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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욕심! 천국도 못들어갑니다.

영적 욕심! 천국도 못들어갑니다.

 

 

 

 

 

 

 

 

 

 

 

 

영적 욕심! 천국도 못들어갑니다. (18:1-10)

 

우리는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 되느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크고 얼마나 높으냐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땅에서의 높으냐에 대한 가치가 천국에서도 높은 가치로 살고싶어합니다.

우리가 땅에서 사는 신앙의 관심은 땅에서 얼마나 높으냐입니다.

신앙이 좀더 깊어지면 땅에는 미련을 버리자만 천국에서 얼마나 높으냐로 관심이 이어집니다.

 

그것이 제자들입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18:1)

 

 

첫째, 땅에서 신앙이 깊은 경지는 땅에서 높고 낮음에 미련을 버리는 단계입니다.

그것이 번째 영적 깊은 단계입니다.

 

 

처음 신앙은 땅에서 어떻게 하든지 높아지려하다가 깊은 신앙의 훈련을 통해

땅에서의 것들에는 미련을 버립니다.

좋은 신앙입니다.

보통 사람은 땅에서 높고 땅에서 가지는 것에 미련을 두고 살아갑니다.

신앙의 이유가 그런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본질을 알아가면 땅에 것에 대한 미련을 버립니다.

높아지고 가지는 것에서 자유합니다.

 

 

둘째, 그런데 땅은 아니지만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서 높아지려합니다.

 

그것이 지금 십자가와 죽음을 이야기하는 순간 제자들의 수준입니다.

세상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는 여전히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바로 천국에서입니다.

 

사람의 본성입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바로 <상향성>입니다.

자꾸 높아지려는 마음입니다.

신앙이 생겨서 땅에서 그나마 상향성의 마음에 자유했지만

마음이 천국에까지 이어집니다.

땅은 아니지만 천국에서 누가 큽니까

누가 높습니까를 노골적으로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성은 자꾸 높은 사람을 바라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은 영적 보상에 대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 본성적으로 영적으로 높은 사람을 대접합니다.

목사를 대접하고 선교사를 대접하고

설교를 잘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대접합니다.

이유는 영적 상향성에 대한 끌림입니다.

 

내가 영적으로 깊은(예수님) 사람을 따르고 대접하는 것은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통해 대리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상향성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한 영적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비록 땅에서는 비련을 버리고 자유하지만

천국에서 높아지려는 마음은 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자유해 보이는 저와 같은 목사가 사람들 보기에 자유하지만

사실 영적으로 높은 자기에 앉고 싶은 영적 욕심이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단지 단어가 천국이라는 것으로 표현되었지만

실상은 영적 욕심 덩어리입니다.

땅에서 천국으로 자리만 바뀐 뿐입니다.

 

오늘 제자들을 향하여 천국에서의 높음에 대한 가치를 설명하십니다.

 

 

첫째, 천국에서 높은 사람은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18:5)

 

예수님은 영적 욕심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바뀐 신앙의 깊은 사람들의 오류를 지적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진짜 믿음의 사람인지에 대한 것을

예수님이 살았던 삶의 방식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높아지려는 사람은 영적으로 높은 사람을 가까이하고 사람을 대접함으로 자기의 영적 자리를 확보하려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죽겠다고 십자가 이야기를 하자 본색을 드러냅니다.

죽기 전에 자기 자리를 확보해야 하는 인간의 본질, 상향성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섬기는 사람은 어린 아이를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나를 섬기고 영적으로 높은 사람은 눈으로 보기에 높은 사람이 아니라

보기에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을 믿음의 눈을 가지고 섬길 있는 사람이 진짜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증하십니다.

무엇으로요?

 

<어린 아이> 통해서입니다.

네가 진짜 천국을 믿고 세상의 상향성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자유하고

천국의 높은 자리에 대해서 자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어린 아이에 대한 섬김으로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18:5)

 

우리는 본성적으로 <상향성> 대한 길을 가르치지 않아도 압니다.

길은 영적으로 높은 사람을 대접하면 나도 높아진다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하는 목사,

선교를 잘하는 선교사,

소위 목사라고 말하는 많은 성도를 데리고 목회하는 목회자등과 친하려하고

대접하려 하고

그들과 친분이 있음을 과시하고 아는 것을 영적으로 아주 깊은 경지라고 여깁니다.

 

세상의 높아짐에 대한 자유함 아니라

대상이 땅에서 천국으로 옮겨졌을

동일한 인간의 본질인 상향성에 매인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너희가 나를 영접하여 천국에서 높아지려하고 싶으냐 나는 너희의 본성을 안다.

정말 너희가 믿음이 있고 나를 영접하여 높아지고 싶으면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라 그것이 나를 영접하여 높아지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영적으로 깊고 높은 사람을 대접함으로 보상을 받으려합니다.

보상은 다른 것이 아니라 천국에서도 황금길을 걷고

좋은 집에 살고

천국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을 상상합니다.

 

정말 바보입니다.

세상이 가치관으로 천국도 생각하고

천국의 원리도 생각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영적으로 높은 사람을 대접하고 가까이하면

천국에서 보상을 받는다 생각합니다.

 

주님은 단호히 말씀합니다.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사람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린 아이는 우리가 천국에서 뭔가 보상을 받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세상적 가치로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은 믿고 천국 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말은 천국의 원리,

예수님이 사신 <삶의 원리>대로 천국을 간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제자들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땅에서 바라던 높음에 대한 가치가

단지 천국으로 옮겼을 예수이 원하는 신앙의 원리,

천국의 원리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자꾸 높아짐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고

영적으로 높은 사람들을 대접합니다.

목사를 대접하고

선교사를 대접하고

잘못 대접하면 하나님이 벌을 주시지는 않을까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영적인 천국의 원리대로 대접하고 섬기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원리는 높은 자나 낮고 천한 어린 아이도 동일하게 영접하며 대접하는 자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질문하겠습니다.

선교를 잘하는 목사가 있고 선교를 지질이도 못하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단지 많은 성도가 보는 관점인 열매의 관점으로 말씀드립니다.

그럼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선교지를 많이 가지고 교인도 많은 선교사를 대접하고 싶습니까

선교지에 교회도 거의 없고 성도도 없는 시골의 같은 목사를 대접하고 싶으십니까?

 

소위 대형교회 목사님을 대접하고 싶으십니까

시골에 이름도 없고 겨우 열명 데리고 목회하는 목사를 기쁨으로 대접하시겠습니까?

 

우리의 본성에는 자꾸 보상심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높은 사람을 대접함으로 천국에서 높아지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고 그것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못나고 어린아이 같이 아무것도 없고 보상도 돌려 받지도 못하는 그런 어린 아이 하나를 대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자꾸 것만 바라봅니다.

그래서 작은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래서 <보상 받지 못하는>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사람이 천국에 자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는 자꾸 보상 받을 사람을 끌어들이려합니다.

대접을 해도 사역을 잘하고

뭔가 있는 사람을 대접합니다.

아닙니다.

 

보상 받을 없는 어린 아이 같이

대형교회 목사,

사역을 크게 하는 사역자가 아니라 성실하게 묵묵히 자기의 길에 진실하게 일하는

어린 아이 같은 보상을 기대할 없는 자를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그렇게 영적으로 깊어 보이는 사람을 대접하고 영접하고 싶습니다.

뭔가 높은 보상을 기대해서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고 순수하게 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너무 아십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죽는다고 하니 그들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이번이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같았습니다.

이번 일이 아니면 내가 누린 보상은 확보 없다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얼마나 속이 보이는지 아랑곳하지 않고

제자로서 하지 말아야 말들을 사람들과 예수님께 쏟아 놓는 것입니다.

 

보상 받지 못하는 시골의 목사님,

보상 받지 못하는 겨우 한명 붙들고 평생을 보내는 이슬람의 선교사님,

열매가 없어 보고 것도 없는 작고 어린 선교사님

아직은 영적으로 줄것이 없어 날마다 눈물로 가슴을 치는 어린 전도사님,

이런 분들이 우리가 영접해야 어린 아이들입니다.

우리가 대접해야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목사,

선교사,

사역자를 대접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버려야합니다.

순수한 대접과 교제는 있어야 하지만 보상을 바라는,

하나님께 보상을 바라는 대접과 영접을 그쳐야합니다.

마음이 교회를 망칩니다.

 

 

셋째, 그래서 예수님은 작은 자를 실족케 하지 말라고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리라"(18:6)

 

천국에서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실족하게 가능성이 많습니다.

사람은 천국에서 크기 위해서 사람만 상대합니다.

그래서 작은 사람이 보이지 않고

어린 아이가 보이지 않고

눈물 흘리고 상처에 밤을 보내야 하는 상처 입은 영혼이 보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작은 하나를 실족케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서 바다에 바져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까?

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로 물었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는 상향성의 원리로 사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크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들어가냐 들어가느냐의 심각한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땅에서의 삶에 미련을 버린 자이지만 

천국에서 자기 되기 원하는 여전히 영적인 욕심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서 <작은 >에게 <마음이> 없습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기는 하지만

예수를 믿는 원리와 천국의 원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천국을 말하지만 천국의 원리를 모르고

예수를 부르지만 예수님의 믿음의 원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크냐 작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천국에 가느냐

가느냐의 문제로 고민을 해야 한다고 주님은 경고하십니다.

 

 

꿈을 가진 사람일수록,

영적 야망이 사람일수록,

영적으로 깊은 세계를 경험한 사람일수록

작은 사람,

영적으로 어린 사람,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을 무시하고 외면하고

자신의 깊은 영적 대화의 상대에서 제외 시킬 가능성이 많습니다.

 

 

주님은 눈이 영적으로 깊어서 작은 자를 실족하게 하면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손과 발이 작은 자를 섬기는데 걸림이 된다면 영적 손과 발을 찍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영적으로 깊은 천국에서 크려고 하는 영적 눈과 손과 발을 찍어 버려야합니다.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영적 깊은 손과 그리고 눈의 체험과 경험과 욕심을 버려야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깊은 손과 발과 눈으로 천국에서 자가 되려는 영적 상향성의 원리에 매여 사는 것보다 아무것도 없지만 작은 자를 영접하고 대접하는 평범함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전세를 따지는 사람을 위해 주님은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서 세금을 주십니다.

이유는 그들이 실족치 않게 하기 위해서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17:27)

 

십자가의 명분,

거룩하고 놀라운 명분이 작은 자를 죽여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의 원리는 주님이 걸어가신 삶과 신앙의 원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내가 어린 아이, 죄인일 나와 동행하고 영접하신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영적으로 어린 아이를 대접하고 영접하고 대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의 원리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적 깊은 수준과 만남과 지식과 열매가

영적 손과 발과 눈이 되어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씀합니다.

 

천국에서 높아지려는 사람은 반드시 천국에서 작은 자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쉽게 실족하게 하고 쉽게 무시하고

영접하지 않습니다.

 

왜요?

영적으로 높은 ,

높음은 자신의 영적 높아짐의 보상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크냐 작냐로 물었습니다.

우리는 크냐 작냐로 묻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크냐 작으냐로 받지 않고

천국에 들어가냐 들어 가느냐로 받으십니다.

 

 

 

믿음의 원리가 잘못 되어서입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기초가 잘못 되어서입니다.

천국의 원리,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어서입니다.

 

주님은 크냐 작으냐가 아니라

영혼이라도 건지려는,

영혼이라도 살리려는 것이 전부입니다.

 

주님께,

영혼에 전부를 거는 주님과 살면서

내가 천국에서 얼마나 크냐를 논한다면 주님이 사람을 어떻게 보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을 안다고 하겠습니까?

 

집을 나간 아들,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아버지의 재산에만 마음이 있는 첫째 아들이 바로 천국에서 누가 크냐를 묻는 이스라엘,

열두 제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야기가 이어서 나올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주님의 마음,

 

높아짐 아니라 잃은 자를 찾는,

실족한 자를 찾는 주님의 마음이

이제는 마리 잃은 양의 비유로 표현되고

일흔 번에 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용서의 이야기가 나오고

자기는 탕감 받았으나 다른 작은 돈은 탕감 하지 않는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용서를 받은 ,

천국을 허락 받은 자는

크냐 작으냐

높으나 낮으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과 함께 있는 ,

천국을 살고 영원을 사는 존재로 회복 되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행위론적 가치> 평가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존재론적 가치>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크냐 작으냐 높으냐 낮으냐로 대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을 주님으로 대하는 성숙함,

천국의 삶의 원리를 익혀야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크냐 작으냐가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느냐 들어 가느냐의 문제가 발생합니다.

 

 

세상이 영적으로 깊은 이들로 인해 실족하는 !

여전히 영적 깊음을 천국에서도 이용하려 해서입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 하는 !

용서에 대한 <감격의 회복>입니다.

 

그것이 내일 이야기입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 선교지마다 사정이 다를것입니다.

저희 선교지는 목사 안수 받은 목사를 사역자로 받지 않습니다.

이유는 많은 목사님들은 이미 목사 안수를 받으면 협력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목회를 해서입니다.

 

저희들은 신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교회에서 훈련을 시키고 헌신을 하면

신학교를 보내고 때부터 목회 훈련을 시킵니다.

나이가 어리고 목회 경험도 없는 어린 아이 같지만 그러나

개척하는 교회의 성도들과 함께 교회를 세워가고 목회를 배우고

그들의 영적 리더로 목사로 세워가는 시간을 보냅니다.

 

이미 자기 경험이 많은 현지 사역자들은 바른 것을 가르치고 이해시켜도 따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사역자들이지만 그들은 순종과 겸손과 존경과 목회를 배웁니다.

그렇게 한사람 한사람을 훈련하고 신학교를 보내면서 개척을 진행합니다.

그래서 저희들의 개척은 교회를 세우고 건물을 세우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해야해서 어렵습니다.

더더욱 사람의 사역자를 목회자로 세우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고등학교도 안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여기 사정에 그들을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하고

학사 과정 과정을 2 보내고

다시 학사 과정을 마치면 7년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리고 안수를 받으면 거의 8-10년이 걸립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그렇게 합니다.

우리의 모든 사역지와 사역자들이 그렇게 세워지고 있습니다.

오래 걸리고 힘겨운 시간이 지나야합니다.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사람을 세우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고

교회가 무너지지 않는 가장 안전한 방법입니다.

 

영적으로 빨리 가려고

이미 안수 받고 이미 경험 많고 이미 잘하는 사람은 좋겠지만

잘하는 장점은 있으나 머리를 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나의 제자를 만들어야합니다.

어린 아이 때부터 훈련하고 교육하고 마음을 나누고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마음을 나누며 신뢰를 쌓아가는 오랜 시간을 통해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목회지에 사랑과 애정을 가집니다.

 

그렇다고 넉넉한 사례도

많은 지원도 하지 못합니다.

정말 죽지 않을 만큼 훈련하고 인내의 시간을 보냅니다.

그렇게 서로가 보내니 왠만한 것은 마음으로 통합니다.

 

사역을 하는 우리의 마음속에

빨리 가려고

높이 가려고 자꾸 편법을 쓰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높으냐 빨리 가느냐가 아니라

교회를 무너뜨리고

천국도 들어가는 일이 생길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 깊고 높아지려는 욕심이 모든 사역과 나아가 천국도 못들어 간다고 하십니다.

영적 욕심이 말입니다.

천국에서 높아지려는 마음이 말입니다.

어린 아이입니다.

어린 아이 같이 아니하면

작은 발걸음 한발 나아가는 어린 아이같이

그렇게 가는 주님의 걸음을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