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척도(마19:1-15)
의도를 가진 대화는 마귀의 시험입니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는 모든 것은 시험임니다.
에덴동산의 시험,
광야의 시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의 예수님을 향한 시험은 늘 의도를 가지고 접근합니다.
시험의 형태는 표적을 구한다 했습니다.
광야 시험의 모양은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리새인들이 다시 시험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시험의 단어는 늘 마귀가 시험한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시험의 내용은 <의도>를 가진 대화입니다.
그 의도의 본질은 내가 더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내가 너보다 높고 크다는 것과 너는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의도입니다.
용서에 기초를 둔 인생이 아니면 늘 다른 사람과의 모든 대화에 의도를 가지고 접근합니다.
흠을 잡기 위해 대화하고
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대화하고
내가 높아지기 위해 증명합니다.
그것이 사단의 시험임니다.
사단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나의 대화가 사단의 일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목적을 얻어내기 위해 늘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는 것입니다.
<누가 높으냐>의 다른 얼굴은
<의도를 가진 질문>입니다.
살리기 위한 사람은 의도를 가지고 질문하지 않습니다.
살리기 위한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오늘 주님은 병자를 고치십니다.
수 없이 찾아온 무리들을 고치십니다.
말없이 말입니다.
그것이 용서에 기초를 주님의 마음입니다.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19:2)
살리기 위한 대화입니까 죽이기 위한 대화입니까?
살리기 위해서는 의도를 가진 질문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무엇이 필요한지를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얼마나 많이 마귀와 같은 짓을 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원하는 의도를 이루기 위해 의도된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이 내가 원하는 것이 나오면 그 사람은 그 날로 나의 밥입니다.
그 사람을 밟고 그 사람보다 내가 더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기초가 되지 않는 인생의 모든 대화법입니다.
자녀와의 대화와 부부간의 대화와 가까운 사람과의 모든 대화에
우리는 늘 나의 숨은 의도를 가지고 접근합니다.
그래서 그 대화를 성공하면 할 수록 우리는 늘 사람을 잃게됩니다.
의도된 대화가 성공하면 할수록 사람을 잃는 것입니다.
용서에 기초를 두지 않는 인생은
첫째, 내가 필요한 것만을 요구하는 인생입니다.
내 의도를 채우기 위해 인간은 세상의 사람도 이용하지만 모세도 이용합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채우기 위해 사람이 세운 기준을 내 세웁니다.
아무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마땅한지 바리새인들은 질문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의도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의 의도는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면 된다는 법을 이용합니다.
주님의 답은 우리의 기준은 늘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이 정한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모세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
의도를 가진 사람의 기준은 늘 사람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했고 누구는 이렇게 말했고...
다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없는 인생입니다.
용서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기에
늘 사람이 기준되어 의도를 가지고 접근합니다.
옆집 남편은 이렇고,
옆집 아내는 이렇고,
다른 목사님은 이런데 우리 목사는 이렇고
이 사역자는 이렇고 저 사역자는 이렇고…
어느새 살며시 찾아온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 기준,
사람의 기준을 가진 의도된 질문은 마귀의 시험입니다.
간음한 연고 외에 아내를 버리고 장가드는 것은 간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의도된 시험으로 아내도 버립니다.
목사도 내 쫓습니다.
남편도 버리고 자식도 부모도 버립니다.
다 내가 의도된,
내가 더 잘나가고 내가 더 높아지고 내가 더 커지기 위함입니다.
내가 높아지는데 전부를 건 인생은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신 아내도 얼마든지 버립니다.
누가 높으냐의 반대는 용서라 했습니다.
용서가 없는 인생,
용서 받음에 대한 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용서 받음에 대한 감격이 없는 사람은
늘 <의도된 질문>으로 살아갑니다.
둘째, 말과 행동이 유치하게 다릅니다.
예수님께 질문한 바리새인은 늘 그렇게 예수님께 마귀의 시험으로 찾아옵니다.
그런데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간음한 연고 외에 장가가면 간음이라고 말하니 제자들이 말을 거듭니다.
그렇게 살 바에는 차라지 장가를 안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10)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용서 받음의 깊은 바다에 들어갔나 나오지 않은 제자들은 아직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직 눈에 보이는 대로 인생이 움직입니다.
아내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차라리
장가를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 그들이 다름 사건에서 완전히 본색을 드러냅니다.
어떤 사람이 아이에게 안수해 달라고 예수님께옵니다.
누가 말립니까?
제자들이 말립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13)
어제 분명히 소자, 작은 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 크냐에 대해 그렇게 깊고 절박하며 놀라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방금 아내를 위한다고 장가 드는 것도 하지 않는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 기도해 달라는데 <꾸짖는> 그들입니다.
왜 이들이 이럴까요?
제자들은 아직 <용서의 감격>을 모릅니다.
아직 높고 낮음에 매여 예수님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용하는 것입니다.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용서 받아야만 살수 있는 <인생의 절벽>으로 떨어뜨려버립니다.
누군가 손을 잡아주고 누군가 용서해 주고
누군가 그 인생을 긍휼히 여겨야만 하는 인생의 절벽으로 곤두박질 쳐 버립니다.
아니 정확하게 그들이 선택한 길로 가게합니다.
바로 용서 받아야만,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처절하게 아는 절망의 자리에 두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부인합니다.
저주하여 부인하며 모른체하고 다시 주님을 얼굴 들고 볼 수 없는 자리에 서게됩니다.
용서가 아니면 회복할 수 없는 자리에 그들이 서게 하십니다.
우리는 다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에 맞장구도 치고
초막 셋을 짓자고 하고
아내를 버리는 사람은 차라지 장가도 가면 안 된다고 열을 냅니다.
그러나 막상 자기들이 낮아지고 불편하고 귀찮은 어린 아이 하나를 받아주지 못하고
꾸짖는 자리에 서게됩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내가 일만 달란트 용서 받았던 처절한 죄의 인식과 용서의 눈물의 감격이 없어서입니다.
인생의 절망의 절벽에 떨어져 보지 않았고
그 절벽에서 용서 받는 감격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그런 사람은 작은 소자는 귀찮은 존재입니다.
늘 내가 크고 내가 높고 나의 앞길을 막는 사람이 어린 아이와 같은 작은 자입니다.
우리의 말과 질문의 기초는
일만 달란트 자의 용서 받은 내 삶의 감격이어야합니다.
나도 저 작은 보다 더 작다는 자기 인식이 없이는 결코
주님의 재 파송의 은혜,
재 사명의 부르심은 없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사람들에게 재 사명의 부르심으로 초대하십니다.
언제요?
진짜 복음이 내 지식.
내 머리에서 처절한 눈물의 바다를 지나 가슴으로 내려와서
작은 자 하나도 나보다 존귀하며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지식과 자리에 연연합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말에 동의하고 그 말에 따라 행동하고
주님 이라면 무엇이라도,
같이 죽는 일에도 함께 가자고 말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말합니다.
아마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의 감격과 절망의 바다를 지나며
용서와 구원의 감격을 지닌 강물을 지날 때,
가슴으로 아는 처절한 절벽의 나락을 떨어져본 사람의 삶에
<재 파송의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복음의 은혜,
용서의 바다를 죽을 만큼 헤엄쳐온 사람만 그 은혜를 알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작은 소자 한 사람도 나보다 더 크게 여기는 참 복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의 은혜는 커녕
더 의롭고 더 할말 많은 자격에 전부를 겁니다.
내가 이만큼 주를 위해 일했고
내가 이만큼 봉사했고
내가 세상적으로 이만큼 크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인생을 소모합니다.
아닙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칩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
죄의 용서를 아는 사람에게 작은 자가 보이고
인생의 절벽에 떨어져 구원의 감격이 얼마나 감사한지 아는 사람에게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우리는 주를 위하여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혜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고난의 영광스러움을 감사함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격을 아는 사람은
그 때부터 내가 필요한 것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고
의도된 질문을 사는 인생이 아니라
주님의 필요를 위해 내 인생을 이용하도록 드릴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을 밟고 내가 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내가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영성은 <귀찮은 일>에 대한 <성실의 정도>입니다.
참 은혜를 알기 전에는 내가 높아 지고 내가 커지는데 걸림이 되는 일은
다 귀찮은 일입니다.
그런데 참 은혜를 알고 나면 그 귀찮은 일(어린 아이를 영접)은
은혜와 용서의 감격을 아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주님은 오늘 그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자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19:14)
영성의 척도는
작고 귀찮은 것에 대한 섬김과 성실의 정도입니다.
* 천준혁선교사님입니다.
제가 선교사로 왔을 때 저의 모든 것을 도와주시고 함께 동역하신 선교사님입니다.
함께 지낸 세월이 한국에서까지 합치면 15년이 넘습니다.
선교지에 왔을 때 선교사님은 이미 사역에 경험과 연륜이 있었습니다.
함께 지내며 동역하면서 단한번도 저의 부탁과 저희 가정의 도움에 귀찮게 여겼다고
여기는 일이 없습니다.
없을 뿐 아니라 직접 몸으로 섬기는 아름다움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말은 누구나 잘합니다.
의도된 질문도 할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를 수 있고 내가 크고 높다는 것을
나의 경험과 사역의 연륜으로 얼마든지 새로온 후임 선교사를 귀찮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번도 그런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러스턴버그의 백인교회 선교목사로 무임으로 봉사하십니다.
함께 흑인교회 개척과 사역자를 세우는 신학교에서 강의도 하십니다.
어디서든 그분의 깊은 영성을 만나는 사람들은 알기에
백인교회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많은 도전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말이 많은 목사,
말만 많은 목사,
나의 영적 깊음을 나의 높음으로 내세우려는 세계에서
깊은 영성의 삶을 저 같이 작은 자에게 귀찮음이 아니라
기쁨으로 섬겨주신 아름다운 영성을 저는 언제나 기억합니다.
그리고 저의 삶의 큰 지침이 되기도합니다.
작은 자를 섬기는 큰 자의 큰 영성을…
저고 그러해야하는데…
고민만 더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