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척도 2-낙타의 노래(마19:16-26)
영성의 깊음을 우리는 자꾸 뭔가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절대 아입니다.
영성의 깊음은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영성의 척도 첫 번째는 귀찮은 것에 대한 성실함의 정도입니다.
사람이 기준인 인생은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지만 늘 사람에 따라 휘둘리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하나님이 기준이라는 외적인 증명은 귀찮은 것에 대한
<성실함의 정도>입니다.
작은 자는 귀찮고 걸림이 되는 존재입니다.
그런 작은 자에 대한 성실함이 우리의 영성을 대변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절벽을 경험한 사람이 다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용서와 구원의 감격을 지나야 합니다.
홍해를 지나고 요단강을 지나는 감격을 지난 사람만이
여리고 성을 아무 말없이 돌 수 있고,
작고 귀찮은 것에 성실함으로 나아가는 마음의 토양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작은 음성,
작은 것에 대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따를 수 있습니까?
용서의 깊은 강을 지난 사람만이
구원의 깊은 바다를 지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영성의 척도에 대한 두 번째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부자 청년입니다.
영성의 척도 두 번째 기준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부자 청년이 주님께 찾아와서 질문합니다.
영생을 위해 내가 어떤 선한 것을 <해야>합니까?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9:6)
일반적인 영성의 관점에서 그 말이 맞습니다.
뭔가를 하는 것이 영성이 깊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의 선으로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그것을 지적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19:17)
우리는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으려합니다.
그래서 어떤 선한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부자 청년을 그것을 질문합니다.
주님은 생명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라하십니다.
그러자 청년은 내가 이런 것들은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주님은 한마디를 더 하십니다.
'네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19:21)
우리는 생명을 뭔가 해서 얻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선한 일을 하면 생명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딱 잘라 말씀하십니다.
선한 것은 이 땅에 오직 나 밖에 없다!
우리는 뭔가를 해서 선한 것이 아닙니다.
이 청년은 뭔가를 해서 선하게 되고 그것으로 영생을 얻으려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착각입니다.
선한 분은 오직 주님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합니까?
주님은 한마디로 정의합니다.
네가 선하다 여기는,
네가 가장 잘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선한 것을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세상 사람에게 내 세울 수 있는 어떤 것,
내가 주님 보다 더 믿고 있는 것,
내가 쌓아서 그것으로 주님께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거꾸로 믿고 있습니다.
뭔가 쌓아서 뭔가 해서 주님께 나아가려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와 신앙의 기초는 용서의 감격과 구원의 감격입니다.
선을 해서,
뭔가 행해서 영생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찌 네가 선하다 하느냐 나 말고는 선한 이이가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답은 버리라는 것입니다.
나누라는 것입니다.
나누는 것은 나눠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아는 사람이 나눈다는 것입니다.
이 청년은 평생 열심히 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해서 돈을 모으는 방법처럼 뭔가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영생을 아는 사람,
생명에 들어가는 사람은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계명입니다.
오늘 청년을 지금까지 평생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으려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가져서, 모아서, 쌓아서 이 땅에서 잘 잘아 보려했기에
뭔가 선한 일을 하면 천국도 들어갈 줄로 생각한 것입니다.
뭔가(good thing)해서 천국이 아니라
뭔가를 버리고 나눠서 천국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한다고 천국이 보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은 이미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 천국 안에서 감사와 감격으로 나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신앙을 거꾸로 생각합니다.
천국을 들어가는 조건,
영성이 깊어지는 조건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전부는 이미 처음 주를 만날 때 결정이 됩니다.
평생을 묵상해도 용서의 은혜와 구원의 감격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 감격과 감사로 나의 것을 나누는 것이고
나의 세상적 가치를 버리고 복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영성은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장 소중한 것,
이 세상에서 내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을 내려놓고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켰다 생각합니다.
살인도 안하고, 도둑질도 안하고, 거짓증언도 안하고
부모도 공경하고 이웃도 사랑했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성이 깊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는 영성의 깊은 경지는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을 계명대로 나누는 것입니다.
성경은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 두 가지로 계명이 나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의무로 생각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의 의무로 생각합니다.
사랑하라 대접하라 섬기라는 다른 사람의 의무,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살인 하지 말라는 나의 의무로 생각합니다.
거꾸로 입니다.
주님은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감격을 살아야함을 17장부터 이어져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성의 깊이는 작고 귀찮은 것에 대한 성실함입니다.
아울러 영성의 깊이는 내가 가진,
내가 남보다 더 가진 것에 대한 <감사의 나눔>의 정도입니다.
버림은 곧 나눔입니다.
영성은 곧 나눔입니다.
부자 청년은 가장 많이 가진 것에 대해 가장 강한 소유욕을 보입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내가 가진 것을 나의 높음과 큼에 대한 근거로 삼습니다.
내가 많이 가지고 내가 더 가진 것이 사라짐에 대한 두려움은
내 것이 <없어짐>이 아니라 내가 <낮아짐>에 대한 <두려움>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언제 두렵습니까?
없어서입니까?
아닙니다.
낮아짐에 대한,
세상에서 초라함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가진 것이 높아짐이나 커지에 대한 개념이 없는 어린 아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진 것>이 곧 <높아짐>이라는 개념을 아는 사람이 곧 <두려움>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가짐이 곧 높아짐이고
가짐이 곧 영생을 얻고 천국에서 높아짐이라 여겼기에
가진 그것,
자신의 존재를 지탱시켜주던 <재물>에 대한 <나눔>은 곧 죽음이라 여기며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는 곧 높아짐이 이유이고
그 높아짐을 유지시켜주며 천국도 영생도 가능하다 믿는 근거가 바로 재물이었기에
주님은 급기야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19:23-24)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왜요?
부자는 부자라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을 <선한 일>로 여겨서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이 세상에서 높음에 대한 개념을
자신의 가짐으로 여기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말씀입니다.
부자는 없어짐은 곧 두려움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지탱시켜주는 가치는 곧 가짐입니다.
그런 부자에게 나눔은 곧 낮아짐이고 낮아짐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은 낮아진 자들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자신의 일만 달란트 빚의 깊이를 아는 사람입니다.
누구도 나보다 낫고
나의 용서의 깊이가 깊어서 내 가진 모든 것을 팔아도 영생, 천국보다 하찮은 것을 알기에
아는 것과 가진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감격이 있는 사람이 천국의 사람입니다.
부자는 선한 일로 영생을 얻으려하고
천국에 들어가려 하는 사람입니다.
가진 것이 곧 선한 일을 행함으로 연결할 힘을 가진 사람이라 여기기에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과 행위로 천국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는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지구 속에 들어오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입니다.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를 하자 제자들이 엄청 놀랍니다.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19:25)
왜요?
제자들도 마찬가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다행이 부자가 아니어서 그렇지 부자였다면 그들도 반드시 그렇게 물었을 것입니다.
내가 영생을 위해 어떤 선한 일을 하오리까?
영생은 내가 뭔가를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선물입니다.
그냥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시느니라.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19:26
영생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자꾸 착각합니다.
거꾸로 생각합니다.
구원을 위해
천국을 위해
영생을 위해 우리가 뭔가 선한 일을 해야한다.
그래야 천국에 간다.
다 가짜입니다.
사람은 못하는 것이 천국이고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부자의 오류는 그것입니다.
뭔가 선한 일을 해서 영생을 얻는다 생각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유대의 관원인데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부자입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와 당신이 하는 일을 보니 하나님이 보내신 선생인줄 안다고 말했습니다.
밤에 찾아온 그는 주님을 선생이라 불렀습니다. 주님이 아니라 선생입니다.
랍비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를 향하여 영적인 세계를 말씀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보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너무 잘아는 요3:16 말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라는 말씀을 나눕니다.
유대의 관원으로 부자로 세상에 영향력을 주는 이 사람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부자 청년처럼 심히 근심하고 돌아가 다시는 그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예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침향과 몰약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세마포로 싼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부자라고 못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자도 쓰시고 관원도 쓰시고
공부를 많이한 사람도 쓰십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구원의 감격을 아는 사람이 감사의 삶으로
내가 가장 많이 가지고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나누는 삶>,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영성이 있는 척도이고
영생을 소유한 사람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나눕니까?
얼마나 다른 이의 필요를 채웁니까?
용서의 깊이를 아는 만큼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아는 정도 만큼입니다.
뽕나무에 올랐던 삭개오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찾아주신 것만도 너무 감사했습니다.
버림 받은 인생,
돈은 많고
가진 것을 많지만 늘 그의 인생에 그늘이 되었던 버림 받은 인생,
죄인의 울타리에 갇혀서 살았는데
그것에 대한 용서와 그분이 찾아오심으로 그늘진 인생에 생명을 찾은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진 것을 내 놓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해 자기 것을 나눕니다.
예수님을 초청하는 영생의 조건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심을 감사하는 <감격의 나눔>입니다.
용서를 아는 사람,
구원의 감격을 아는 사람은
그 깊이 만큼 인생을 나눕니다.
십분의 일만큼 감사하면 십일조만 겨우 내는 인생이 됩니다.
감사할 일상의 작은 일들이 생기면 겨우 감사헌금 내는 정도만 나눕니다.
내 자식이 잘 되면 그 잘되는 것만큼만 내 놓습니다.
내 직장에 내 인생에 잘 되는 일 만큼 감사하는 인생입니다.
그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감사할 일은
내 영혼이 용서 받은 감격,
내 영혼이 흙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소유한 영원의 존재가 된 것에 대한 영원한 감사가 회복되어야합니다.
알지 못하니 감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니 겨우 작은 것 드리고 생색을 냅니다.
더 드리고 싶고 더 나누고 싶은 마음,
영원을 회복한,
천국을 회복한
영생을 회복한 자가 드리는 <하늘의 노래>입니다.
우리에게 세상의 노래만 많습니다.
그 세상의 노래는 조건의 노래입니다.
사람의 노래입니다.
내가 얻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선한 일을 따라 부르는 노래…
낙타입니다.
우리는 늘 낙타가 부르는 노래에 취해 살아갑니다.
건조한 사막,
내 등에 쌓은 물 혹에 만족을 느끼고 쌓으면 쌓을수록
무거워지는 인생의 무게에도 그저 그것이 다 인줄 알고
부르는 사막에서의 <낙타의 노래>가
용서의 감격을 모르는 세상의 노래입니다.
물혹에 쌓은 나의 선으로 사막의 망망한 태양 아래서
<낙타의 노래>를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등에 쌓은 물혹속의 물이 줄어들지 않을까 밤낮 노심초사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 높아지고 커켜 보이기 위해
잔득 물을 머금고 부르는 낙타의 노래는 아닙니까?
가나안이 아닌데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
끝이 없는 막막한 사막을 걸으며
내 등에 쌓은 물혹에 만족하며 나는 세상보다 크다고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고 내 입에 흩날리는 사막의 모래흙을 뱉으며
<낙타의 노래>를 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 혹을 잘라야합니다.
나눠야합니다.
다 나누고 나눠야 낙타의 주인은 새로운 오아시스로 인도합니다.
가득채워도
먹고 먹어도 마르지 않는 내 인생의 오아시스로 그분은 인도하십니다.
그 감격으로 주는 것이 기쁨인 삶,
나눌 때 주인이 채우는 오아시스의 쉼과 바람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막에서 부는 모래 바람속에서
물혹의 물 부여잡고
겨우겨우 인생을 살지는 않습니까?
끝이 없는 사막의 노래가
천국의 감격을 모르는 낙타의 노래입니다.
물혹,
겨우 내가 쌓은 것에 만족하는…
풍성한 오아시스의 우물 생수를 알지 못하는
가여운 인생이 부르는 노래
그 <낙타의 노래>가 여러분의 노래가 아닙니까?
* 2009년 한인교회 바자회에 참석했다 낙타를 타는 경험을 했습니다.
말보다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사막에서는 낙타보다 더 좋은 이동수단이 없겠지요.
오늘 말씀을 생각하다 떠 오른 사진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낙타의 인생, 낙타가 부르는 노래가 아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