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2- 요단강의 겸손과 변화산의 결단 (마17:1-8)
내 인생에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은 가장 큰 희생을 결단할 때이다.
가장 높은 곳이어서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가장 큰 희생을 결단할 때 하늘은 우리에게 영광의 빛으로 함께하신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린 것은 두 번이다.
한번은 요단강에서
한번은 변화산에서이다.
요단강은 죄 없으신 주님이 죄인의 몸으로 세례를 받으신 것의 결단이고
변화산은 십자가를 지는 결단의 장소다.
그 두 번의 자리에 하늘의 소리와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며 얼굴과 옷이 변화되었다.
인생에 가장 영광스런 시간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결단한 가장 낮은 자리와 가장 높은 자리에서의 헌신이다.
우리에게 요단강과 변화산이 필요하다.
그것은 죄인처럼 되신 주님의 결단이며 십자가를 확증하는 자리이다.
우리는 결단도 확증도 없이 그곳에 초막을 짓고 살고 싶어한다.
가장 영광스러움을 결단도 헌신의 각오도 없이 누리려 한다.
복음의 영광,
<하늘의 영광>은 오직 헌신과 십자가의 결단으로만 찾아온다.
왜 내 인생에 참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왜 내 인생에 내면의 변화와 하늘의 빛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왜 내 인생에 하늘의 소리를 듣지 못하며 하늘의 음성을 듣지 못한가?
요단강의 결단과 십자가의 확증이 없다.
주님은 이 두 곳에서 죄인을 위한 삶,
십자가의 삶을 확증하시러 나아가셨다.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러 나온 자리인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모든 사람을 위한 십자가를 지는 자리인 변화산으로 기도하며 결단하러 나가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헌신 없는 영광이 아니다.
십자가 없는 왕관이 아니다.
자기 희생을 하지 않으면서
불편한 것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좋은 것을 누리려는 악한 심보는 버려야한다.
자기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사람들로부터 영광과 사랑과 존경은 버려야한다.
뭔가 손해 볼 결단을 해야한다.
뭔가 포기할 결단을 해야한다.
그 마음,
그렇게 간 요단강과 변화산의 높은 올라가는 불편함을 수반한 결단이 필요하다.
요단강으로 가시면서,
변화산의 높은 산을 올라가시면서 스스로 다짐하고
스스로 결단하고
스스로 희생하기 위한 마음,
불편한 마음을 수반한 과정이 있어야한다.
시간을 내려하지 않으면서 좋은 사람을 구하고
돈을 내 놓지 않으면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오직 산 위에서만 머물고 싶은 위선이고 악이다.
대충 희생하고
대충 봉사하고
대충 사람을 대하면서 산 위의 영광을 구하는 것은 다 가짜다.
그곳에는 변화된 다른 사람을 보는 기쁨은 있지만
변화된 나로 인한 영광과 감격은 없다.
십자가의 영광은 요단강의 결단과
변화산의 확증으로 시작된다.
죄인들의 아픔에 동참하려는 요단강의 마음과
사람들의 슬픔과 눈물과 아픔을 대신 희생하려는 마음의 결단이 없이는
하늘의 영광은 없다.
다들 산 위의 영광은 원한다.
그러나 요단강을 지나지 않고
변화산으로 나아가는 결단과 희생의 결단은 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얼굴의 광채와 옷이 빛처럼 빛나는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기도 하지만
육체를 입으신 몸으로 그런 영광의 변화를 가진 것은
오직 자기 희생과 십자가의 고난의 결단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집중되게 만드는 이유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순간부터
예수님은 변화산으로 가셨다.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순간부터
예수님은 스스로 변화산의 결단을 각오하셨다 .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알 때
그 때가 희생과 십자가를 질 시간임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살고 싶어한다.
존경받고
대접받고
추앙 받을 때 우리는 초막을 짓고 그곳에서 머물고 싶어한다.
그것이 베드로의 마음이지 우리의 마음이다.
그곳에는 두려움만 남는다.
아무리 좋은 곳에 살아도
신앙의 세계는 <희생>과 <십자가>의 길만이 <평강>이고 <기쁨>이다.
모세와 엘리야이다.
이 두 사람은 죽음과 부활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지팡이로 반석을 친 사람이 모세다.
반석을 쳐서 물이 나온다.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십자가 위의 예수님이다.
평생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하던 엘리야이다.
그가 죽음을 넘어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을 간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가가와 부활을 이야기한다.
언제 우리에게 영광이 임하는가?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 할 때이다.
언제 우리 인생이 가장 영광스러운 은혜를 경험하는가?
십자가와 부활위 위해 살 때이다.
그것을 위해 살 때 영광이 임하고 내면의 빛이 임한다.
지금 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이 가장 재미 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십자가를 말하고 부활을 말하면 가장 재미 없는 설교가 되었다.
전하는 자가 문제가 있는지 아니면 듣는 자가 복, 축복만 듣고 싶은지 모르지만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이야기로 내면과 몸이 영광스럽게 되었다.
우리가 회복할 것은
우리 안에 십자가와 부활을 회복해야한다.
그것이 우리를 영광스럽게하고 우리를 빛나게 하고 우리를 변화시킨다.
그 외의 어떤 것으로도 변화되는 것은 없다.
변화산!
십자가와 부활이다.
아픔은 한국교회는 십자가와 부활이 재미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십자가와 부활은 재미가 아니라 기독교의 전부인데...
예수님의 전부인데…
우리의 전부인데…
십자가와 부활을 빼고 교회를 말할 수 없고
십자가와 부활을 빼고 무슨 영광을 얻으려 하는지
그냥 아픔이고
그냥 눈물이다.
* 십자가와 부활은 내가 누릴수 있는 교회 안이 아닙니다.
내가 신앙의 높은 영적 카타르시스를 얻는 교회 안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
나의 희생과 나눔과 헌신이 있는 곳에서 십자가와 부활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요하네스버그한인교회 11,12구역에서 드롱콥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흑인 음식을 먹고
그들과 함께 집집마다 전도를 하고
가져오신 선물을 나누고
가져온신 헌금으로 전기가 없는 교회에 발전기를 사고
그들과 함께 찬양을 하고 기도하고
같은 말씀으로 함께 마음을 나누며 삶을 나눈 것,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요단강으로 내려가신 주님,
십자가를 지기 위해 산 위로 올라가신 주님!
우리에게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겸손과
산 위로 올라가는 불편함을 감수 할 때 십자가의 꽃과 부활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산 위에서 내려 오셔서 낮은 곳,
전기도 물도 없는 이곳까지 하늘의 영광을 전해주신 구역분들께 다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기독교는 요단강으로 내려가는 겸손과
산 위에서 내려오는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사신 삶의 모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