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탄식(마15:1-20)
열심이 없는 사람은 절대 이단이 되지 않습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절대 교회를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책망을 받는 사람은 열심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계명을 더 붙여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향하여 마음이 없다고 하십니다.
입술로만 나를 존경한다고 하십니다.
내게 마음이 없다는 것은 다른 말로 열정이 많다, 열심이 많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거꾸로 생각합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15:8)
무엇에 대하여 열심이며
무엇에 대하여 열정적입니까?
자기가 정한 기준입니다.
<자기 기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내 백성이 입술로만 나를 존경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정한 기준,
예수님이 원하는 길과 방법이 아니라
사람이 정한 방법과 사람이 정한 기준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입술로만 나를 존경하고 마음은 내게서 멀다는 것입니다.
열심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열정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입술로 나를 존경한다는 것은
다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을 믿는 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열심에 최강이고 열정적인 교인으로 가장 조심해야 하는 한가지를 기억해야합니다.
우리의 열심의 근거가 과연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하는 것인가입니다.
목사는 적어도 이래야되고
장로는 적어도 이정도는 되야되고
교회는 적어도 이래야 된다는 행위론적 열심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망칩니다.
우리를 살린 것은 율법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공로도 의로움도 열심도 아니고 오직 그분의 용서와 십자가 사랑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신앙의 근거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입고 우리는 다시 주섬주섬 열심의 옷을 입고
의로움의 칼을 들고
공로의 방패로 사람들과 싸울 준비를 합니다.
자기를 내 세울 기회를 잡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길은 없고 다 자기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사람을 제단하고 사람을 인도합니다.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15:14)
열심이 없어서 잘 못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잘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하는데 그 근거가 자기 기준이어서 소경입니다.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 때문에 부모님께 소홀한 것은 우리도 모르게 들어온
자기 기준입니다.
이런 기준들이 우리에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소경입니다.
그래서 둘다 빠져 죽는 것입니다.
부모가 그러니 자녀도 망하고
남편이 그러니 아내도 망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기준은 없고 오직 내 기준으로 신앙생활을합니다.
열심히 하지 않으려 작정하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열심히 해 보려고
다 하나님을 잘 믿어 보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길과 기준과 방법은 모르니 다 자기 기준이 왕도가 됩니다.
우리는 이단을 욕합니다.
이단들의 잘못된 신앙을 욕합니다.
그런데 기억해야합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잘못된 열심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에 잘못된 많은 기준들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의 법을 두고 말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십니다.
씻지 않고 먹는 제자들을 책망하기 위해 멀리 예루살렘에서 온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15:11)
우리는 형식에 전부를 걸고 살아갑니다.
좋은 모양을 유지하기 위해 신앙의 많은 부분을 투자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주님은 그런 외형적인 형식보다 마음에서 나와 입술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고 그 본질을 설명하십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15:18)
마음입니다.
우리는 마음 관리를 하지 않고 외형 관리에 너무 많은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목사는 이정도 학벌이어야하고
장로는 이정도 부자여야하고
권사는 이정도 일을 해야하고…
그런데 정작 마음은 어떠하고
어떤 마음과 심령으로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없고
그것을 보는 눈도 그것을 표현하는 훈련도 받지 못합니다.
다 외형적 기준,
입으로 들어가는
손을 씻지 않고 먹으면 안된다는 그런 외형적 기준에 우리의 눈은
전부를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눈으로 보기에 기준 미달의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절대로 그런 외형적인 것에 치우치지 못하도록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갈릴리 사람들,
선한 것이 없는 사람들속에 예수님 자신도 사셨습니다.
살인자들,
죄인들,
창기들,
세리들과 같이 어울리신 주님은 그런 외형적인 것에 전부를 거는
우리를 향한 경고인데도 우리는 구원의 옷을 입기 전에는
그것이 감격이고 감사지만
일단 구원의 감격을 지나고 나면 다시
벗었던 옷을 입습니다.
이 정도는 되야 목사고
이 정도는 되야 장로고
이 정도는 되야 일군이고…
외형입니다.
외형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세상의 모든 악한 것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15:19)
성령이 어디에 계십니까?
율법은 돌비에 세긴 법입니다.
성령은 어디에 계십니까?
마음입니다.
심비에 세긴 법입니다.
성령의 법은 <마음>입니다.
성령은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주관하십니다.
마음에 있는 성령의 법을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늘 외형,
자기 기준에 외형을 판단하고 외형이 기준의 전부가 되어 살아가게됩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곳에서 우리 기준의 전부가 되십니다.
사람이 세운 계명이 아니라
성령이 세운 계명인 성령의 법을 따르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시대가 발전하고 교회가 성장할수록
우리는 처음 그 마음을 잊어버립니다.
처음 성령께서 마음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따르며 순종하던 법을 잊어버립니다.
처음은 좋았는데
시간이 갈 수록 자꾸 사람의 계명이 마음을 차지합니다.
사람이 세운 기준,
사람이 만든 법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 법이 우리를 이끌어 갈수록 우리는 허전함이 더하고
우리 마음의 외로움이 더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다른 어디도 아닌 우리의 마음에 오셨습니다.
성령이 기준이 되지 않고
성령의 이끄시는 마음이 기준이 되지 않는 모든 것은 악이 됩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각자 해야할 일을 각자의 마음속에서 감동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기준으로 그 성령의 감동을 차단하고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계명으로 사람의 유전으로 사람의 일들은 외형적으로 잘 되지만
정작 영혼의 울림과 영혼의 역사와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지는 아름다운 역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다 자기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사기는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사는 시대를 기록했습니다.
마음이 먼 것은 열심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는 것은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들의 유전은 목숨걸고 지키고 작은것 하나 어기니
그먼 예루살렘에서 시골 촌 구석까지 찾아와 책망하는 뜨거운 열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기준을 내려놓고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에서 들리는 소리와 감동이
우리의 유일한 기준인 것을 알지 못하는 모든 신앙의 삶과 열심은
사람을 더럽게하는 것일 뿐입니다.
성령이 마음에 거하시는 것이 왜 그런지 이유를 알아야합니다.
은혜받고
구원 받은 감동을 또 자기 기준의 칼날을 들고 돌아다니면
가는 곳마다 사람을 아프게하고 상처받게 하고 사람을 죽입니다.
성령의 감동,
마음에 거하시는 성령의 기준을 따르셔야합니다.
그 음성을 듣지 못하고 움직이는 모든 것은 자기 기준입니다.
이 세상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사는 세상입니다.
전부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람이 하나님과 더불어 하는 길은
각 사람의 마음에 임하신 성령의 기준에 나를 ?추어 살 때
그 때 사람을 살리고 내 삶을 거룩으로 인도하며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마음입니다.
마음으로 성령의 기준,
성령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해야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내 기준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순간 선물로 주신 성령의 음성과 감동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예순님의 삶은 바로 그 성령께 자신의 전부를 맡기신 삶인데
우리는 자꾸 예수님의 기적만 보이고
병고침만 보이고
축복만 보이니
성령께 순복하고
내 마음에서 뜨겁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외면합니다.
우리가 회복할 것은
회개도 아닙니다.
1906년의 대 부흥은 회개가 아닙니다.
작은 한 선교사의(하디선교사) 마음속에 주시는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의 마음을 드린 결과입니다.
회개를 하기 위해 성령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이끄시면 회개도 주십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성령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내 마음을 드리면 열매는 성령이 맺으십니다.
사역을 잘 하기 위해 성령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마음을 따라가면 사역은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목숨을 다해 싸워야 하는 것은
내 기준과 성령의 기준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죄로부터 왔습니다.
그 죄의 본성은 자기 기준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삶입니다.
그 전쟁터에
성령이 오셔서 수없이 빗발치는 총알과 포탄 속에
오직 성령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 우리가 이뤄야 할 삶입니다.
천국의 삶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세운 기준으로 오늘도 세상의 전쟁터 한 가운데서
자기 의로 옷입고
공로의 방패를 들고
의로움의 칼을 들고 서 있습니다.
이미 진 싸움인데…
그래서 성령인데…
그래서 마음에 오신 성령이신데…
내 기준을 버려야합니다.
사람의 계명을 버려야합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마음을 따르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으면
살며시 들어온 사람의 계명이 다시 우리를 스스로 왕으로 세웁니다.
자기 기준!
그것을 없애기 위해 성령은 지금 내 마음에서 말씀하시고
감동하시고 이끄십니다.
내 마음이 아니라 성령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내 안에 있는,
그것이 기준이 될 때 우리는 천국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 설교를 마치면 늘 말씀에 반응하도록 성도를 초청합니다.
오기스 교회 몇 명의 성도들이 말씀에 반응하고 자신을 주님께 드리면서 앞으로 나옵니다.
한 자매가 끊이지 않는 통곡으로 일어나질 못합니다.
성령께서 자신을 쳐 복종시키는 통회와 눈물과 아픔의 소리가 온 교회당을 채웁니다.
십 여분 이어진 소리에 우리 모두 눈물을 흘립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성령과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자기 기준이 이기면 우리는 입술만 하나님을 믿고
성령의 마음을 따르면 우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신앙은 오직 성령을 따르느냐 나의 기준을 따르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다른 곳이 아닌 내 마음에 거하십니다.
내가 기준되지 않도록
천국의 삶을 날마다 순간마다 살도록…
그 비밀을 알고 사는 사람이 몇 없습니다.
아픔입니다.
성령의 탄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