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방법
여호수아9:1-27
대학을 졸업할 즈음, 대기업의 입사시험을 친 적이 있다.
이런저런 시험을 다 보고 면접을 보는 시간이다.
면접관 중에 아주 높아 보이는 사람이 서류를 보더니 '기독교군요' 하더니
그렇게 묻는다.
'주일날 회사와 교회 일이 겹치면 어떻게 하겠느냐?'라는 질문을 했다.
'저는 주일날 교회를 가겠습니다'
'정말 중요한 일인데 나와야 하지 않겠나?'
'하나님도 회사가 잘 되야 잘 믿지 않겠나?'
한 조가 6명인데 나와 다른 한 사람에게 그렇게 묻더니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내가 보기에 이 분은 교회를 다니는 중역 같다.
결국 그 회사에서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다.
말로는 '일단 회사를 가겠다.'라고 대답을 할 수 있었지만,
나의 신앙 양심은 허락치 않았다.
가느냐 안가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주일은 하나님의 것이다.
예배는 생명이다.
비록 살다 보면 그것이 안 지켜지는 일이 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원칙이 무너지면 삶도 무너진다.
나는 대기업이라는 세상적 시각으로 보기 좋은 것보다
작아도 하나님 앞에 양심을 어기지 않는 중소기업 연구소에 취직을 했다.
믿는 자들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살기란
정말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 가는 것 만큼이나 어렵다.
그들은 우리에게 정말 빠져 나오기 어려운 논리로 접근한다.
오늘 사건은 바로 이 문제로 시작된다.
여리고를 치고, 아이성까지 치자
삼일 거리에 있는 기브온 족속이 위장을 하고
화친을 맺자고 찾아온 것이다.
옷도 위장하고
음식도 위장하고
말도 거짓으로 속여서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게 된다.
결국 그들은 그 속임수에 넘어가서 맺어서는 안되는 맹세를 하기에 이른다.
오늘은 세상이 우리에게 접근 하는 방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첫째, 꾀를 내어 접근한다.
여기서 말하는 꾀라는 말은 '교활하고' '간교하다'는 말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접근할 때, 정말 교활하고 간교한 모습으로 온다.
교활하고 간교한 모습의 일차적인 형태는
겉모습을 바꾸어서 온다.
자신의 정체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한다.
속 마음은 숨기고 겉모양을 바꾸어서 나타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잘 속는다.
일단 눈에 보이는 것은 믿으면 망한다.
사람이 가장 잘 속는 것은 겉모양이다.
눈에 속는다.
하와도 뭐에 속았는가?
창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영적 성장, 신앙의 성숙 1편에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가장 약한 것,
잘 속는 것, 그래서 첫 신앙의 성장은 관점이라 했다.
눈으로 보는 것이라 했다.
세상은 눈에 보는 것으로 일단 속이고 들어온다.
눈에 보이는 외모,
좋은 명품, 좋은 집, 좋은 차, 좋아 보이는 옷
그래서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사족을 못쓰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롯의 문제도 결국 무슨 문제인가?
눈에 보기 좋은 땅을 차지하려는 싸움이었다.
늘 기억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과의 싸움이 일차적인 싸움이다.
자매들이 결혼할 때, 혹은 형제들이 결혼할 때,
불신 결혼인데 왜 그렇게 고집을 하는가?
신앙이 별로 없는데 왜 그렇게 목을 매는가?
이유는 하나다.
눈에 보기 좋고 자랑하기 좋고 편하게 살 것 같기 때문이다.
내가 그 정도 사람하고 살아야 내 수준이 높아질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럼 눈에 보기 좋은 것이 그렇게 나쁜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본능 속에 눈에 보기 좋을 것을
따르도록 일찍부터 만들어 놓으셨다.
하지만 참 좋은 것을 보지 못하는 눈을 잃고 나서 부터는
진짜 눈으로 보는 것을 분별하지 않으면 망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고 예수님은 경고한다.
특히 예수님은
[마7:15]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라고 하시면서 삯꾼을 조심하라고 하신다.
좋은 목사 나쁜 목사
좋은 목사와 나쁜 목사를 구별하는 것 중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돌봄보다 보여줌이 많은 목자를 조심해야 한다.
목자의 본질은 돌봄이다.
말씀을 통하여, 관계를 통하여 돌봄이 목자의 본질이다.
함께 먹고 마심은 돌봄의 방편이다.
그런데 돌봄보다 보여줌, 보여짐, 드러냄에 관심이 많은 목자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보여짐이 많아지면 욕심이 오게 된다.
돌봄이 많아지면 마음이 오게 된다.
보여짐과 돌봄으로 보이는 것에서 자유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보이는 것에 속으면 시작도 못하고 끝이다.
사람을 볼 때, 가장 많이 속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다.
외모에 속지 말라.
외모로 따지자면
"나의 얼굴은 조폭 가문 중에 명문가문 출신이요
난지 팔일 만에 어머니가 눈물 흘린 얼굴이요
자라면서 인상만 쓰면 경찰에게 검문당한 얼굴이요
사춘기 때는 둘째라면 서러울 달표면 무허가 판자촌이요
결혼 때는 하나님께서 아내의 눈을 가리워야만 결혼이 가능한 얼굴이다.
이런 나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역자로 부르셔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니
내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노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외모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그 중심을 보시고 부르심이라.
내가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지금까지 왔으니
오직 나의 외모를 통하여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
이와 같이 우리가 다 외모로 부른 부르심이 아니요
오직 그분의 뜻을 따라 각 사람의 믿음대로 부르심이니
각 사람의 얼굴과 외모는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피었다 지는 들풀보다 못하니
외모가 되는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 것이요
외모가 되지 않는 자는 원래 없음으로 기뻐할 것이라.
오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사람이 외모와 보이는 것에 끌려 욕심으로 미혹됨이니
보이는 것이 잉태한즉 후회하게 되고
후회한 것이 쌓이니 돌이키지 못하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것들은 빛들의 아버지 하늘로부터 오나니
그분은 중심으로 우리를 부르셨느니라.
그런즉 우리가 외모와 보이는 것과 겉모습에 잘 속나니
그 중에 제일 조심할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니라"
(외모복음 1장 말씀)^^
세상이 우리에게 꾀를 내어 교활하고 간교하게 접근하는 방법이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것만 버리고 내려 놓아도
우리는 80 ~ 90% 이상 죄짓는 것에서 자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겉모습에 속지 말라.
세상은 겉모습으로 그럴듯하게 접근한다.
둘째, 자기에게 이익이 되면 일단 바짝 엎드린다.
9장 9절을 보면 우리는 당신들의 종이다 그렇게 나온다.
세상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를 힘들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일단은 좋게 나온다.
잘 섬기고 잘 대해주고 잘 대접해 준다.
이유는 하나다.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장본인들이 된다.
하나님의 원칙을 함께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일단
자기의 이익을 위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라고 여기면 된다.
아무리 교인이어도, 목사이어도 ,그 누구라도
하나님 말씀의 원칙을 어기고 잘해주는 사람은 결국 시간이 지나서 올무가 된다.
누가 우리의 친구인가?
누가 우리의 편인가?
말씀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막9:40-41)
우리를 직접 반대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 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하늘의 상이 있다 했다.
무슨 말인가?
비록 나와 상관이 없어도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르면 그 사람이
우리의 편이고 우리의 친구란 말이다.
때문에 서로를 알지는 못하지만
복음을 위해 함께 말씀을 붙잡고 가는 모두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기도해야 것이다.
너무 잘해주는 사람!
조심하라.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서 잘해주는 사람은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이다.
셋째로 가장 그럴듯한 것은 하나님의 핑계를 댄다는 것이다.
오늘 기브온 족속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고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안다고 한다.
사실 이들의 말이 맞다면 하나님을 믿으면 된다.
라합처럼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라면 믿으면 되는데
믿지는 않고 하나님을 믿으면 좋다면서, 믿으라면서,
교회는 가라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산다.
아담에게 접근한 마귀가 그렇고
예수님께 접근한 사탄이 그렇다.
늘 하나님의 이름으로 접근한다.
합리적으로 보이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
마지막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바꾸지 않는다.
자기의 것은 바꾸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은 고집하면서 사람들을 바꾸려 하고
자기들의 노선으로 변경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핑계를 대면서 자기들의 생각이 원하는 대로 하나님을 이용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만 우리 역시 그런 오류에 빠지기도 한다.
교회의 부흥을 이유로 사람들을 이용하려 한다.
교회가 커지는 것이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
교회가 정말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느 곳이든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잘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은 성장 이전에 교회가 교회다운,
교회가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을 더 기뻐하시지 않을까?
왜 하나님은 한 사람의 사역자에게 기적과 역사를 바로 주시지
오랜 시간을 거쳐 광야를 거쳐 아픔을 거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하시는 걸까?
하나님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분을 진정을 사랑하는 사람!
하나님을 온 맘을 다해 사랑하는 인격의 관계를 원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열매는 하나님이 맺게 하신다.
우리는 그분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
가지로서 그분과 깊은 신뢰와 믿음과
좋은 나무로서의 관계를 원하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돈을 주고,
교회가 성장하고,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분과 인격적 만족감을 누리는 관계를 만드는 조건이라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세상은 그렇게 핑계를 댄다.
일단 이것만 하면 나중에 믿으면 된다.
일단 급한 것부터 하면 나중에 열심히 하면 된다.
이 남자랑 결혼해서 나중에 믿게 하면 된다.
다 거짓말이다.
기브온 족속은 삼일 만에 거짓말이 들통났다.
몇 일도 가지 못한다.
세상의 유혹은 얼마 가지 못한다.
그 얼마를 견디지 못하면 우리는 넘어가게 된다.
그럼 성경은 세상이 우리에게 접근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가?
세상이 우리에게 접근할 때 우리는 오직 하나를 해야 한다.
여호와께 묻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실패한것은 오직 하나라고 말한다.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수9:14)
기도의 힘
묻지 아니하면 우리는 본질을 보지 못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겉만 보게 된다.
기도는 본질을 보게 한다.
기도는 중심을 알게 한다.
기도는 허물을 벗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기도는 세상 속의 본질을 보게 만드는 유일한 대안이다.
급하게 하는 결정은 다 망하게 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아닌 합리와 이성을 따라가게 만든다.
60만명 중에 유일한 2명 200백만명 중에 오직 2명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믿음의 눈,
본질을 본 사람이다.
그는 평생 단 한번도 실수 하지 않았다.
그는 흠이 없이 살았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순결하게 살아왔다.
'거룩'과 '묻지 않음'은 같은 무게이다
그런데 단 한번
하나님께 실수 했다.
모세와 같은 단 한번의 실수!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
모세가 거룩을 나타 내지 않은 것과 같이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묻지 않는 것을 동일한 무게로 여기고 있다.
하나님의 < 거룩을 나타내지 않은것 >과
하나님께 < 묻지 않은 것 >은 하나님께 같은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여호수아는 기도하지 않자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의 생각에 좋은 대로 결정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로 와도 하나님의 의중,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
[잠14:12]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여호수아는 자기가 잘못하려고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단지 실수한 것은 자기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을 택한 것 밖에 없다.
호진, 우진, 혁진에게 질문했다.
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었을까?
호진이가 대답했다.
'먹기 전에 기도하지 않아서'
그것이 정답이다.
우리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움직일 때 해야 한다.
기도하면 머리는 해야 하는데 가슴은 거부하는 일이 있다.
마음이 편치 않는 일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사명이란?
사명이 뭔가?
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마음이 자꾸 가는 것이 사명이다.
머리는 이것을 해야 하는데
마음이 자꾸 저것에 간다면 이것이 아니라 저것이 나의 사명이다.
머리에게 가슴으로
마찬가지이다.
여호수아는 머리가 왔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지,
그래 멀리서 왔으니 가나안 사람과 상관이 없겠지,
사람을 살려두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사용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시겠지!
하지만,
기도했다면 그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규칙적으로 하신 일이 있다.
홀로 하나님께 여쭈어 보는 일!
머리로는 이런 제자들을 선택하려니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머리로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면 좋겠다 싶다.
하지만,
기도할 때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그를 움직였다.
가슴이 제자들을 맞았고 열었고 품었다.
어찌 부인하고 저주한 제자를 머리로 다시 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은 가슴으로 받았다.
가슴을 안았고 가슴으로 품었다.
그것은 오직 기도, 하나님께 묻을 때만 오는 하늘의 축복이다.
세상은 다 그렇게 하는데 괜찮다고 한다.
전혀 틀린 말도 아님을 나도 안다.
다들 그렇게 결혼하고
다들 그렇게 일하고
다들 그렇게 대충대충 몰래몰래 설렁설렁 다 눈감고 한다는 것이다.
맞다.
다 그렇게 한다.
말도 맞다.
하지만 핵심 한가지가 빠졌다.
하나님의 마음이 빠져있다.
그분이 이것을 받으시는지 아니 받으시는지 그것을 모른다는데 문제가 있다.
여호수아는 결국 하나님의 마음이 빠진 결정을 하게 된다.
합리를 따른 결정을 하게 된다.
하나님도 허락하지 않은 일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한다.
회장은 모르는 일에 회장의 도장을 찍어버린다.
마음이 오지 않고 일하면 행복하지 않다.
일은 점점 심각해져 간다.
묻고 하지 않은 결정은 결국 그들에게 아픔이 되어 돌아온다.
평생 아픔이 된다.
아니 내 아들, 내 손자 영영히 가시가 되어 돌아온다.
한번 놓친 기도는
평생에 가시나무가 되어 나와 내 자손에게 돌아옴을 기억해야 한다.
당장 그들을 종으로 썼다.
그들이 물긷는 자와 나무 패는 자로 사용한다.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어졌다.
편해졌다.
그런데 행복한가?
정말 행복한가?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합리를 좇으면 당장 편안하다.
그런데 정말 행복한가?
그것이 문제이다.
편안은 하다.
하지만 평안하지는 않다.
몸은 편하지만 행복하지는 않다 그것이 진짜 문제다.
많은 사람은 세상에서 좀 잘 살아보려고 죽어라 일한다.
믿음이 아닌 합리를 택한다.
급하고 중요하니 하나님께 묻지 않고 움직인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좀 편해졌다.
그런데 편하기는 한데 마음에 행복이 없다.
마음에 평안이 없다.
두고두고 나에게 가시가 되는 존재로 늘 나에게 남는 것이 있다.
돌아보면 내 마음에 불편한 일, 사람, 존재가 남아있다.
아픔의 씨앗이 되어 나의 행복의 문을 늘 닫아 버린다.
얼마나 화평하느냐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다고 만족하지 말라.
얼마나 화평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께 묻고 따랐느냐가
그분의 뜻을 이루었느냐 이다.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하셨다.
그분은 절대 혼자 하신 일이 없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의 사역을 완성했다, 구속사역을 완성했다 이전에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분의 모든 관심은 오직 아버지의 뜻이었지
그분이 원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셨다.
하나님께 묻지 않으면 세상적으로 편하게 살수는 있다.
그렇지만 마음에 평안은 없다.
기억해야 한다.
참 평안은 내 생각, 합리, 머리가 아닌
그분의 뜻을 오직 따를 때이다.
예수님의 평안은 그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평안은 바로 그 평안이다.
하늘로부터 오는 진정한 평안은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따를 때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평안 그것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셨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싸움은
범사에 그분을 인정하느냐 하지 못하느냐의 싸움이다.
[잠3: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그분은 우리를 평안의 길로 인도하신다.
혹 실수해도 다시 그를 인정하면 그분은 우리의 갈 길을 다시 인도하신다.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모르니까 네비게이션을 통해서 보여주신다.
길 안내를 받다가 길을 벗어나면 다시 되돌리고 싶으면 버턴만 누르면
정확하게 길을 다시 안내한다.
마찬가지다.
우리다 실수해도 마음으로 주께 나아가면 그분은
우리를 원위치로 그 길을 인도하시고 지도하신다.
내가 편안하게 살든 좀 불편하게 살든 영적으로 행복함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기 때문이다.
참 행복이 언제 오는가?
범사에,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다.
언제든지 그분을 인정하면 원위치로 돌려놓는 네비게이션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지도하시고 행복의 길로 인도하신다.
사사기의 역사가 무슨 역사인가?
은혜로 시작한 이스라엘이 보기 좋은 대로 묻지 않고 행하다
타락하고 그러다 옆구리 가시 백성들이 아프게 하고 고통 당하다 기도해서
다시 구원받고 하는 반복의 역사이다.
구원 - 그를 인정하지 않음- 타락 - 간구 - 구원
이것의 반복이 사사기이다.
편함이냐 행복함이냐?
편하게 살 것인가 행복하게 살 것인가 그 결정은
하나님을 인정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로 결정된다.
편함이냐 행복함이냐 그 결정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인정이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느냐의 갈림이다.
당장 그리고 나중
왜 하나님은 아이성 때는 패배를 주고
기브온 족속의 문제는 당장 패배를 주지 않게 하셨는가?
당장과 나중의 문제가 궁금하다.
왜 어떤 문제는 당장 응답이 오고
어떤 문제는 오래 걸리는가?
아니 어떤 잘못은 당장 고통이 오고
어떤 문제는 그 고통이 나중에 오는가?
당장 나타나는 결과가 있고
오래 걸리고 나중에 나타나는 결과가 있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간단하다.
승리는 하나님이 하게 하신다.
그러나 행복할 것이냐 불행할 것이냐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전쟁의 문제,
당장 승리의 문제는 금방 결과를 주신다.
그러나 내가 행복한 삶으로 오래 살 것인가?
행복 없이 편하게 살 것인가는 내가 결정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선택한 민족은 당장 경제적 축복을 주시고
편안한 삶을 누리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
그분을 범사에 인정하는 삶을 살면 편안함과 함께 행복함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그를 인정하지 않으면 편안은 하지만 행복함 없는 신앙생활
평안함 없는 예수 믿는 삶이 될 것이다.
그래서 왜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같은 열 두 제자를 택하셨는지 이해가 간다.
그들은 좀 바보스러운 사람들이었다.
너무 따지고 계산하고 하는 빠꼼이들!
머리로 모두다 계산하고 약고 세상적으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여기는
바리세인이나 서기관을 택하지 않고
머리 좀 안 돌고 시키는 대로 하는 제자들이 좋으셨던 것이다.
얼굴 좀 반듯하고
외모 좀 되는 사람보다
얼굴이나 외모에 상관없이
그분의 뜻을 묻고 그 뜻에 목숨 걸고 따르는 사람들을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 알아간다.
너무 세상사람처럼 살지 말자.
좀 바보처럼
제자들처럼
하나 알면 그것이 다 인줄 알고
한번 목숨을 걸어보는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세상은 우리에게 기가 막힌 방법으로 접근해서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것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바보처럼
우직하게 그분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구하여
마음으로 그분을 인정하는 사람!
그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