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척도 3- 대가를 바라지 않음 (마19:23-20:16)
우리의 불만은 그것입니다.
누구는 부르고 누구는 부르지 않느냐?
누구는 잘 풀리고 누구는 잘 안 풀리느냐?
누구는 높고 누구는 작으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한다 했습니다.
부자는 못 들어가지만 하나님은 하신다 했습니다.
그럼 누가 들어가고 누가 못 들어갑니까?
누가 작은 자, 귀찮은 자를 위해 성실함의 수고를 하고
누가 영생의 기쁨을 가지고 자기 것을 나누는 삶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쌓이면 우리는 한가지 불만을 가집니다.
내가 이만큼 드리고 내가 이만큼 했습니다.
내가 주를 위해 이만큼 했습니다. 그럼 나에게 돌아오는 보상은 무엇입니까?
왜 이런 생각을 합니까?
내가 주를 위해 다 버리고 주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19:27)
부르심을 받은 사람,
영생에 초대 받은 사람은 다 버립니다.
그래서 주를 따랐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의 보상을 받습니다.
놀라운 축복으로 영생을 받고 몇 배의 보상을 받습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19:29)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성의 척도는 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믿는 것,
내가 가장 소중이 여기는,
내가 높아지는 조건을 버리는 것입니다.
배와 아버지입니다.
영성의 깊이는 얼마나 <가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버리느냐>입니다.
세상은 자꾸 실력을 가지고
경험을 가지고
능력을 가지고
돈을 가지고
힘을 가지고 가라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일,
사람은 못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버리는 일>에 <동참>케 하는 일입니다.
주를 위하여 버렸다고 말하는 제자들,
내 이름을 위하여 버린 자마다 여러배와 영생을 받는다 약속합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러나>라고 주님이 그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30)
누가 높으냐고 시작된 18장의 이야기는 20장 까지 그 말씀을 이어갑니다.
오늘 19장 마지막 절에 <그러나>라는 말씀을 던짐으로 먼저 된 자들의 오류를 설명하십니다.
먼저된 자들은 어떤 오류가 있습니까?
주님의 이름을 위해 전부를 버린 사람들이 무슨 오류가 있습니까?
그들의 오류 때문에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그들이 이 땅에서 배를 받고 영생도 받는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기 위해 말씀은 20장으로 이어집니다.
먼저 버린 자들,
먼저 헌신하고 먼저 주님께 전부를 건 사람들,
먼저 다 버린 자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첫째, 내가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20:10)
주님의 부르심에 전부를 다 버린 사람은 참 귀합니다.
주님의 이름과 나라를 위해 자식도 형제도 부모도 논 밭도 다 버린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보상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더 많이 헌신하고
더 오래 헌신하고
더 일찍 포도원에 들어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나보다 늦게 들어오고
나보다 적게 일하고
나보다 덜 헌신한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받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비교의식이 천국까지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영생은 그저 감격이며 감사입니다.
영생과 천국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주인의 선택입니다.
그것이 포도원 주인의 비유,
천국은 포도원 주인과 같으니라고하는 포도원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뭡니까?
누가 크냐라고 시작된 제자들의 질문에 천국이 뭔지 다시 설명하는 것입니다.
18장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20장에까지 연결하고 계십니다.
그 핵심은 크냐 작냐, 많이 받느냐 적게 받느냐라는
비교의식,
서열의식,
높고 낮음과 더 받고 덜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주인에게 모든 주권을 드리고
그분이 부르신 것 만으로 감사하고 감격하는 삶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비교의식,
서열의식으로 천국까지 생각합니다.
특히 더 많이 바치고
더 일찍 바친 사람들의 잘못된 오류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
제자들에게,
더 많이 바친,
주를 위해 전부를 바쳤다고 말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오늘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 높으냐로 시작된 질문에
주님은 다 버리고 좇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한가지를 더 교훈하십니다.
그것은 <주님의 주권>입니다.
부자는 천국을 선한 행위로 간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영생을 위해 무엇을 할까라고 질문했고
주님은 선한 이는 나 밖에 없다고 잘라 말씀합니다.
부자의 잘못된 생각은 뭔가 해서,
공로를 통해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과 동일한 제자들,
주님의 부름에 다 드린 제자들은 더 나아가 더 많이 바쳤기에 더 많이 받을것이란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포도원비유를 통해
먼저 왔다고 더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오는 것도 주님의 선택인거처럼
천국에서 어떤 삶을 누리는 것도 주님의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 사람은 더 크게 쓰임받는지
왜 저 사람은 더 많이 받아 누리는지,
누구는 부르고 누구는 부르지 않고,
누구는 높고 누구는 낮은지에 대한 마음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답,
더 많이 드린 자들에게 대한 마음관리 차원에서 천국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권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을 향하여 화를 내십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20:14)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은혜 때문에 세상 것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주를 일찍부터 섬기고
주를 일찍부터 따르고
다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공로가 되어 천국에서 뭔가 다른 사람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이 소리를 동일하게 들을 것입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우리의 영성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다 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서 헌신하고
주의 이름을 위해서 세상적인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깊은 내면에
세상적 가치가 그대로 존재합니다.
내가 더 일찍 포도원에 들어왔으니 늦게 온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많이 받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오늘 주를 위해 다 버린 제자들을 향하여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다 버려서 버린 것의 배를 받고 영생을 받는다.
그러나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있다.
둘째, 천국을 비교의식으로 계산합니다.
이 땅에서 비교의식으로 살아서
나의 헌신의 정도 만큼 천국에서도 더 큰 것을 기대하고 사는 잘못된 의식을 교정하시는 주님입니다.
제자들은 다 버렸기에 천국에서 더 높은 더 많은 지분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천국은 포도원 주인이다라고 하십니다.
주인의 주권으로 구원을 받아 감격으로 사는 사람은
주인이 주시는 은혜가 어떠하든지 그것조차도 감사함으로 받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주심하지 않으면
먼저 된자는 나중되고 나중된 자는 먼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다시
길에서 따로 열두 제자를 불러 십자가와 고난과 부활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 말씀이 끝나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찾아왔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을 주의 나라의 우편과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 일은 누가 되든지 하나님의 소관이다.
주님은 평생 온 맘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의 뜻을 순종했습니다.
그 주님의 마지막 순종은 지금 이뤄지지 않는 미래에 대한 모든 권한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비유처럼 주인의 주권을 인정하는 삶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천국을 살지만 세상처럼 사는 것은
천국에서조차 세상의 가치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들입니다.
영성의 척도가 무엇입니까?
더 받을 것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 요구하지도
더 바라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저 부르신 것에 감사하고
그저 천국에 살 수 있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저가 아닙니다.
천국은 놀라운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위대한지 모르니 세상의 가치고 천국에서도 더 많이 받고
적게 받는 비교의식으로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제자들의 어머니도 다 그렇게 평가합니다.
우리는 늘 이런 헌신과 이런 공로의식으로
교회 안에서 더 높은 자리를 기대합니다.
그것은 사람에게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당당히 요구합니다.
그 요구들에게 대해서 주님은 천국을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우리의 잘못된 영성을 지적하면서 말입니다.
그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다 버리고 좇은 제자들에게 주인의 주권,
더 주든지 덜 주던지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뢰를 말씀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개척교회를 하고
어떤 교회와 일을 세워갈 때 더 많이 바치고 헌신했다고
더 많은 지분을 요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저 나를 구원하신 그 천국의 보장만으로 우리는 감격하고 감사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먼저 되지만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천국에서 말입니다.
천국에서 조차 더 받을 기대를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기대는 오직 주님입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전부이고 보상이고 보장입니다.
그것이 영성의 척도입니다.
* 남천교회 김재도장로님이십니다.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내셨고 한국 명의 50위 안에 드시는 분이며
남천교회 장로님으로 수고하십니다.
남아공 선교지를 의료봉사하기 위해 다녀가신 것만 십여년입니다.
이미 장로가 되고 사회적으로도 오를만큼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먼 곳 아프리카까지 매년 10여년 동안 의료봉사를 위해 팀을 꾸려서 오십니다.
대가 없이,
기대하는 것조차 없는 이곳에
매년 의료봉사로 오십니다.
아직 올라야 할 곳이 있는 사람은 오르기 위해 합니다.
높아지기 위해 합니다.
커보이기 위해 합니다.
그러나 이미 사회적으로 교회적으로 오를 곳이 없는 분이
이곳 아프리카 그것도 시골로 한참을 들어온 이곳에서
자비를 들이고 사람을 모아서 그것도 십여년 동안 온다는 것은
그분의 은혜와 구원의 감격을 알지 못하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남천교회와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도 그렇게 귀하게 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함께 사진에 나온 정태석집사님도 매년 선교팀이 오면 차량으로 봉사를 하십니다.
식사로 대접을 하십니다.
그저 감사해서
그저 감격해서 내 것을 나누고 버리는 것이 참 영성의 깊이라 여깁니다.
여기 남아공 현지인은 작은 수고에도 대가를 바랍니다.
조금만 일하면 돈을 달라고 하고
뭔가 기대를 하고 접근을 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작은 것을 기대하지만
우리는 더 큰 것을 기대하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더 높은 것을 가지기 위해 다 버리고 좇아갑니다.
저들을 흉볼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더 지능범이고 우리가 더 악하게 합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
그런 우리에게 구원의 감격과 영생의 기쁨으로 만족하는 인생이기를 기대하십니다.
다시 한번 더 구원의 감격 용서의 은혜가 우리 삶에 넘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