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크냐>에 대한 주님의 변증 1(마18:1-35)
잃은 양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아십니까?
연자 맷돌 매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눈과 손과 발을 찍어 버리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아십니까?
두 세 사람이 모인 중에 나도 그들 중에 있다는 말이 어떻게 나왔는지 아십니까?
일만 달란트 빚진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용서하지 않은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아십니까?
일흔 번에 일 곱번 용서하는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아십니까?
너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겠다는
용서에 관한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아십니까?
오직 한마디 때문입니다.
제자들의 한마디 질문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누가 크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잘 아는 위의 이야기들은 바로
<누가 크냐>라는 질문 때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누가 크냐라는 질문이 뭐가 그렇게 이상하다고 예수님은 이렇게 놀라운 이야기를 하시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뭐가 그렇게 잘못 되었다고 한마디 질문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하십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오르기 <위해서> 살고
예수님은 <살림>을 위해서 입니다.
잃지 않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시작과 우리의 시작이 달라서입니다.
우리는 오직 오름이 목적이고
예수님은 살림이 목적입니다.
이것이 전부를 다르게합니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살리는 것이 목적입니다.
모든 것을 살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도 잃지 않고 모든 것이 사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세상을 건지고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닙니다.
살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내가 오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용하고
하나님도 이용합니다.
예수님도 이용하고 하나님도 이용하는 사람은
작은 소자 하나 잃는 것이 아무 일도 아닙니다.
내가 오르기 위해 한 사람 희생하고
내가 높아지기 위해 예수님이 죽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잘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은 오직 살리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살린 사람이 다시 잃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리기 위해 살지 않고 오르기 위해 사람도 이용하고
일도 이용하고 나의 능력도 이용하고 예수님도 이용합니다.
죽을 만큼 어려울 때는 그 일이 해결되기를 기도합니다.
그 일이 해결되면 어김없이 오르려합니다.
우리가 언제 본질을 잃어버립니까?
살리지 않고 오르려할 때부터입니다.
좀더 오르고
좀더 크고
좀더 높아지려는 마음이 찾아오면 우리는 살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어집니다.
제자들은 살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참 제자의 시작은 오름이 아니라 살림에 인생을 거는 마음이 생길 때부터입니다.
목사들을 욕합니다.
교회를 세상이 욕합니다.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살리지 않고 <오르려>해서입니다.
살리는 제자가 아니라 오르려는 제자가 될 때 수 많은 소자를
실족하게 하고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살리는 교회가 아니라
채우는 교회가 되면 세상이 욕합니다.
세상도 버립니다.
살리는 교회가 아니라 오르는 교회가 되는 순간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버리워져 발에 밟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 한마디,
<누가 크냐>의 질문에 수 없는 이야기를 쏟아 놓습니다.
나의 마음을 좀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잃은 한 마리 양입니다.
실족한 작은 소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작은 소자는 마음에도 없습니다.
오직 나의 오름,
내가 크게 되는 것만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유는
내가 더 오르려는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제자들은 살림이 목적이 아니라 오름이 목적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예수님의 본심을 전합니다.
<오름>이 목적이 아니고 <살림>이 목적이 되는 인생은
첫째, 자신을 세상 모든 사람보다 더 작다 여기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18:4)
이 말은 세상 사람과 비교해서 작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꾸 속는 것은 세상의 사람보다 더 작다 크다의 개념을 가져서 이것이 되지 않습니다.
이 말은 주님의 용서의 개념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누가 크냐라는 질문에 대한 최종적 주님의 이야기는 바로 일만 달란트 빚진자 이야기로 결론을 맺습니다.
빚진자의 개념은 다른 사람과의 채무 관계가 아니라
주님과의 채무 관계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채무의 개념은 빚의 탕감입니다.
그 탕감의 본질은 재물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18장 누가 크냐의 결론을 <용서>로 맺고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우리는 용서받은 자의 하나님과의 채무 관계를 빼고 사람을 대하니
내가 크냐 작으냐의 개념으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누가 크냐 작으냐의 개념의 본질은
용서 받은 자의 감격으로부터 해결되어야 함을 설명하십니다.
한마디로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용서는 무한대의 용서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대한 용서의 크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용서의 크기로 나를 보지 않고
나를 대하는 작은 자들의 작은 행동으로 그 사람과 나를 비교합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개념을 뺀 비교는 높으냐 낮으냐의 개념이 설득력이 있지만
용서의 개념으로 세워진 나를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다른 모든 이와의 관계의 기초는 바로 용서에 두어야함을 설명합니다.
<용서>의 대가는 <영원>입니다.
나에게 영원을 주기 위해 영원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생명의 생수이신 성령을 나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나에게 보증이 되고
나에게 확증으로 있는데 우리는 자꾸 영원이 아니라 세상의 것으로 비교하고
판단하고 높아지려는 어리석음을 취합니다.
왜 우리가 높아지려합니까?
영원을 얻기 위해 영원을 희생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몰라서입니다.
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영원을 대가로 지불하신 주님의 마음을 몰라서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저 사람의 영혼도 주님의 영원의 가치로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을 그저 그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나의 비교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나를 영원으로 삼으신 주님께서
저 사람도 영원으로 삼으신 것을 잊어서입니다.
영원으로 세상의 것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가한데
우리는 자꾸 영원으로 세상의 것을 비교합니다.
영원을 영원으로 비교하니 자꾸 내가 높다 내가 크다를 말합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코미디입니다.
개그입니다.
영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크다 작다를 비교하고 판단하고 우스운 코미디를 하고 있습니다.
왜 크다 작다는 생각할까요?
죄의 심각성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우리도 영원입니다.
그러나 죄도 영원입니다.
죄의 크기는 영원입니다.
영벌에 들어 갈만큼 크고 영원한 것이 죄입니다.
그 죄를 탕감 받았습니다.
그 크기는 세상보다 큰 것입니다.
죄의 크기도 영원이고
그 죄를 탕감 받기 위한 용서도 영원입니다.
영원의 죄에 빠진 흙인 존재가
영원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영원을 주시기 위해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주셨고
그 영원한 생명이 영원한 죄를 심판하고
생명의 영원한 생수인 성령이 우리 안에 영원으로 존재하십니다.
우리는 영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세상의 없어질 것으로 우리를 평가하고
우리가 높아지려합니다.
우리는 이미 영원인데 말입니다.
천사도 흠모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과 친구가 되고 형제가 되고
함께 영원한 죄인 사망을 심판할 영원한 존재인데 말입니다.
오름이 아니고 살림이 목적인 인생은
둘째, 잃지 않는 인생입니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18:14)
하나님의 뜻은 잃은 자를 찾는 것이며
찾은 자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오름이 목적인 인생은 세상 모든 것,
하나님까지도 이용한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은 작은 자 하나 잃고 실족하는 것은 아무런 갈등이 없습니다.
내 말과 행동이 저 사람을 실족하게 하고 아프게 하고 상처 받게 하는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
오직 내가 원한 목표, 내가 오르려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와 하나님의 다른 마음입니다.
우리는 오르려는,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비교 의식에 있기에
나보다 못한 한 사람의 상처와 아픔에 별 갈등을 못 느낍니다.
거룩한 명분을 내 세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작은 자, 소자들의 눈물은 외면하고 희생 시킵니다.
그래서 자기가 높아지고 자기의 이름이 드러나고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커지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성경 어디에도 작은 자를 작은 자로 대하라는 곳이 없습니다.
그 작은 자를 비교하고 그들을 이용하라는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큰 것에 명분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작은 것에 생명을 겁니다.
그것이 우리와 주님의 차이입니다.
주님의 명분은 작은 자를 살리는 것이고
우리의 명분은 주님을 위해 위대한 명분을 위해 작은 자들을 희생 시키는 것입니다.
작은 자를 위해 오셨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아닙니다.
창기와 세리와 죄인들과 아픈 자들이었습니다.
갈릴리는 작은 어부들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작은 자들에게 있는데 우리는 자꾸 나 스스로 높은 곳을 바라봅니다.
내가 높아지는 것이 곧 주님의 영광이라는 거룩한 명분을 내 세웁니다.
주님이 거룩하게 사용한 사람들은
한결 같이 작은 자들과 함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작은 자들을 곧 주님으로 여기며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오름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본성적으로 작은 자들과 다른 인생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작은 자들의 신음과 아픔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내가 커지고 높아짐으로 들려오는 환호와 박수 소리만 들립니다.
그래서 내가 내 세우는 거룩한 명분 때문에
말과 행동은 내가 쉽게 여기는 작은 자들을 죽일 만큼 아프게 말들고
실족하게 만들고 급기야 교회를 떠나게 만듭니다.
주님의 관심은 나의 오름이 아니라
그들을 잃지 않음입니다.
그러나 오름에 독이 오른 영혼은 오름만 보이고
잃어가는 주님의 아픈 눈물과 탄식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비극입니다.
오름이 아니라 살림이 목적인 인생은
셋째, 참 기쁨에 대한 회복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18:13)
성령의 탄식은 알지만 성령의 기쁨은 우리가 잘 누리지 못합니다.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오름에 목숨을 걸어서입니다.
오름에는 오직 성령의 탄식만 있습니다.
우리의 깊은 기도속에는 성령의 탄식만 남고 성령의 기쁨은 없습니다.
언제 이 기쁨이 회복되는가?
언제 영원한 기쁨이 회복되는가?
하나님의 기쁨, 성령의 기쁨이 내 안에서 회복될 때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분의 기쁨을 우리 안에 알게하십니다.
영원의 양식은 그분의 뜻입니다.
그 뜻이 나를 통해 이뤄질 때 기쁨이 회복됩니다.
그 기쁨이 이유는 오직 잃은 자를 살릴 때입니다.
오름이 아니라 살림이 회복 될 때 우리 안에 참 기쁨이 찾아옵니다.
오름은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쁨은 안개와 같습니다.
잠시 약을 먹는 다고 근본 문제가 회복이 안되는 것 처럼
우리가 잠시 오른다고 영원한 기쁨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영원한 기쁨은 오직 잃은 자를 찾는 기쁨,
살리는 기쁨이 회복될 때입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내 안의 성령이 기뻐하지 않아서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성령과 함께 사는 존재입니다.
그 성령이 탄식하면 우리도 탄식하고 그 성령이 기뻐하면 우리도 기뻐하는
한 몸입니다.
그 성령은 오직 살릴 때 기뻐합니다.
오를 때 탄식합니다.
살리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니 늘 오름으로 그 기쁨을 대신하려합니다.
언제 제자들이 평안을 회복합니까?
능력을 회복합니까?
살리는 일에 인생을 걸 때입니다.
살리는 일에 물질도 드리고
살리는 일에 땀도 드리고
살리는 일에 마음도 드리고
살리는 일에 수고를 드릴 때입니다.
누가 높으냐라는 제자들의 물음에 주님은 오늘 수 없는 변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름이 아니라 살림에 전부를 걸 때 예수 믿는 참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오름이 아니라 <건짐>이라고
높아짐이 아니라 <살림>이라고
커짐이 아니라 <잃지 않음>이라고
이것이 <누가 크냐>에 대한 <주님의 변증>입니다.
* 오기스교회에서 일을 저질렀습니다.
개척하는 이라크교회 재정을 마련하기 위해 일일 식당을 열었습니다.
(Gala diner restaurant for Iraq Church)
개척을 하는 이라크교회에 재정이 많이 필요해서 그들 나름대로 티켓을 팔고 일일 식당을 열었습니다.
자립이 아직 안된 교회에서 새로운 교회를 개척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물론 저와 함께 구바네전도사가 개척을 하지만 이번에는 오기스교회가 모교회가 되어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자립도 안된 교회에서 개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티켓을 팔고 식당을 열어서 개척 기금을 마련한다는 마음이 얼마나 감격인지요.
하나님의 잃어버린 자.
그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온 교회가 마음을 모으고 물질을 모으고 땀을 모우고 있습니다.
자기 교회 채우기도 바쁠텐데,
자기 교회가 오르기 위해 목숨을 걸 수도 있는데
그들은 우리에게 복음을 받았지만
건물만 남지 않고
복음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인 <건짐>과 <살리는>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흑인교회에서 식당을 열어 개척기금을 마련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그것도 시키지 않았는데 스스로 모든 것을 준비하고 계획하고 스스로 진행하는 것은 본적이 없습니다.
저도 생각도 못했습니다.
감사하고 감격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름이 아니라 살리는 일에 자신의 전부를 쏟아 붇는 저들에게
하늘의 기쁨으로 채우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