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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의 변화 마음의 변화

환경의 변화 마음의 변화

 

 

 

 

 

 

 

 

 

 

환경의 변화 마음의 변화 (17:9-20)

 

내가 원하는 것만 보고 내가 원하는 것만 들립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만 들리고 보입니다.

그것이 죄를 낳습니다. 아니 그것이 죄입니다.

 

사람의 속성은 그렇습니다. 자기가 정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을 만나도 그렇고 일을 해도 그렇고 내가 정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기 목적에 충실한 사람은 자기 성취도 강합니다.

그래서 가지 목표가 강한 사람은 뭔가를 이루고 성취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처절하게 박살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죽음과 고난을 이야기하자 자기들이 알고 있던 성경의 지식과 다른 것을 질문합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17:10)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하나님의 회복을 꿈꾸었습니다.

엘리야가 와서 엘리야의 갈멜산의 능력과 초자연적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의 세상에 영향을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오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바로 세례요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한 엘리야와 하나님이 계획한 엘리야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17:13)

 

 

모든 백성들이 세례요한이 엘리야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은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오실 엘리야를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말라기선자지의 예언에 엘리야가 온다고 해서입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4:5)

 

모두 엘리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오지 않았는데 예수님,

그리스도가 죽겠다고 하니 제자들이 궁금해진 것입니다.

엘리야는 안왔는데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리라한 엘리야는 세례요한인것을 말하자 그제야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둘째, 그런데 여기서 엘리야를 하나님이 미리 보내셨을까요?

 

 1.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와 말라기 선지자가 세례요한의 일을 예언합니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예비하는 내용은 산과 골짜기가 평탄하여 지는 것입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3:5)

 

산과 골짜기는 바로 사람의 마음입니다.

높아지고 낮아진 마음 둡고 험한 마음의 길이 평탄하여 지는 것입니다.

 

 2. 바로 사람의 마음을 평탕하게 하는 일이 엘리야 세례요한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엘리야라고 하니 엘리야의 능력과 엘리야의 초자연적 힘을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양으로 복음의 길을 이끄십니다.

그러니 내가 원하는 것이 엘리야의 능력과 엘리야의 힘과 엘리야의 권능이라고 생각했다면

절대 볼수 없는 것이 세례요한 입니다.

 

 3. 말라기가 말한 엘리야 세례요한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6)

 

 

한마디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가족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구약에서 말한 엘리야가 와서 하는 일이 겨우 마음을 평탄케하고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회복하는,

가족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세례요한이 말씀을 전하자 부류의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하는지 묻습니다.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무리에게는 없는 자에게 <나누라> 하셨습니다.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눅3:10)

 

 2) 세리에게는 <정직>하라 하셨습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가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3:12-13)

 

 3) 군인들에게는 <강압>하지 말고

<거짓말> 하지 말고

<자족>하라는 것입니다.

 

 

"군병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3:14)

 

 

 

구약의 놀라운 엘리야를 예언한 것은 결국 우리 마음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변화를 기대하며 엘리야 세례요한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의 변화 , 

<마음의 변화> 아니라

<환경의 변화> 기대했습니다.

 

 

우리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표는 한마디로 환경의 변화이지 마음의 변화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크고 놀라운 일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입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한 엘리야 세례요한의 일은

높고 낮은 마음, 굽고 험한 마음이 바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은 마음의 변화가 아니라 환경의 변화에 초점을 맞추니

엘리야도 안보이고 세례요한도 안보이고

그리스도도 안보이기 때문에

세례요한은 베임을 당하고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처형을 당합니다.

 

 

셋째, 엘리야된 세례요한의 목을 베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박을까요?

 

<마음의 변화> 아니라 <환경의 변화> 인생의 목표이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환경의 변화라고 여기는 사람은

어떤 말도 들리고

어떤 하나님의 뜻도 보이지 않습니다.

 

 

말라기가 전한 엘리야의 일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아비와 자녀의 <관계 회복>입니다.

 

세례요한이 말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나누고,

정직하고

강압적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자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실 엘리야를 환경의 변화의 관점에서 신앙을 바라보면

세례요한이 열번을 와도 우리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실 그리스도가 영혼의 구원과 영원을 회복하는 영혼의 구원자로 보지 않으면

예수님이 열번와도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다시 올려보냅니다.

 

일이 인생에 없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내면의 변화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마음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환경의 변화에 전부를 걸고 살아갑니다.

환경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마음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 가는 곳이 하나님의 환경을 여시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광야 40년의 마음의 변화의 과정을 지난 사람이 가나안의 변화된 환경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하는 것은 마음의 변화이지 환경의 변화가 아닙니다.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황제의 도시에서 환경에 매여 사는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물음이

오늘 세례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을 풀어주시면서 다시 우리에게 그것을 상기 시키십니다.

 

오리라 엘리야는 아비와 자녀의 관계 회복을 위해 오시는 것입니다.

가족의 관계를 회복하는 ,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가족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아무리 사역을 잘하고

아무리 신앙이 좋아 보이고 교회 봉사를 잘해도

가족의 관계의 회복,

마음 내면의 변화가 가정에서부터 확인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고난 중에 거하게 하고 십자가에 매 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구약 성경의 마지막 말은 엘리야의 예언입니다.

그가 일은 오직 한가지 였습니다.

바로 관계의 회복,

아비와 자녀,

자녀와 아비,

사람과 사람의 <관계 회복>입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말4:6)

 

 

잘은 모르지만 마태복음은 구절 지나지 않아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것입니다.

용서에 대한 말씀을 반드시 것입니다.

용납하고 이해하는 말씀을 반드시 것입니다.

 

그래야 말씀이 같은 맥락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말씀의 방향과 신약의 말씀의 방향이 같기 때문입니다.

(잠시 확인을 해보니 다음 장에서 관계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복음은 내가 기대한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 말하는 것을 내가 듣는 것입니다.

성경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변화 관계의 변화를 말씀합니다.

 

높은 낮은 ,

굽은 험한 모두 사람의 마음을 말합니다.

산이 평탄하여지고

길이 평탄하여 지는 것이 세례요한의 일이고

예수님의 복음이며 예수를 믿는 이유입니다.

 

 

평생 예수를 믿고 환경의 변화에 전부를 걸고 기도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지금도 천지를 갈아 엎어 새로운 나라를 만드시고

나의 인생에 놀라운 기적으로 환경을 바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을 하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이유는 성령은 마음에 보내셔서

<영원> 회복하고

<마음> 회복하고

<관계> 회복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마음이 변화되고 관계가 회복된 사람만 들어갑니다.

마음이 변화되지 않고

마음이 갈아 엎지 않은 사람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오리라 엘리야는 관계의 회복에 전부를 걸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예비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엘리야된 세례요한을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했다고 합니다.

<임의로> 대우했다는 말은

자기가 원하고 <바라던 대로> 그를 대우했다는 말입니다.

 

"but have done to him everything <they wished>."(12)(NIV)

 

한마디로 세례요한의 말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기뻐하는 대로 대했다는 말입니다.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기초는 하나님이 원하는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의 기초는 우리가 그분이 이끄심에 따른 드림입니다.

그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세례요한에 관한 이야기가 끝나면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믿음은 내가 정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만 들립니다.

우리가   하는 것만 보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안보이고 엘리야도 안보이고

예수님도 십자가도 안보입니다.

 

강도 만나 자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주님은 누가 제사장의 이웃이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누가 레위인의 이웃이냐고 묻지 않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화해의 기준은 내가 아닙니다.

사람, 형제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마5:23]

 

 

예수님은 우리의 입장이 아니라 형제의 입장,

강도 만난 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하십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준에서 복음을 이해하고

엘리야를 이해하고

세례요한을 이해하고

십자가와 예수님을 이해합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고

그래서 들리지 않고

그래서 열리지 않습니다.

 

내가 wish 하는 것을 향해 가는 인생의 길을 멈추어야합니다.

그곳에는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입니다.

길이 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진리가 보여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게 하십시오.

복음이 길을 가게 하십시오.

성령이 일어서게 하십시오.

 

성경을 따르고

복음을 따르고

성령을 따르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 바라고 내가 기대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

성경도 안보이고

복음도 안들리고

성령의 인도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환경의 변화만 인생의 목표가 것입니다.

성령!

마음의 변화와 회복입니다.

 

 

 

 * 요하네스버그한인교회에서 선교지를 구역마다 방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올해부터 바뀐 것이 있습니다.

작년에는 구역에서 음식을 준비해 오셨습니다.

점심으로 햄버거나 간단한 점심을 준비해 오셨는데

올해는 구역에서 생각을 바꾸셔서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대접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비용은 구역에서 제공하시고 음식은 각교회 교인들이 준비를 합니다.

그들의 잔치음식으로 그들의 전통음식으로 정성으로 준비하십니다.

 

사랑은 그렇습니다.

나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관계의 기초입니다.

우리는 자꾸 입장에서 그들을 바꾸려합니다.

마음은 바꾸지 않으면서 자꾸 네가(환경) 바꾸라합니다.

 

내가 바꾸지 않는 (환경) 바뀜은 오직 바램을 이루는 것이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환경(사람) 바꾸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인류> <환경> 바꾸기 위해 생명을 걸고

<하나님> 우리의 <마음> 바꾸기 위해 전부를 거십니다.

 

환경입니까 마음입니까?

당신은 무엇을 바꾸기 위해 믿음십니까?

믿음은 마음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