성질을 내고

임의대로 대하고 마구 휘두르는 자기의 모습을 봅니다.

 

조금만 작다는 틈이 보이면 우리는 어김없이 마구 휘두릅니다.

그것은 아이들에게만 그렇지 않습니다.

약해진 부모님,

힘없는 어르신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임의대로 대하고 휘두르는 자신을 발견해야합니다.

 

 

그런 자신의 본성이 있으면서

우리는 항상 담임목사나 선교사나 사역자들이나

자리에 앉은 어떤 익명의 대상을 향하여 화를 냅니다.

분을 냅니다.

분개합니다.

왜요?

 

자리가 자리의 희망의 모호성 때문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내가 자리가 욕심이 나고 마음이 있어서입니다.

 

아마 어떤 목회자나 선교사나 어떤 자리에 앉은 익명의 사람들에 대해서

화를 많이 내거나 분을 많이 내는 사람은 분명히 자리에 욕심이 많은 사람이고

마음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의해서 상처도 많이 받고

그래서 화도 많이 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많아서입니다.

 

 

사실 일에 자유로울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3 동안 죽을 고생하며 키운 제자들도 예수님이 십자가와 고난과 죽음을 이야기해도

그런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지 않는 것을 보면 문제는 예수님이 죽어야 해결이 되는

죄의 깊은 뿌리의 문제입니다.

뿌리는 바로 <임의로> 행하고 마음대로 <휘두르는> 속성입니다.

 

 

우리의 진짜 영성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인 행세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과 조직과 가족과 관계를 <임의로>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나아가 사람과 돈과 조직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조용히 타이르십니다.

'세상은 그렇다. 세상의 영성은 임의로 대하고 자기 맘대로 휘두르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아야한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20:26)

 

 

임의로 하는 것이 조절이 안되고

휘두르던 것이 조절이 안되면 우리는 결코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18장에서 시작된 <누가 크냐> 예수님의 변증이 서서히 마무리 되어갑니다.

 

 

이제 결론을 내십니다.

 

첫째,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람은 세상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섬김을 받으려는 것이 죄의 원뿌리입니다.

원뿌리를 없애는 방법은 세상을 섬기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으로부터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은 해와 달과 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한번도 요셉은 받는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감옥에서도 왕궁에서도 그는 가는 곳에서 그곳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모형입니다.

마지막은 세상으로부터 절을 받지만 그의 평생은 한번의 절을 위해

평생을 섬겨야 하는 인생을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이야기로 결론을 맺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20:28)

 

누가 크냐의 18장부터의 결론은 바로 예수님 자신의 모형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섬기고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해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누가 크냐에 대해서 상처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누가 높으냐에 대해서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자리에는 마음이 없어서입니다.

세상의 자리에는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누가 큰지 누가 높은지에 대해서

상처도 화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있으면

우리는 일에 화가 나고

일에 분이 나고 분개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높은 곳에 있으면 세상을 살면 화가 납니다.

분이 납니다.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리에 대한 나의 마음이 많아서입니다.

 

정말 사람들,

교회,

일이 걱정이 되고 사랑한다면

우리는 주님처럼 많은 사람을 위해 <섬기는 자리> 있어야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자리가 아니라

화가 나는 자리에 있습니다.

분을 내는 자리에 있습니다.

분개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높은 자리

예수님의 우편 자리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화를 내신 것은 믿음입니다.

"어찌 믿음이 없느냐?"

 

주님은 그분의 백성이 마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백성이 아프면 마음이 상하고

그분의 백성이 눈물 흘리면 함께 눈물 흘리고

그분의 백성이 죄를 지으면 질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자리,

내가 쳐다보는 높은 자리 때문에

그들에게 화를 내고 분을 내지

그분의 마음이 있는 그분의 백성들,

그분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눈물도 아픔도 사랑도 없습니다.

 

주님은 제자들과 오랜 이야기를 마치시고

여리고를 떠나 가시며 눈먼 자를 고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자리,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백성의 아픔이 있는 곳에 주님은 언제나 함께하십니다.

그것이 섬김이고

그것이 높아지는 원리이며

누가 높으냐고 질문한 우리 모든 제자들의 마음을 향한

주님의 대답입니다.

 

눈먼 자들의 소리에 몸을 돌려 그들에게 묻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20:33)

 

"무엇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들이 원하는 것을 위해 나를 내어 드리는 !

그것이 누구 크냐,

누가 높으냐에 대한 <주님의 >입니다.

 

우리의 질문이 변해야합니다.

누가 크냐가 아닙니다.

누가 높으냐가 아닙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이 땅에서 만난 그분의 백성들에게 던진 질문은 그것입니다.

'무엇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우리의 질문이 변해야합니다.

질문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가 훔쳐보는 자리에 마음이 있게됩니다.

 

 

질문은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라는 <질문>

우리 평생의 질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는 남천교회 담임목사님이신 배굉호목사님이

포체스트룸 대학원에서 유학 하실 개척한 교회입니다.

개척 설립 목적은 아프리카 선교를 위해서입니다.

남천교회로 부임하셔서 남천교회와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정은일목사님) 협약을 맺어

아프리카 선교에 집중하여 지난 세월 동안 선교에 진력하고 있습니다.

발걸음은 점점 깊어져서 이제는 구역이 모잠비크 3교회를 제외하고

현재 개척이 진행되 교회를 포함해서 선교지 9교회와 연결해서 일년에 차례씩 방문을 하고 있습니다.

2 전부터 구역의 헌금을 모아 선교지를 방문할 때마다 헌금을 구역이 연결된 교회를 위해 모두 사용합니다.

그래서 오시기 전에 날짜를 잡고 프로그램을 계획할 질문을 하십니다.

 

"선교사님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도와드릴까요?"

 

선교가 이렇고 저렇고 따질 수도 있는데 그저 선교사를 믿고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묻습니다.

저는 압니다.

한국 사람의 수준과 선교에 대한 애정과 관심과 사랑을.

그래서 선교현장이 그들의 눈에 차지 않고 그들의 수준으로 보는 선교현장의 사역자와

성도들의 부족함들이 너무나 많이 보여서 이렇게 저렇게 따질 있지만,

그저 묵묵히 기도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는 말속에

사랑과 격려와 채찍이 있을 압니다.

 

9월부터 11월까지 매주 토요일은 구역이 방문하십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라는 말속에 기도와 후원이 있기에

격려와 채찍이 있기에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채찍을 가하며 힘을 얻습니다.

 

후원해주시는 구역헌금으로 사역자 사택도 세우고,

교회 펜스도 치고,

앰프와 스피커도 사고

텐트를 빌려 부흥회도 하고

어렵고 힘든 사역자와 성도들의 필요를 채웁니다.

 

이것이 주님의 원리라 여깁니다.

우리는 내가 자리에 있으면 잘할텐데라는 마음으로 자꾸 누가 높냐

누가 크냐라고 질문하며 없는 비판과 질타를 쏟아 냅니다.

 

아닙니다.

주님의 방법은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느냐?

내가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는 질문 속에 치료가 있고 고침이 있고

영혼의 세워짐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질문 속에 아름다운 영성이 더욱 귀하게 피어나는 생각합니다.

 

한번씩 한국이 생각납니다.

그것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에 있는 어떤 분들입니다.

일째 계속 생각이 나고

기도하다 보면 어김없이 그들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알게됩니다. 

전화를 해야겠다 격려를 해야겠다 생각하고 전화를 합니다.

, 전화를 하기 전에 기도하며 미리 결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생각나게 하는 사람은 기도와 물질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얼마를 섬길까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전화해서 상황을 물으면 반드시 물질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기도하고 정한 금액이 맞으면 그대로 보내고 필요하면

보태서 보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저를 섬기는 일에 질문하게 하십니다.

질문은 기분이 좋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돈을 보내면 다음은 그분이 전화를 때까지 기다립니다.

한국에 가더라도 그분께 일부러 연락하지 않습니다.

부담스러울까 불편해 하지 않을까해서입니다.

선교사이기 때문입니다.

선교사라는 직분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존재기에

그저 멀리서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연락을 주시면 기쁨으로 가서 식사라도 제가 대접을 하려합니다.

 

주님은 그렇습니다.

질문을 하기 전에 주기로 작정하고 하라고하십니다.

질문을 하려면 주기로 <작정하지> 않고는 좋은 질문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섬기는 자리에

질문 하는 자리에 있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질문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질문할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자꾸 생각이 납니다.

질문하고 싶은 사람들이…

 

그러나 질문을 하는 사람이 주님이 사용하는

아름답고 귀하게 사용하는 사람임을 믿기에

오늘도 저는 질문을 하려합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작정하고 질문합시다.

우리 질문을 ~합시다.

 

(사진은 오기스교회에 구역과 함께 방문하신 박경하장로님입니다.

구역에서 전달해 주셔서 개척하는 이라크교회의 부지 펜스와

악기 구입을 위해 지원해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