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자씨 그리고 민들레...(마17:14-20)
환경의 변화에 목숨을 건 사람들은
또한 내 모든 문제의 이유가 환경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내면의 변화에 있고
세상의 목적은 환경의 변화에 있습니다.
오늘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예수님은 세상과 마주칩니다.
그런데 그 세상은 어김없이 환경에 전부를 걸고 찾아오는 사람들입니다.
간질이 들어 불에도 물에도 넘어지는 아들을 둔 아버지가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소리는 곧 세상의 소리입니다.
첫째, 주여라고 주님을 부릅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17:15)
이 세대는 주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 주님이라고 부르는 핵심은 환경의 변화에 목적을 두고 찾아오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 세상은 주님을 모르는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이 문제입니다.
주를 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주님이 보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을 탓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을 못 박고 주님께 욕을 먹은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소리는
둘째, 패역한 세상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17:17)
주님이라고 부르는 세상의 사람은 아들을 고쳐 달라고 제자들을 먼저 찾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 위에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제자에게 찾아가서 기도를 요청했으나
이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다고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당신이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에 예수님은 이 사람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 세대를 두고 <패역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한 사람의 행위를 두고 세대를 언급하십니다.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대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
바로 <왜곡>입니다.
이 세대,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의 문제는 바로 왜곡된 마음으로 살아가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간질 걸려 불에도 물에도 넘어지는 아들을 가진 아버지의 정성을 칭찬한 것이 아니라
그 아버지 즉 이 세대를 한마디로 정의를 하시는데 그 정의는 바로
<왜곡>하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패역한> 이라고 번역한 이 말(perverse)은
사고 방식이나 태도가 삐뚤어진 것을 말합니다.
원어로는 왜곡하는 것, 잘못 해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간질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를 보고 이 세대를 정의하시기를
셋째, <잘못 해석하는 세대>, <왜곡하는 세대>라고 정의를 하십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들을 고치려는 아버지가 먼저 제자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 와서 주님 제가 아들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데려 왔는데
능히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고쳐주십시오 라고 하는 말속에는
내 아들이 고치지 못한 것은
"당신의 제자들이 문제여서 그렇습니다" 라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17:16)
한마디로 내 아들이 낫지 못하는 이유는
제자들이 문제다라는 것을 주장하고
고치지 못한 이유를 주님께 그렇게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일이 이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대가 그렇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17:17)
우리는 늘 내 안의 문제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마음의 변화에 초점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늘 환경의 변화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환경이 바뀌면 나도 바뀐다 생각합니다.
환경이 바뀌지 않아서 나도 불행하고 나도 아프다고 생각합니다.
환경의 변화가 목적인 사람은 내가 행복하지 않는 이유도
환경이 변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은 찾은 아버지는
아들이 낫지 못한 이유가 바로 제자들이라는 것을 지목하고 있는 것을
주님이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패역한 세대>입니다.
환경의 변화가 인생의 목적이고
내 인생이 풀리지 않고 내 인생이 행복하지 못하고
내 인생이 불행한 이유는 다 저 제자들(환경)이 못나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대,
이 세상의 변명입니다.
늘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잘못됨의 이유가 늘 저 목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나의 발목을 잡고 있는 남편 때문이고
내가 좀더 잘 살지 못하는 이유는 저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패역한 세대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환경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패역한 세대의 특징은 삐뚤어진 시각,
왜곡된 마음입니다.
환경이 아닌데 자꾸 환경이라고 생각하는 왜곡된 눈과 삐뚤어진 마음입니다.
주님은 그것이 주님을 참지 못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17:17)
주님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뭔가를 잘못하고
우리의 능력이 없고
우리의 실력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마음이 힘든 것은 우리의 왜곡되고
<잘못 해석하는> 마음입니다.
치료는 병명이 나와야 합니다.
진단이 나와야 약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자기 진단>이 안됩니다.
주님은 제발 자기 진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늘 환경에 목숨을 걸고
환경이 나아지면 내 인생도 나아질 것이라는 잘못된 해석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왜곡된 신앙은
왜곡된 해석에서 나옵니다.
주님은 환경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내면,
마음에 초점을 두고 우리는 대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문 밖에서 두드리십니다.
마음에서 말입니다.
주님이 환경이 목적이라고
우리 안에 들어 오지 않고 밖에서 같이 거하시겠지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 마음 안에 오시길 원하십니다.
목적이 안이지 밖,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는 자꾸 왜곡합니다.
우리는 자꾸 잘못 해석합니다.
우리는 삐뚤어진 마음으로 주여(Lord)를 부르니
답이 없고 욕만 찾아옵니다.
아들을 고치러 오는 아버지의 정성은 대답합니다.
그러나 환경은 내 마음의 변화가 오지 않으면
왜곡된 해석과 삐뚤어진 마음의 변화가 오지 않으면
주님은 고쳐주시기는 하지만 화는 멈추지 않습니다.
넷째, 그럼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의 변화는 무엇입니까?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17:17)
믿음이 없으면 왜곡되게 해석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잘못 해석합니다.
주님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에덴동산에서 잃은 것이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대화하는 나라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나라입니다.
오늘 아들을 고치러 나온 아버지와 이 세대의 특징은
오직 한가지 믿음의 부재라고 말씀하십니다.
환경이 문제여서 아들을 못 고친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변화가 없어 믿음이 없어서 고치지 못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에 목숨을 걸기 때문에
믿음의 길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기 원하는 것은
병고침이 아닙니다.
오병이어가 아닙니다.
병과 오병이어속에 화려하고 힘차게 역동하는 믿음으로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것입니다.
병든 아들을 둔 아버지의 문제는 믿음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아들을 고치지 못한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럼 왜 우리는 못고쳤습니까?
주님은 말씀합니다.
그것도 믿음이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17:20)
교회는 이제 믿음이라는 말이 나오면 식상해 합니다.
재미 없어합니다.
그냥 재미있는 예화나 교훈적인 이야기에 더 귀를 쫑긋세웁니다.
더 웃고 더 눈물을 흘립니다.
말씀에 관한 이야기나 말씀을 설명하는 것보다
세상적 교훈이나 세상적 감동거리에 더 주목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오직 믿음으로만 승부를 거십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주님의 손을 가르치십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잃은 것은
좋은 동산이 아니라 믿음이어서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곳에 좋은 에덴동산이 있지
아무리 좋은 에덴동산도 믿음이 사라지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세워집니다.
믿음이 오직 내 인생의 에덴동산을 만듭니다.
베드로를 위한 기도도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22:32]
패역한 세대의 특징은
믿음 말고 다른 전부를 구합니다.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환경의 변화에 행복과 불행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 세대에 주님은 오직 바른 해석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오직 믿음이 못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
주님은 우리 인생의 키가 환경이 아니라 믿음임을 아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와 믿음의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자꾸 믿음 말고 다른 모든 것을 다 하라합니다.
환경에 전부를 걸라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
내 신앙이 문제인 이유를 자꾸 환경,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그들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이런 저런 상담을 많이합니다.
한결 같은 문제는 다 내 안의 변화가 아니라
환경에 아까운 인생을 다 보낸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아픈 이유는 저 제자들 때문이라는 왜곡된 해석이
우리의 믿음의 걸림돌이 되고
우리 인생의 아픔이 이유라고 믿고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 목사 때문에 신앙이 재미없고
저 선교사 때문에 사역이 문제고
저 장로 저 권사 때문에 교회가 문제라고 믿게 합니다.
내 남편이 내 인생의 불행의 기초이고
내 자식이 내 인생에 눈물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패역한 세대,
왜곡된 해석으로 살게하는 세상의 본심입니다.
환경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이 사라진 세상입니다.
주님은 주려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아도 생명력 있는,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믿음,
하나님을 믿기에 자신의 몸과 전부를
다른 사람을 위해 기꺼이 드릴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은 크기가 아닙니다.
겨자씨는 주님이라 했습니다.
자신을 빗대어 말씀했다 했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은 아무리 초라한 삶이어도
비록 갈릴리에서 살고
구유에서 나고
보잘것 없는 갈리리 어부들과 사는 삶이어도
그 삶이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삶일 때
산도 옮기고
못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 만큼의 믿음은
사는 것이 초라하고 세상 보기에 아무것도 아닌 삶이어도
믿음으로 드리는 삶을 살 때
홍해도 갈라지고
요단강도 열리고
여리고 성도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섯째, 겨자씨 같은 믿음이 무엇입니까?
작아 보여도 진짜 믿음은
자신의 전부를 다 드릴 수 있는 삶을 말합니다.
없는 가운데 하나님을 믿기에
자신의 것을 기꺼이 드릴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믿음이고
주님은 하나님을 믿기에
초라한 자신의 삶을 하나님과 세상을 위해 전부 다 드리는 참 믿음의 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겨자씨 믿음!
믿는 다면 내 환경이 아니라
내 마음과 삶을 다른 이를 위해 드리는
드림의 삶을 의미합니다.
환경이 아니라
나를 드리는 마음!
겨자씨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겨자씨의 다른 이름은 <사랑>입니다.
왜곡하지 않고 바라본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기초 위에 자신을 드리는 <믿음>이 세워지고
그 믿음의 삶은
한 알의 겨자씨가 다른 생명을 위해 <자신을 드림>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환경에 목숨을 거는 사람의 특징은
결코 자신을 드리지 못합니다.
그것이 이 세대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변화된 사람,
마음에 왜곡된 해석이 아닌 본질을 본 사람은
겨자씨처럼 사랑의 기초 위에 믿음의 드림을 드리는 삶입니다.
우리는 패역한 세대입니다.
모든 것을 잘못 해석합니다.
자신도 잘못 해석하고
사랑도 믿음도 잘못 해석하고
겨자씨도 잘못 해석하고
주님도 잘못 해석하고
나의 행복과 불행의 이유도 잘못 해석합니다.
산 위에서 내려와서 바라본 세상에 대한 주님의 해석!
<패역한 세대>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입니다.
왜곡된 해석을 잡고
환경이 아니라 믿음 안에 거하면
우리 안에 천국,
우리가 이루지 못할 놀라운 일을
주님은 우리를 통해 이루실 것입니다.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 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17:20)
아멘!
* 길을 걷다 만난 민들레입니다.
해가 떨어지는 석양에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지난 날의 인내가 생명을 만듭니다.
해는 떨어지나 내일의 생명으로 오늘의 이 자리가 아름답습니다.
광야 뜨거운 해와 비바람 폭풍의 세월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는 것은
오늘 내가 내일의 생명을 품고 있어서입니다.
화려한 꽃이 지는 것도 감격이 되고
오늘의 외로움도 입가에 미소가 되는 것은
생명을 품은 한 올 한 올의 날려보낼 홀씨가 있어서입니다.
해가지는 저녁 놀 스산함에 이 자리가 청승이지만
밤새 날려보낼 생명으로
가슴 벅찬 감격입니다.
남들 비록 홀로선 이자리 눈길도 없이 외면하지만
태양을 품은 내일에 대한 믿음이
감격으로
기대로
설렘으로
그래서 이 자리가 세상을 다시 시작하는
네 강의 발원지가 됩니다.
그래서 이 자리,
믿음의 한 올 한 올 홀씨로
광야에서 내일을 부르는 나의 노래가 됩니다.
민들레 홀씨 되어 부르는
나의 노래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