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명분, 한발 앞선 배려(마17:22-27)
본질적이고 어려운 인생의 문제가 있을 때
이상하게 더 마음을 분산시키고 어려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삶의 구석구석 나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작은 일들입니다.
큰 명분을 가지고 우리는 일을 하고 인생을 달려갑니다.
그런데 그런 명분이 명확할수록 삶을 힘들게 하는 사소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내려온 후로부터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고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17:22-23)
그 일은 크고 엄청난 일이고,
우리의 인생에,
우리의 교회에,
우리의 가정에,
나의 미래에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그 일로 심히 근심할만큼의
집중을 해야하고 번민을 해야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에 전부를 걸고 달려가는 일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런 일들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이나 일들이 반드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이 거의 공식화 되어갈 때
가버나움에서 한 사람이 베드로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왜 너의 선생은 반세겔, 즉 성전세를 내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유대인이면 누구나 의무적으로 내는 성전세를 내라는 것입니다.
지금 죽느냐 사느냐하는 중요한 일이 본격화 되는데
갑자기 세금을 내라고 합니다.
인생이 그렇습니다.
너무 중요한 일이 일어날 때 나를 귀찮케 하고
나의 마음을 번잡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명분이 거룩하고 귀하며 인생을 걸고 달려가는 일에
우리는 종종 우리의 발목을 잡는 작은 일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일이 큰 일들이 아닙니다.
성전세는 반세겔입니다.
은 한세겔은 노동자의 4일 품삯인데 2일치 품삯을 말합니다.
목숨을 거는 일에 비해 그 일은 너무 작은 일입니다.
온 세상을 구하는 일에 비하면 큰 일이 아닙니다.
나라를 구하고 교회를 구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에 비하면 그 일이 별일 아닌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일들을 쉽게 넘겨 버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그 의미를 따지십니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근심이 되어 올 때 예수님이 이미 아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묻습니다.
임금이 누구에게 세금을 받는가?
아들인가 타인인가?
베드로는 타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타인이면 아들들은 세금을 면제 받아야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마지막에 한마디를 더 하십니다.
고기를 잡아서 그 입에 있는 돈으로 너와 나의 세금을 갖다주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주님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명분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17:27)
주님이 세금을 내라하십니다.
이유는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거룩한 명분 때문에 작고 소소한 것을 놓쳐버립니다.
작은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목사는 이래야하고
교회는 이래야하고
나라는 이래야 한다고 말하면서 작고 소소한 것은 무시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거룩한 명분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디를 향하여 가는 것인지 생각하게합니다.
그 거룩한 명분은 결국 <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명분이 그들과 상관없다고 여깁니다.
아닙니다.
우리의 거룩한 명분은 결국 <그들>입니다.
주님과 십자가,
주님의 길,
주님의 방향은 너무나 거룩하고 온 세상을 구하는 일이지만
그 세상은 결국 그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가는 길입니다.
주님은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 그들의 요구를 채우십니다.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의 명분,
교회의 명분,
목사의 명분,
큰 대의는 결국 그들이 실족하지 않는 작고 소소한 것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명분>이 크고
<목표>가 큰 사람일수록 그들의 작고 소소한 것에 무관심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명분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실수입니다.
그 명분과 그 목표가 결국 어디를 향합니까?
<그들>입니다.
십자가의 방향성은 주님 자신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방향성,
교회의 방향성은 결국 그들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내가 성전의 주인이고
내가 성전세를 받을 사람이고
내가 성전세를 낼 의무가 없지만
그러나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그것입니다.
얼마전에 한국교회 안에서 선교회를 놀랍게 크게 하는 어떤분이
지방세를 내지 않아 압류가 들어오고 세관에서 집 문을 부수고 들어와서
모든 물건을 가져갔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돈이 없다고 하는데 뭉퉁이 돈이 나아고 숨겨 놓은 주식배당서가 나오고…
압류를 하니 하나님께 드릴 헌금이라고 안된다고 몸 싸움을 했다고합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
그들의 삶의 세사한 내용은.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서 교회와 선교를 위한 큰 명분을 가질수록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것은
우리의 그 큰 명분 때문에 그들이 실족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명분이 거룩하고
하나님을 위한 목표가 높을수록
우리는 그들의 그 작은 상식을 무시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명분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십자가를 이야기하고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그 명분이 너무 깊고 놀라워서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는 상황에서
자기의 명분에 빠져 다른 사람을 보지 못하는 불균형이 아니라
그들의 요구,
어찌보면 예수님의 입장에서 상식적이지 않는 요구에
<그들의 상식>으로 <그들을 배려>하는 섬김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거룩한 명분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세입니다.
식당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다른 사람의 귀한 시간을 방해하는 전도회의 모임,
지하철 의자를 거의 강압적으로 돌진해서 뺏아 앉으면서
'주여 감사합니다'를 외치고,
헌금은 내는데 세금은 내지 않고
헌금은 내지만 다른 이를 돌아보는 일에 인색한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기준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거룩한 명분,
세계 선교와 한국의 성시화와
복음을 외치는 우리 일수록 더더욱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더더욱 섬세한 섬김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금을 낼 의무가 없는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세금뿐만 아니라 베드로의 세금도 내라 하십니다.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17:27)
예수님과 베드로입니다.
예수님도 그 거룩한 명분에 세상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도 이와 같이 세상이 실족하지 않도록 배려하라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직분이 높아지고 거룩의 명분이 클 수록
비 상식적이 되는 사람들을 봅니다.
믿음이라는 거룩한 명분 뒤에 숨어
세상을 실족하게 하는 수 많은 교회의 일들을 멈추어야합니다.
그들을 무시하고
그들의 요구를 외면하고
그들이 말하는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우리의 거룩한 명분은
세상도 외면하는 명분입니다.
하나님도 알지 못하는 명분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지
우리가 우리의 거룩한 명분을 위해 무시하고 외면할 대상이 아닙니다.
주님은 단 한번도 자신과 제자들을 위해 초자연적 일을 행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유일하게 초자연적 은혜로 그 의무를 다하십니다.
낚시를 통해 물고기 입속의 돈을 갖다 주라하십니다.
그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십자가는
거룩한 교회의 모든 명분과 일들은
그들이 실족하지 않는 깊은 배려와 상식에서 이루어져야합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선교를 위해
교인들의 사업장에 홍길동처럼 나타나서
필요한 것을 강탈하듯이 가져간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교회에 이것도 필요하고 저것도 필요하니 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시고…
어떤 선교사님은 선교팀이 사용한 식사비와 숙박비의 실 지급 금액보다
영수증상 더 많이 부풀려 가져간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거룩한 <명분>은 세상인 그들이 <인정>할 때 그 명분은 거룩하고 그 명분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그것을 바라본 사람들이 이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막15:39]
명분이 거룩하고
명분이 맞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들을 통해 인정이 되야합니다.
우리만의 거룩이고 우리만의 축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더 많이 고민하고 더 많이 베려 해야합니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2003년, 전도사로서 청년들과 남아공 선교를 다녀 갔습니다.
그 당시 사진을 개인당 일일이 뽑아 주었는데
20명이 넘는 사람이기에 그 비용이 200만원 가까이 됩니다.
지금은 목사님이 된 팀장이 그 사진을 뽑으러 갔다가 기분이 좋아서 보고를 합니다.
전도사님(당시 전도사였지요) 선교팀 사진 엄청 싸게 계약 했습니다.
다른데 보다 한 장에 몇 십원 씩 싸게 했습니다.
아마 전체로 따지면 몇 십 만원을 싸게 했을 것입니다.
저는 그 팀장을 다시 그 사진관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라고 했습니다.
"원래 가격대로 주겠다고, 아니 필요하면 더 줄테니까 좋은 제품으로 만들어 달라고"
이유는 그랬습니다.
그 사진관 사장님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분이 먼저 싸게 해주겠다고 하지 않았고 우리 입장에서 큰 금액이니까
더 싸게 해달라고 일반적인 네고의 법칙을 따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교회에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찾았고
그것도 아프리카 선교를 다녀온 선교팀의 사진이었습니다.
그럼 교회가,
교회 선교팀이 그분에게 더 잘 해주는 것이 맞습니까 손해를 보는 것이 맞습니까?
세상이 교회 덕을 봐야합니까 교회가 세상 덕을 봐야합니까?
그 사장님은 감동을 하셨고
좋은 사진에 개인당 큰 사진으로 확대해주시는 서비스도 제공해 주셨습니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오병이어로 세상을 먹이는 예수님입니다.
세상에 유익을 주고 세상을 살리고자 자기의 생명도 주시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도 가고
겉 옷을 달라하면 속옷도 줘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아프리카 선교를 다녀온 선교팀이 사진을 뽑는데
세상 손님보다 더 손해를 보고 세상손님보다 더 힘들게 한다면
과연 그 사장님이 우리를 거치면서 교회를 가고 싶고 예수를 믿고 싶겠습니까?
가버나움의 한 사람이 저 예수라는 사람은 온 세상을 위해 십자가는 지면서
성전세인 반세겔도 안내는 사람이라고 안다면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신 주님의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이 과연 예수를 믿겠습니까?
예수를 따르겠습니까?
한 사람의 영혼도 실족하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거룩한 명분과
놀라운 비전을 가진 사람들의 원리가 되야합니다.
우리는 자꾸 세상의 말에 속습니다.
너는 거룩한 일을 할 사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세상의 작은 자들,
세상의 작은 소리는 무시하고
세금도 헌금하면 하나님이 없애주시고
헌금 많이 하면 불법을 해도 잘 넘어간다 걱정 말아라…
세상의 말입니다.
거룩한 명분일수록
교회의 일일수록
한 사람의 세금을 원하는 세상의 상식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합니다.
사람이 실족하고 예수를 미워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거룩한 명분에 침을 뱉고 돌을 던지는 것은
큰 명분 때문이 아니라
작은 반 세겔의 실족지 않게 하는 배려가 없어서입니다.
당장 맞는 말을 하고 당장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낼 의무가 없다고 무시하면
결국 그 한 사람이 온 교회를 힘들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거룩한 명분은 거룩한 작은 배려로 빛을 더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잃어 버린 것!
거룩한 명분이 아니라
세상의 상식적 요구에 대한 작은 배려입니다.
초자연적 은혜를 통해서도 그 작은 상식적 요구를 채우시는
예수님의 깊은 마음!
우리가 회복해야 할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거룩한 명분보다 한 발 앞서가는
<거룩한 배려>가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감동케 하고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할 것은 거룩한 명분이 아니라
<거룩한 배려>일 것입니다.
* 한숲교회입니다.
안식년을 나간 동안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본교회인 남천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가덕도의 가덕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김동인목사님이 3년전에 개척하신 한숲교회입니다.
사실 이 교회는 경기도 용인에 있습니다.
저와는 아는 사람도 없고
오직 김동인목사님이 남천교회에 사역자와 집사로 지냈던 사이가 다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통해서 거룩한 배려를 많이 받았습니다.
비단 저만이 아니라 이 교회를 통해 섬김을 받은 선교사님들이 다 그런 생각을 가질 것입니다.
한숲교회가 저에게 특별한 것은
한번도 본적 없는 저희를 너무나 귀한 배려로 섬겨주신 것입니다.
각 가정마다 저희 가정을 초대해서 숙소를 제공해주시고
초대해서 식사 시간을 가지고
어떤 가정은 뮤지컬을 보게 하시고
어떤 가정은 평생 처음 타는 스키장도 데려가시고
어떤 가정은 아이들을 맡아서 좋은 놀이를 함께하시고
아내를 배려하며
아내는 아내대로
저는 저대로 섬겨주시고 기도하며 마음을 나누어주셨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맞춤형 배려를 하셨습니다.
선교사로 대접을 받는 것에 익숙치 않는 저희들이라 가정가정마다의 배려와 사랑에
큰 위로를 받고 왔습니다.
그분들의 배려와 섬김을 받으면서 느낀 것은
이 교회가 어떤 거룩한 명분을 가지고 사는지
이분들 각자가 어떤 인생의 높고 위대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분들의 거룩한 명분은 초라한 저희 가정을 섬기는
작지만 거룩한 배려속에 자라간다는 것입니다.
어디 이분들 뿐이 겠습니까?
저희 가정은 늘 거룩한 배려로 섬겨주시는 사랑이
저희의 거룩한 선교의 명분을 이루어 가는데 거름이 되고
물이 되고,
햇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거룩한 명분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사람은 놀라운 목표만으로 살지 못합니다.
그 거룩한 명분과 놀라운 인생의 목표는
실족을 넘어 먼저 앞선 배려와 사랑의 수고로 빛이 나는 것입니다.
거룩한 명분이 우리의 상처와 아픔을 녹이지 못합니다.
한발 앞선 그들의 거룩한 배려가 인생의 상처를 녹입니다.
인생의 눈물을 닦습니다. 용기를 줍니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났지만
다시 한번 더 우리의 선교를 빛나게 하신
한숲교회의 <한발 앞선> 배려와 섬김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기회 되는대로 한국에서의 만남들을 나누려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