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내 인생(마15:21-28)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조건이 있습니다.
그건 <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예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난 같이
자기의 모자람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상대하는 사람은 조금 모자란 사람이 아니라
많이 모자란 사람입니다.
오늘 두로와 시돈 지방을 들어가시는데 한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들려 죽게 되었사오니 살려달라고 합니다.
첫째, 이 여인은 <개>처럼 좇아갑니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예수님이 아는체도 안합니다.
대답도 안합니다.
여인은 끝까지 좇아갑니다.
이 여인은 두로와 시돈 지방 사람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예수님이 심판을 이야기 할 때 단골로 나오는 도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11:22)
두로와 시돈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배제된 지역입니다.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아다니십니다.
그래서 이 여인에게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15:24)
그런데 여인은 포기하기 않습니다.
개처럼 계속 좇아갑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예수님만이 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개처럼 좇아가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예수님 만이 답이라고 여기면 무조건 좇아갑니다.
무시하는 수모와 외면하는 자존심 상함과 사람들의 눈총을 이깁니다.
우리는 <문제>보다 <답>이 커보여야합니다.
우리가 개처럼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답이 커 보이지 않고 문제가 자꾸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커 보이면 나타나는 증상은 바로 영적 무기력, 영적 게으름입니다.
거기에 가봐야 소용이 없다라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답보다 문제가 커 보여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잘못 씁니다.
문제가 커 보일수록 답이 크게 보여야하는데
문제가 커 보일수록 포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를 키우는 사람이 있고 답을 키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를 키우는 사람은 문제를 키워서 자신의 무능함에 빠지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머물러 삽니다.
문제가 크니 자신이 작아 보입니다.
그 작아 보이는 자신을 통해 답이신 그리스도가 명확하고 선명하게 보여야하는데
우리는 자꾸 문제에만 집착합니다.
아이가 귀신에 들릴수록 우리는 답이신 그리스도를 좇아가야합니다.
여인은 자신의 아이가 문제가 크게 보일수록
답이신 예수님을 개처럼 계속 좇아갑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답>이 커 보여서입니다.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답을 좇아가지 않습니다.
문제에 빠져서 문제를 붙들고 문제를 문제 삼아서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많은 문제여도 답이 있으면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여인은 예수님도 상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둘째, 자신을 개처럼 여깁니다.
이미 여인은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상대하지 않는 개 같은 존재라는 것을요.
이방인들을 생각하는 유대인의 모든 사람은 이방인과 상종도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방인을 개처럼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15:26)
그런데 여인이 고민도 하지 않고 답합니다.
나는 <개>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15:27)
이미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올 때 자신이 이방인이고
개 같은 인생임을 알고 나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니
은혜를 달라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주님이 개처럼 여기는 이방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는 원래 <개 같은 인생>입니다.
이런 고백의 기초가 없이는 우리에게 은혜가 없습니다.
개 같은 인생이라는 자기 정체성이 없이는 결코 주님과 만나 은혜를 입지 못합니다.
개 같은 인생인데
주인처럼 살았습니다.
개 같은 인생인데
주인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주님을 만났는데 여전히 주인인줄 알고 천지도 모르고
설쳐대고 있는 것이 우리입니다.
주님이 개라고 하는데
나는 주인이라고
나는 왕이라고
나는 뭔가 있다라고 여기고 살면
주님은 우리를 상대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개라고 하는데
우리는 사람들 앞에 뭔가 있어 보이려하고
주님이 개라고 하는데
우리는 사람들 앞에 자랑하고 멋을 내고 떳떳하게 살아갑니다.
주님이 상대하지 않던
유대인들의 식탁에는 끼지도 못하던
그런 존재가 우리였는데
이제는 좀 먹고 산다고 주인인줄 알고
이제는 좀 먹고 산다고 주인보다 더 주인처럼 살아갑니다.
개처럼 여겨야합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그 은혜를 달라는 가난함과 겸손한 마음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개 만도 못한 사람이었는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르러기라도 먹는 개와 같이 여겨주시는 것도
감사한 일입니다.
개만도 못한 자가
개처럼 은혜를 베푸시고
개로 여겼는데
그분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백성도 감사한데
그분의 친구로 부르시고
친구도 감격인데
그분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개로 살던
자녀로 살던
개만도 못한 시절을 잊어서는 안되는데
자꾸 잊어버립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무시하면 개 같은 인생이
주인인것처럼 화가나고
좀더 가진 사람 좀더 잘난 사람을 보면
개 같이 아무것도 없이 부스러기면 감사한 마음으로 살던 때를 잊어버리고
없는 것, 더 가질것 생각하고
주님 앞에 엎드리지 못하고
사람 앞에 겸손하지 못한 정말 개 같은 인생이 다시 되었습니다.
개보다 못한 인생이었는데 말입니다.
주님이 인정한 개 같은 인생인데 말입니다.
셋째, 주인을 알아봅니다.
개도 사랑을 받는 비결은 주인을 알아볼 때입니다.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개는 버리든지 죽여버립니다.
여인이 은혜를 입은 것은 주인을 알아봐서입니다.
다른 곳에 가지 않고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지 않고
답이 크게 보여 오직 그 답의 키를 들고 있는 주인을 목숨 걸고 따라온 것입니다.
좀 먹고 산다고 우리는 주인을 잊어 버립니다.
주인을 위해 좀 수고하라고하면 얼굴이 금방 찡그려집니다.
주인이 보낸 다른 사람을 좀 섬기라고 하면 금방 자존심 상해합니다.
주인이 필요하니
나귀를 달라고 하고
가진 오병이어를 달라고 하고
가진 짐 보따리를 풀어라 하고
가진 돈을 좀 달라고 하면 우리는 주인을 바꾸어버립니다.
주인을 물어버리고
주인이 보낸 친구를 물어버리고
주인의 심부름 보낸 사역자를 욕하고
주인이 보낸 그분의 사람들을 만나지 않습니다.
주인인데 말입니다.
나는 개인데 말입니다.
아니 개만도 못한 인생인데 말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주님도 찾아가지 않던 이방인 버린 받은 개 같은 인생인데 말입니다.
은혜로 개 같은 인생이 주님의 친 백성이 되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의 친구가 되었는데
우리는 자꾸 내가 주인인줄로 착각하고 주인을 물려고하고
주인을 향하여 짖으려고합니다.
주인의 친구들,
주인의 다른 아들 딸들을 무시하고
주인의 다른 손님들을 모른체하고 급기야 물어 버리기까지합니다.
그래서 개인지 모르겠습니다.
주인의 은덕도 모르는 개 말입니다.
개 같은 인생이 되지 않아야겠습니다.
개 만도 못한 인생으로 여겨야겠습니다.
개 같은 인생을 가끔 만납니다.
그 개 같은 인생도 나 보다 나은 개입니다.
나는 개 만도 못한 인생이었기에…
주님이 오늘 나를 향하여 개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개 입니다.
그러나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고 좋으니
그 은혜도 감사한 것이
개 만도 못한 인생의 복입니다.
개라도 여겨주시니 감사한 일이지요.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개 만도 못한 인생
주인의 백성이 되고
주인의 친구가 되고
주인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개 같은 인생이 변했습니다.
개 팔자가 상팔자가 되었습니다.
개도 답을 좇아가면
개도 개라고 여기고
주인을 좇아가면
이런 날이
이런 축복이 있는 것!
그냥 축복입니다.
그냥 은혜입니다.
저는 그것을 <개 집에도 볕 뜨는 은혜>라고 말합니다.
개 같은 인생인데 말입니다.
* 한인교회 3,4 구역에서 오기스 교회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개척을 진행하는 이라크교회를 위해 펜스 세우는 것과 앰프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귀한 음식으로 성도들을 먹이시고 간식과 기념품도 준비하셨습니다.
마치고 개척할 이라크교회 지역을 다니면 전도를 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시며 그들의 비참한 삶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우리의 지난 수십년 전보다 더 못한 그들의 삶에
어떻게 더 도와야할지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기도 물도 없는 그곳에 구역성도들을 통해 희망을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시절 전쟁을 통해 소망 없던 그곳에
주님만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교회에 전부를 걸고 살았던
우리들의 신앙의 부모님들로인해 한국교회가 한국이
이렇게 나누어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개만도 못한 인생이지만
오직 주님만 붙들고 살던 그 시절이 차라리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고 미래가 있었습니다.
기쁨이 있었습니다.
직장 때문에 사업때문에 아프리카를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지 못하고 주님의 일에 소홀한 자신들을 반성하시는 모습에
함께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망하게 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보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프리카를 통해 기쁨을 주기 위해 여기에 보내셨는데
그 기쁨을 너무 많이 포기하고 외면하고 살았던 삶입니다.
주님은 결코 우리를 죽이기 위해 이런 곳에 세우지 않았습니다.
다시 기쁨을 회복하시고 다시 즐거움을 주시기 위해
여기에 세우셨습니다.
개처럼 일만하다
개처럼 평생 개 집하나 지키려고 여기에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개 취급받던 이방인들을 통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는 놀라운 희망과 꿈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이곳 아프리카에 세우셨습니다.
이 소망이 이 희망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