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산 1 (마17:1-8)
모세는 산 밑에 있는 백성을 위해 시내산을 올라갔습니다.
십계명을 받은 이유는 산 밑에서의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신 것은 변화된 거룩함으로 그곳에서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산 밑으로 내려 오기 위해,
산 밑에서 살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높은 곳에 살기 위해 오릅니다.
내려오지 않고 그 높은 영적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 오릅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한번 오르면 그곳에서 내려오기 싫습니다.
그곳에 초막을 짓고 영적으로 만족하며 살고 싶습니다.
주님이 주목하는 삶은 산 위에서의 삶이 아니라 산 밑에서의 삶입니다.
주님은 내려가기 위해 모세도 만나고 엘리야도 만났습니다.
십자가를 살아내기 위해서
고난과 매 맺음을 살아내기 위해서 모세도 엘리야도 만났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 영원히 살기 위해,
불편하고 귀찮은 사람들과 헤어지고
보기 싫은 사람을 안 만나고
매 맞고 힘든 십자가를 피하기 위해 그곳에 초막을 짓고싶습니다.
산 위가 목적입니까 산 밑이 목적입니까?
내려 가기 위해 사는 사람은 소리가 두려움이고
오르기 위한 사람에게는 소리가 위로입니다.
이 땅에 오셔서 요단강에서 사람으로 죄인의 몸으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고 소리가 있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
십자가의 길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다시 산에 올랐습니다.
내려가기 위해서 산을 올랐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소리가 있었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라"
산 위가 인생의 목표이면 그 소리는 <두려움>이고
산 밑이 인생의 방향이면 그 소리는 <능력>입니다.
같은 소리가 누구에게는 두려움이고 누구에게는 능력이며 위로이며 힘입니다.
"제자들이 듣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니"(17:6)
아무리 영적 체험을 많이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깊은 체험을 해도
인생의 목표가 <산 위>라면 그 모든 것은 자기 만족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얼굴이 광채가 나고 옷이 빛처럼 희어진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영광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렇게 변화된 것은 시내산에서의 삶이 아닙니다.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산 밑에서의 백성들과의 현실적 삶입니다.
예수님의 변화산의 변화는 자신의 영적 깊이와 수준을 증명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살아내기 위한 하나님의 임재와 결단입니다.
그 결단,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 밑에서 더더욱 말씀으로 살기 위한 결단이
바로 산 위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내려 오기 위해서 산 위가 필요합니다.
수 많은 영적 대가들이 산 위에서 깊은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산 밑에서의 치열한 십자가의 행진이 없는 산 위에서의 삶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고 난 후 부활할 때까지 이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명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에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17:9)
예수님은 산 위에서의 삶은
십자가로 증명하고 싶으십니다.
어떤 깊은 영적 변화와 체험도 그것으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확증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는 것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믿음의 삶과 현실이 그 체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을 깨닫고
아무리 영적으로 깊은 체험을 하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영적 비밀과 하나님과 깊은 영적 비밀이 있다해도
그것은 십자가의 삶으로 증명되어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수 많은 영적 고수들이 무림에서
갈고 닦은 영적 능력을 전파합니다.
그러데 산 위에서 안 내려오려합니다.
자기가 얻은 영적 체험을 산 위에서만 가지려합니다.
말로만 전하고 말로만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살아 내야하는 산 밑에서의 삶으로
십자가의 방향으로의 삶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부자 청년,
예수님을 만났던 니고데모
예수님을 만났던 깊은 영적 체험을 원했던 사람들은
한가지 목표는 이루었습니다.
영적 깊은 진리를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영생을 얻는지 물었던 두 사람 모두 그것을 예수님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산 위에서의 삶,
깊은 영적 진리는 아는 것이 단순한 목표였기에
산 밑에서의 삶,
네가 가진 것으로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는 말씀은 살아내지 못합니다
산 위에서의 삶,
모르던 진리를 알고 그렇게 바라던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깊은 영적 은혜를 누리는 것이 목표이면
정작 예수님이 원하시는 산 밑에서의 삶은 절대 살아내지 못합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산 위에서의 삶을 갈망합니다.
찬양의 깊이와 은혜를 사모합니다.
말씀의 꿀송이처럼 단 은혜를 사모합니다.
기도의 체험과 능력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다 산 위에서의 삶입니다.
그것을 경험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곳에 초막 셋을 짓고 싶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고 싶습니다.
어렵습니다.
산 밑에서의 삶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고 초라하고 구차한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고
외면 당하고
무시 당하고
육체적 피곤과 무기력과 의미 없는 삶처럼 보이는 산 밑에서의 삶,
눈물 없이는 보지 못하는 아픔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적 변화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깊은 사람이고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놀라운 체험을 했는지로 자신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우리는 오직 십자가로만 증명하는 것입니다.
산 밑에서의 삶,
그것이 우리가 우리를 증명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증명하는 길입니다.
깊은 체험을 할수록
더 낮은 곳에서 자신을 증명해야합니다.
깊은 체험을 하고
세상적으로 높아질 자격을 갖출수록
더 낮은 사람들과 함께 지낼수 있는 산 밑에서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모세의 신앙의 목표는 자신의 영적 변화가 아니라
십계명을 통해 백성들의 영적 변화입니다.
예수님의 변화산의 체험은 자신의 영적변화가 본질이 아니라
산 밑에 있는 사람들의 변화입니다.
나의 변화가 목적인 사람은 그 변화산의 변화를 이용할 것입니다.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위해
자신이 존경받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한 방편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산 밑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이 목적이면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야합니다.
계속 산 위에서 살고 싶은 그 마음을 버리고
산 밑에서 그들의 영적 변화를 위해 나의 십자가를 져야합니다.
우리가 다시 산을 내려가야하는 이유는
나를 통해 세워질 사람이 있어서입니다.
겨우 나만 세우고
겨우 나만 부자가 되고
겨우 나만 영적 체험에 잠겨서 사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아닙니다.
산 밑에서의 삶,
변화산의 변화는 산 밑에서 길을 잃은 수 많은 영혼을 위한
현실에서의 나의 발걸음을 하나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산 위가 목적지입니까 산 밑이 목적지입니까?
변화산!
산 밑의 삶을 위한 모세의 십계명입니다.
오직 산 밑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제 2의 파송의 장소>입니다.
* 꽃이 목적입니까?
내 인생의 영적 꽃을 피우는 것이 목적입니까?
아닙니다.
꽃이 목적이면 자기로 끝입니다.
꽃의 목적은 열매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온 세상에 퍼뜨리기 위해 오직 열매가 목적입니다.
영적 깊은 체험의 목적은 산 밑,
꽃이 지고 열매가 맺혀
그 열매 속의 씨앗을 통해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꽃의 열광만 취한다면 우리는 끝입니다.
사역의 끝은 내 영광의 사역이 아니라
사역의 끝은 열매를 맺고 씨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 씨는 내가 피운 변화산에서의 영적 체험이 아니라
그 영적 체험인 꽃의 영광을 지나 씨를 다시 날려 보내기 위해
내가 그 씨를 위해 져야하는 것입니다.
내 영광의 꽃이 지지 않는 곳에서는 나의 영광으로 끝이지
다시 하나의 씨앗을 통해 수 백, 수천의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산 위에서의 꽃으로서의 영광이 목적이 아닙니다.
씨를 통한 온 세상에 아름다운 복음의 또다른 꽃을 피우는 것이 목적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알기에
자신의 꽃으로서의 영광을 숨기고
오직 생명의 씨를 뿌리는 산 밑에서의 삶을 선택하셔서
내려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내 꽃,
내 영적 영광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진짜 영광은 꽃이 아니라 씨입니다.
그 영광을 알기에 담벼락 옆에 핀 이 작은 꽃도
꽃의 영광을 버리고 씨를 맺을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참 영광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변화산!
<꽃>이 아니라 <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