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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크냐>에 대한 주님의 변증 2

<누가 크냐>에 대한 주님의 변증 2

 

 

 

 

 

 

 

 

 

 

 

 

 

 

 

 

<누가 크냐> 대한 주님의 변증 2(18:1-35)

 

 

오름이 목표이면 죄를 지은 사람은 쳐야 한다.

그러나 살리는 것이 목표이면 일흔 번에 곱번 이라도 해야 한다.

 

우리의 오름에 걸림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다.

사람이 나의 오름에 걸림이어서 비교의 대상이 된다.

같은 직종 같은 위치의 사람이 경쟁 상대가 된다.

사람도 용납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은 나아가 나에게 죄를 지은 형제도 용서해야 한다고 하신다.

 

땅에서 풀면 풀리고 매면 매인다는 것이 무엇인가?

형제에 대한 용서이다.

살리는 것이 목적이면 개인적으로 은밀히 가서 그에게 권고하고

그래도 안되면 사람이 가고

그래도 안되면 교회가 하라고 한다.

이유는 한번이라도 살리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우리는 죽이는 기회,

죄를 확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찾아가고 말한다.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한다면 주님은 사람이 있는 곳에 나도 있겠다고 하셨다.

 

사람이 있는 중에 나도 있다는 말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만남과 기도와 대화 중에 나도 있겠다는 것이다.

오르기 위한 ,

지은 자를 죽이기 위한 곳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곳에 나도 있겠다는 말씀이 사람이 이름으로 모인 중에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말씀,

사람이 이름으로 모인 중에 나도 있겠다는 말씀을

우리의 오름, 우리의 커짐,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으로 사용한다.

 

아니다.

사람을 살리는 ,

용서가 있고 회복이 있고

오름이 아니라 내려가기 위한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겠다는 말씀이다.

누가 높냐의 질문에 주님의 본질은 오름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사람이 이름으로 모인 중에 나도 함께 하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궁금하다.

그럼 얼마나 죄를 용서해야 하는지 질문을 한다.

주님 얼마나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의 목적은 오름이 아니기 때문에 살리기 위해 일흔 번에 곱번이라도 하라고 하신다.

 

일흔 번의 곱번은 죄에 대한 용납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주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다.

용서를 감정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

용서는 주님의 의지다.

용서는 주님의 방향이다.

인생의 기초이고 믿음의 시작이다.

 

 

사람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용서>이다.

용서가 나를 살렸다.

그래서 용서의 기초가 우리의 살리는 기초이고

용서의 기초가 작은 자를 섬기는 기초이고

용서의 기초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다.

 

인생의 결산을 무엇으로 하는지 아는가?

결산은 얼마나 용서했냐에 대한 결산이다.

 

일만 달란트 빚진자 비유의 핵심은 용서이다.

 

마지막에 임금이 와서 결산을 한다.

그런데 우리의 결산의 기초는 용서 받음에 대한 용서의 삶이다.

내가 용서를 받았기에 내가 얼마나 용서를 했느냐이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같이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다.

우리의 존재 기초는 바로 용서이다.

주님의 용서,

주님의 용납

주님의 섬김이다.

주기도문은 용서에 관한 기도이다.

 

용서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

모든 오름은 가짜다.

거짓 선지자이고 거짓 목사이고 거짓 선교사이고 거짓 성도다.

우리의 기초는 용서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은

용서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용서다.

용서의 개념으로 주기도문을 보지 않으면 이방인들의 기도와 같다.

다른 종교와 같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용서고 하늘에서 이룬 뜻은 용서다.

용서의 집약체가 예수님이고 그분의 용서의 완성은 십자가이다.

 

우리 신앙의 기초,

우리 신앙의 핵심은 나를 용서하신 그분의 용서로 시작한다.

용서받음을 알지 못하는 곳에는 용서의 삶은 없다.

용서의 삶에 대한 인식은 기독교를 이해하게 하고

주님의 마음과 십자가를 이해하게 한다.

 

누가 높으냐는 제자들의 질문에 이리도 없는 논증으로

이렇게 높고 깊은 영적인 원리들을 설명하는지 용서의 개념을 알아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용서 받음을 알지 못한 ,

나의 일만 달란트 ,

영벌에 처해질 영원의 죄가 안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누가 높으냐가 전부인 인생이 된다.

 

평생을 용서하지 못하는 영원의 감옥의 안에서 죄인으로 사는 것이다.

이들에게 천국은 누가 높냐 누가 크냐가 아니라

천국을 가느냐 못가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천국에서 누가 높으냐라는 질문은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 말이다.

영원의 존재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고 제한된 육체 안에 거하지 않으며

누구와 비교되는 존재가 아니다.

 

삼위 하나님 중에 누가 높은가라는 말은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영원이 되었다고 믿으면서

우리는 누가 높으냐고 질문한다.

?

 

내가 영원임을 알지 못해서이다.

내가 영원을 경험해 보지 못해서이다.

눈이 영원임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해서이다.

 

일만 달란트의

영원의 죄를 용서 받은 사람은

성령이 임한 사람이다.

성령이 안에 임함을 아는 사람,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와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만

누가 높으냐에 자유한다.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하는가?

성령이다.

성령이 안에 거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꾸

누가 높으냐에 매인다.

누가 크냐에 매인다 .

영원을 알지 못하고

흙인 사람이 성령으로,

생기로 영원이 회복됨을 알아야 영원의 기준으로

세상의 높고 것에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아직 오순절 성령을 받지 못했다.

영원의 눈이 없으니 죽을 때까지 누가 높으냐를 따진다.

절망한다.

좌절한다.

평생을 절망과 좌절속에 누가 높고 누가 크냐에 매여서 사는

죄의 삶을 살게 된다.

 

죄는 영원의 시작을 잃어버린 우리의 지각이다.

죄는 영원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든 눈이다.

죄는 성령이 사라진 인생을 통틀어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이다.

영벌의 얼굴인 죄의 해결,

비교의 해결,

누가 높으냐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바로 <성령>이다.

성령이 안에서 영원의 눈이 뜨이게하고

영원의 가치를 보게하고

영원이기에 높으냐 크냐에 자유한 몸이 우리는

자유를 알게되며

평안을 알게 된다.

 

 

주님이 십자가와 부활로 그분의 사역이 끝이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시고 성령이 오셔야 하는 이유다.

안에 주님을 아는 것으로 우리의 인생은 채워지지 않는다.

영원히 마르지 않는 영원의 생수이신 성령께서 날마다 나와 호흡할

우리는 비교에 자유하고

것에서 자유하며

높은 것에 자유 하게 된다.

 

성령이 영이시다.

성령이 영원이시다.

영원과 호흡하는 흙은 영원이며

높으냐 크냐에 자유 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기초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영원으로 회복하는 성령의 임재하심이다.

 

성령이 오셔야하는가?

예수님이 끝이 아니고 성령이 임해야하는가?

세상의 모든 것에서 자유하는 자유의 영이신 성령,

영원의 눈을 뜨게 하며

천국의 삶을 알게 하는 영원의 호흡,

성령이시다.

 

용서의 시작은 하늘의 뜻이고

용서의 마지막은 성령의 임재이다.

성령의 삶이 바로 모든 높고 큰것에 대한 자유한 삶이다.

 

 

성령은 아는 것이 아니라

호흡이다.

호흡은 용서의 삶이다.

용서를 아는 자만 성령을 알고

성령을 아는 자만 용서의 삶을 산다.

 

<누가 높으냐> 같은 말은 <>이고

<누가 높으냐> 반대 말은 <용서>입니다.

 

 

영원인 성령의 호흡이 없는 자의 평생의 추구함은 상향성,

누가 높으냐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 흙입니다.

성령이 떠난 흙인 존재 사람!

사람인 흙에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인 용서의 길을 지나

성령께서 생기로 우리 안에 찾아오셨습니다.

 

성령의 생기는 오직 용서로만 이루어집니다.

성령이 찾아오는 마음은 바로 죄에 대한 인식입니다.

일만 달란트에 해당하는 영원의 죄에 대한 자각입니다.

죄를 토하고

죄를 자복하고

죄에 대한 인식이 찾아와야만

성령에 대한 감각이 생깁니다.

 

그리고 성령의 생기로 죄가 물러가고 <영원의 호흡법> 알게 됩니다.

영원의 호흡법은 바로 <용서의 호흡>입니다.

 

용서에 대한 인식,

나에 대한 용서의 인식과 다른 지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인식을

우리는 작은 자를 섬기는 사람이 되며

높으냐 크냐를 따지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누가 높으냐에 대한 질문에 엄청난 저주를 퍼붓는 같습니다.

눈도 뽑고

손도 자르고

발도 자르라고 하십니다.

더더욱 연자 맷돌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하십니다.

화가 임한다고 하십니다.

천국도 못들어 간다고 하십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그런 나쁜 명분이라도 있으니 그렇다 치지만

도대체 누가 높냐는 말이 어떻길래 이렇게 엄청난 저주와 욕을 퍼부을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용서를 알지 못하는 인생,

영원의 호흡법인 성령의 생기를 통한

<용서의 호흡법> 알지 못하는 사람은

천국을 알지 못하며

예수님을 알지 못하며

성령도 영원도 알지 못하는 거짓이며 악입니다.

 

 

신앙생활을 다시 해야합니다.

천국을 다시 배워야합니다.

성령을 다시 알아야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알아야합니다.

 

누가 높으냐의 가치로 찾아온 예수님과 말씀은

평생을 들어도 내가 원하는 것만 들리고 보이지

결코 주님이 말씀하시며 보여주시며 깨닫게 하시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주기도문도 우리가 아는 주기도문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은 <용서>입니다.

 

오늘 다시 우리에게 주님은 용서에 대해서 거듭 말씀합니다.

용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누가 높으냐를 묻습니다.

누가 크냐를 묻습니다.

사람은 용서도 알지 못하고 십자가도 알지 못하고

성령도 영원의 호흡도 알지 못합니다.

 

누가 높으냐에 대한 주님의 결론은 이렇게 맺습니다.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4-35)

 

 

사랑의 음성이 아니라

경고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으십니다.

 

용서를 모르는 인생!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주님의 경고의 <음성>입니다.

 

 

 

 * 만델라 대통령의 동상입니다.

지금 병원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남아공은 <용서> 위에 세워진 나라입니다.

백인들이 자기들의 인생과 나라를 위해 오직 <오름> 전부를 걸며

생긴 것과 가진 것과 모든 것이 초라한 그들을 이용하여

백인들은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진리와 정의는 언젠가 세워집니다.

만델라 전대통령이 27 동안 무력으로 감옥에서 싸우며

나라를 다시 자신들의 나라로 차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모든 백인들의 만행과 폭력과 억압을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누구든지 고백하면 용서하고 덮어주기로 했습니다.

일명 '화해 위원회' 만들어 용서의 길을 걸었습니다.

백인과 흑인이 하나되고

민족과 민족이 하나되는 아름다움을 오직 용서를 통해서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어가는 병상의 자리에서도 세상이 주목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라를 살리고

사람을 살리고

아름다운 무지개의 나라가 되는 것은 누가 높으냐도

누가 크냐도

누가 힘이 있느냐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하는 사람,

용서의 길을 걷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그것이 나에게 감격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희망을 주는 이유입니다.

 

용서를 받고 영원의 자리에 섰으나

용서의 길이 아니라

누가 높으냐로 자기를 증명하려는 사람이 많을수록

우리는 아픔을 많이 겪을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눈물을 흘려야 것입니다.

 

세상을 말합니다.

누가 높으냐로 자기를 증명하라고…

그러나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은 오직 <용서> 길입니다.

자기를 용서하십시오.

나를 아프게한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용서에 자유가 있고

용서에 기쁨이 있고

용서에 하나님의 마음이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놓으신 땅의 해답은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오직 <용서>였습니다.

 

우리는 용서 말고 전부를 다하려합니다.

용서를 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용서만이 답이라고….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 인생의 답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