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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신앙

물방울 신앙

 

 

 

 

 

 

 

 

 

 

 

물방울 신앙(16:1-12)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16:1)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사용한 바로 단어가

오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한 단어가 똑같은 단어입니다.

 

사람이 시험하는 단어와

사단이 시험한 단어가 같은 단어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사람은 주님을 시험하며

주님의 사람들을 시험합니다.

 

사단은 사람을 통해 주님의 사람들을 시험합니다.

시험이 주님을 시험하는 시험과 같은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복음을 향하여 시험합니다.

 

귀신처럼 도깨비처럼 나타나서 우리를 시험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통해 시험합니다.

그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우리를 시험합니다.

 

 

 

둘째, 표적을 구합니다.

 

마귀는 사람을 통해 우리를 시험하는데 시험의 내용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표적>입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것은 표적입니다.

돌이 떡이 되게 하는 시험,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 다치지 않는 시험,

세상의 영광과 부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직 표적입니다.

세상은 오직 표적으로 말합니다.

표적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표적만이 세상은 대화에 끼어주려합니다.

표적만이 사람취급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사람이 이루지 못할 능력을 보여주고

꼴등에서 일등이 되고

사람들이 우러러볼 업적과 학력과 능력을 표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이 예수님에게 시험했던 것은 바로 표적입니다.

너를 증명하라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네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표적을 통해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속습니다.

자꾸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됨을 증명하려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우리 자녀가 세상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을 증명하려 하고

나의 사업이 잘되어서 세상에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려 하고

내가 하는 일마다 돌이 떡이 되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것에 속아서 평생 <표적> 좇다가 인생을 보냅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님은 표적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마귀에게 배운 악하고 음란한 것이 우리의 마음에 남아서

예수를 믿는 순간 <표적을 구하는 인생> 되어버립니다.

 

이런 세대를 향하여 주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말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16:4)

 

 

평생 예수를 믿으면서 표적만 구하는 인생이 아닙니까?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듯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듯이

같은 단어로 예수님을 마귀처럼 시험하는 인생이 우리 아닙니까?

 

돌이 떡이 되는 표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마귀가 시험하고 세상 사람이 시험하는

그것도 가장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인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시험한 것은

바로 배부터 불러지는 축복의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배부터 불러라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먼저 너부터 되는 복을 증명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생 이것에 속아서 살아왔습니다.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을 누구보다 믿는 사람들로부터 들었던

표적을 구하는 신앙!

그것이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특징입니다.

 

우리의 잘됨은 표적이 아니라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함께함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흙인 존재가 영원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로부터 자꾸 표적을 보여줘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세상보다 악하고 음란한 모습으로

주님께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표적보다 영원이 가치있지 않습니까?

표적보다 하나님의 함께함이 가장 소중하지 않습니까?

표적보다 성령의 마르지 않는 생수가 축복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세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

눈에 보이지 않는 평안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보다

눈에 보이는 표적을 구하는 인생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표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느냐

표적이 없는 어떻게 하나님이 살아계신것을 믿느냐?

 

주님은 마귀의 시험때도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시험때도 동일하게 보여준 표적은

자신의 죽음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16:4)

 

오직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죽음으로 증명하십니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그분의 백성을 위해 죽을 있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

오직 표적만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의 표적은 자신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사십일 광야에서도

오늘도 표적으로 말씀하지 않고 자신의 희생으로 말씀하십니다.

 

누가 그렇게 있나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대화 이후에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이야기 하십니다.

사천명이 먹고 남은 빵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것때문에 고민을 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하여 한마디 하십니다.

어찌하여 믿음이 적으냐?

 

"예수께서 아시고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16:8)

 

우리는 자꾸 돌로 떡을 만든 표적에 연연합니다.

오병이어에서 표적을 보고

칠병이어에서 기적을 보고

자꾸 떡에 연연합니다.

 

떡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습니다.

떡이 아니라 죽음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그리스도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나아가 제자들까지도

돌이 떡이 된것 같은 떡과 표적에 전부를 겁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나아가라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자는

표적에 목숨을 걸지 않고

삶으로,

생명으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세상에 표적은 끝이 없습니다.

하나를 얻으면 열을 원하고

열을 얻으면 백을 원합니다.

 

세상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의 끝은 자신의 드림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셋째, 자기만의 가르침과 노하우가 있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16:2)

 

사람들이 프로그램을 좇아가고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좇아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표적> 얻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십니다.

누룩은 그들의 교훈입니다.

그들만의 가르침입니다.

그들만의 노하우입니다.

그들만의 비법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를 자꾸 표적을 구하게합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상에서 주님이 주실 있는 것은 표적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요나의 표적,

오직 자신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라

표적으로 말하려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신앙에 대해서 세상에 표적을 보여준  

표적의 사람들의 가르침과 노하우를 조심해야합니다.

 

 

주님은 오늘 그들의 교훈을 조심하라하십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 주는 유일한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 세상보다 더한 표적을 좇은 인생이 되어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맛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물이 없어서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하나님을 시험한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출17:7]

 

물이 없어서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물을 주는지 않주는지 보자고 했습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표적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명하는 ,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시험한 바로 시험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신앙!

마귀의 시험입니다.

 

예수를 평생 믿으면서 평생 표적을 구합니다.

직장을 걸고 표적을 구하고

자녀를 걸고 표적을 구하고

자리를 걸고 표적을 구하고

경제적인 문제를 걸고 표적을 구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시험과 같은 시험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빵을 두고,

돌이 변하여 빵이 표적에 미련을 두는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믿음이 적은 제자들,

믿음이 적은 제자들이 가장 넘어가는 문제,,,

바로 표적 신앙입니다.

표적을 구하는 인생입니다.

표적에 미련을 두는 신자입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본격적으로 주님은 요나의 표적을 이제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16:16 위대한 고백입니다.

십자가와 고난,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하십니다.

 

 

악하고 음라한 세상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빵의 논리,

표적의 논리로 살지 않고

오직 성령안에서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임을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논리,

황제의 논리,

빵의 논리의 절정인 가이샤라 빌립보의 거대한 도시에서

너는 나를 누구라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자

주님은 그때부터 자신의 죽으심과 고난과 십자가를 말씀하기 시작하십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16:21)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알게한 때부터입니다.

그리스도가 드러나자 고난을 받고 죽임 당하고 부활 것을 비로소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주님의 제자이고

하나님의 사람임이 비로서 나타날 때부터 우리가 일은

고난 받고 십자가와 함께 죽고

그리고 부활의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마귀가 시험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시험한 표적을 구하는 인생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자꾸 말에 넘어갑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계십니다."

말이 우리 인생에 부으시는 축복의 <표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열두 제자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과 계획으로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거의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고 죽음으로 자신의

제자됨을 증명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주의해야합니다.

그들의 노하우와 가르침을 주의해야합니다.

 

복음은 노하우와 가르침을 통한 세상에 증명할 표적에 있지 않고

오직 주님과 함께 남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는 것입니다.

 

아직도 표적을 구하는 인생으로 사십니까?

십자가와 함께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 살면 진짜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진짜 천국을 경험하고 평안을 경험하고 하나님과 함께함을 경험합니다.

 

세상의 교훈에,

마귀의 누룩에 꾀여 지금도 여전히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 때문에

많은 주님의 제자들이 빵에 미련을 못버리고 있습니다.

표적에 미련을 못버리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16:7)

 

<표적> 아닙니다.

표적은 오직 <십자가 고난> 몸에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믿음의 사람,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표적입니다.

 

 

 

 

   * 표적을 구하는 인생!

물방울입니다.

아무리 크고 이뻐도 그냥 물방울

바람에 날리고 순간 터져버리는 물방울입니다.

 

이것이 이쁘다고 놀랍다고 좋다고 좇아다니는 어린아이같은 모습이 우리입니다.

실상을 봐야합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으로 우리의 신앙이 병들어갑니다.

아픔입니다.

눈물입니다.

 

성령의 길은 우리를 자꾸 십자가에 죽게합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그분이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죽지 않고 자꾸 물방울만 좇아가니

열심히 살아도 허무고

최선을 다해도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피었다 지는 물방울이 아니라

성령의 그루터기에 씨앗을 맺고 열매를 맺는

성령의 나무가 되어

성령의 열매가 가득한 신앙이기를 기도해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