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촉해야합니다 (마14:22-36)
우리와 예수님의 차이는
우리는 큰 일을 치르고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어하고
예수님은 큰 일을 치르고 혼자 있고 싶어하십니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
남자만 오천 아이와 여자까지 합치면 그 수는 배가 더할 숫자인데
오병이어의 기적을 마치고 이번에는 제자들을 재촉해서 배를 태워 보내버립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14:22)
그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이 직접 보내시고
제자들은 재촉해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산으로 가셔서 홀로 계십니다.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23)
사람은 본능적으로 큰 능력을 드러내고
유명해지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면 사람들 사이에 있고 싶어합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왕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다른 곳에서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은 홀로 산으로 가시든지 홀로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도 보내버립니다.
이유는 사람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전한 사람은 바로 <제자들>입니다.
주님도 홀로 가시고 제자들도 홀로 가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들이 왕을 삼으려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6:15)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하며 가장 조심한 것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앞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왕을 삼으려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제자들도 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혼자 떠나던 예수님은 제자들도 재촉해서 보내버립니다.
사람은 그렇습니다.
주인공이 되고
놀라운 일을 치고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세상이 주인공을 만듭니다.
왕을 만듭니다.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이런 일들이 자꾸 많아지자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말하고 죽음을 말해도
예수님을 호통치고 말리고
급기야 십자가 죽음을 말하자마자 예수님 우편이나 좌편 자리를 말합니다.
이 마음은 번져서 제자들의 어머니까지 나와서 합세합니다.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엇을 원하느뇨 가로되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20:20-21)
이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바로 나온 일입니다.
사람이 기적을 경험하고
그 기적의 중심에 서게되면 본인이 아무리 잘하려해도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임금이 되고
주인공이 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권력의 중심에 있게됩니다.
오병이어 사건이나
이 일 후에 바다위를 걷는 일이나
그리고 바다를 건너 게네사렛에서 수 없는 기적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입니다.
그런데 그 일로 제자들이 자꾸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적의 현장에서 빨리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스스로도 기적후에 늘 홀로 계시기를 택하셨습니다.
세상입니다.
세상은 남다른 힘을 가지면 자꾸 왕을 만드려고합니다.
조금 말재주가 있고
글재주가 있고
사람을 모으는 재주나
어떤 특별한 재주가 있으면 자꾸 세상의 중심에 세우려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재촉>하여 변방으로,
산으로,
광야로 가십니다.
스스로도 가시지만
오늘 기적의 한 가운데 있던 제자들도,
빵을 직접 나눠주던 제자들도 재촉하여
사람이 오지 못하는 바다로 배를 타고 보내버리십니다.
왜 제자들을 배를 타고 바다로 보내실까요?
첫째, 기적의 현장에서 벗어나야 주인공 의식을 없앨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도 늘 그러했습니다.
오늘은 제자들이 빵을 나누고 물고기를 나누었습니다.
기적의 주인공의 자리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우러러보고 와~하고 감탄을 할 자리에 있습니다.
그때 재촉하여 보내시는 주님을 봐야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오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아갑니다.
높아지고 일을 잘하고 인정받고 주목 받는 것에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주님은 죽기 위해서 살고
기적의 현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재촉하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빵과 고기를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기적의 주인공으로 살게 하신분이 주님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주신 것을 나누어주는 자임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재촉하심을 통해 역으로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람을 보내시고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바다로 보내십니다.
우리는 자꾸 주목 받는 자리에 서고 싶습니다.
저도 그렇하고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합니다.
또 주님은 때가 되면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름이 목적이 아니라 재촉하여 그 기적의 자리에서
서둘러 내려오기를 명하십니다.
주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조금만 기회만 생기면
주님의 자리를 넘보려고 한다는 것을요.
제자이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주님의 일을 가장 가까이서 수종드는 제자들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재촉하여 내려와야합니다.
잘못하면
우리는 세상과 손을 잡습니다.
정치와 손을 잡고
세상의 힘과 손을 잡고
돈 많은 사람과 힘을 잡습니다.
정치는 기적의 주인공인 제자들,
주님 때문에 사람이 모이고
기적이 일어나는 수종드는 제자들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는 것이 정치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돈을 이용해 제자들을 통해서 이름을 내고 싶어합니다.
이름을 내는 것이 목적이지
돈을 통해 선한 일을 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합니다.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입니다.
주님을 이용해 정치와 이름과 돈을 가지려합니다.
주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악이 늘 그렇게 우리를 이용합니다.
주님은 재촉하십니다.
더더욱 기적을 경험한 제자들이기에
힘과 권력의 중심에 있는 제자들이기에
사람들의 중심자리,
변두리가 아니라 중심에 주목을 받음을 알기에
서둘러 재촉하여 배를 태워 바다로 보내버리십니다.
아담이 힘들때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잘 나가는 자리,
가장 인정 받고 누릴 것을 다 누리는 시간에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아끼십니다.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주목 받는 자리가 아니라
폭풍치는 바다로 보내버리십니다.
둘째, 우리의 무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주님이 제자들을 배를 태워 바다로 보냈습니다.
낮에 기적을 베푸신 주님이
밤 바다에 풍랑이 일지를 몰랐겠습니까?
풍랑이 일것을 아신 주님이 제자들을 배를 태워 바다로 보내셨습니다.
왜요?
우리의 무능함과 믿음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누군지 모를 때 우리는 실수합니다.
내가 누군지 모를 때 우리는 자꾸 왕이 되려합니다.
내가 주인인지 종인지 모를 때 우리는 자꾸 사람들의 주목하는 자리에 앉으려합니다.
주님은 재촉하여 바다로 보냈습니다.
이유는 우리의 무능을 알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가장 열심과 열정이 많던 최고의 제자 베드로입니다.
그가 바다위를 걸어오신 주님을 보고 나도 걷게 하라고 합니다.
주님은 허락하여 바다를 걷지만 곧 빠집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14:30)
금방 기적의 주인공이 되어 오천을 먹이는 일의 수장이던 베드로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주님처럼 걷다가 물에 빠져 사람 살려라고 외칩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군지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기적의 현장에 있으면 우리가 누군지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격려와 탄성소리와 박수 소리에 자꾸 내가 누군지 잊어버립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죽지 않을 만큼 그러나 충격이 갈 만큼 바다로 보내십니다.
우리의 무능을 알라는 것입니다.
네가 누구고 주인공이 누군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체는 주님이고 우리는 믿어야하는 자임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31)
우리는 결국 우리의 일로 우리를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얼마나 믿느냐로 우리를 증명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로 증명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함정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일의 열매와 결과로 박수칩니다.
왕 삼고
주인 삼고
대장 삼으려합니다.
그때 바다로 가야합니다.
광야로 가야합니다.
산으로 가야합니다.
그것이 주님 스스로를 지키고 제자들을 지키기 위한
사랑의 방법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실체를 경험합니다.
빵 좀 먹었다고 물고기 좀 먹었다고,
그 한 가운데 내가 있었다고 우리가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은 나를 증명하지 않고
주님의 주님 되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가져서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나눠서
빠져서,
흔들려서
실패해서 주님의 주님되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빠지고
그 빠진 베드로를 건지고
주님이 배에 오르니 바람이 잠잠해짐을 통해
우리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과
우리의 구주 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일 때는 사람들이 놀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합니다.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33)
우리는 잘 될 때 보다 잘 안될 때 주님의 주님 되심을 경험하는 일이 많습니다.
잘 될 때는 다시 떨어질 가능성이 많기에 주님이 재촉하여 바다로 보내십니다.
그러나 어려울 때는 <오직 믿음>을 가지라 하십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31)
우리의 믿음 없음이 증명될 때 주님의 주님 되심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약함이 드러날 때 주님의 주님 되심이 고백됩니다.
우리가 잘 나고
우리가 기적을 보여주고
우리가 능력을 보여주는 현장에서는
세상이 우리를 주님으로 만들려합니다.
그것에서 우리는 주님의 주님 되심을 고백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주님의 주님 되심은 오직 우리의 약함과 무능함이 드러나는
바다와 광야에서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자꾸 우리를 세상의 가운데 세우려합니다.
우리는 재촉하여 변두리로 가야합니다.
그 변두리가
예수님에게는 광야였고
산이 었고
제자들에게는 바람불고 폭풍치는 바다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고백한 곳도 바로
고기 잡던 바다였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재촉하여 바다로 가라하십니다.
더더욱 오병이어로 사람 오천을 먹이는 일을 할 때는 더더욱 재촉하여
바다로 가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유일한 작품이던 아담과 아와가
기적의 한 가운데 있어서
홀로 광야의 시간,
바다의 시간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들은 늘 주목의 자리에 있어서
결국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은 아담과 하와의 후손입니다.
누군든지 기적을 보여주면 왕이 되라합니다.
왕삼으려합니다.
대장하라합니다.
주인하라합니다.
그 소리를 자꾸 들으면 내려오지 못합니다.
재촉하여 배를 타고 바다로 가야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입니다.
기적을 사모하지 말고
홀로 있는 그 시간을 사모하십시오.
그 시간이 우리를 균형있게 만듭니다.
내가 누군지 지켜줍니다.
주인이 누구고 왕이 누구고 섬겨야할 대상이 누군지를 알게합니다.
홀로 있는,
무리들과 떨어져 있는 바다의 시간,
광야와 산의 시간이 없으면
스스로 왕되고 싶은 것이 우리입니다.
재촉하십시오.
재촉하십시오.
서둘러 재촉하십시오.
홀로 있기를 재촉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우리를 왕 삼든지 죽이든지 할 것입니다.
재촉하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오직 두 번만 나옵니다.
한번은 주님이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다로 보내신 것이고
한번은 세상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칠 때입니다.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눅23:23]
세상은 왕 삼으려 하다 실패하면 우리를 죽입니다.
세상의 왕의 자리는 앉아도 죽음이고 앉지 않아도 죽음입니다.
우리를 스스로 재촉하지 않으면
우리는 스스로 멸망합니다.
우리를 아끼신 주님!
사랑하여 배를 태워 바다로 보내십니다.
우리를 아끼신 주님!
사랑하여 아픔으로 눈물의 골짜기를 보내십니다.
우리를 아끼신 주님!
사랑하여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오직 하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사랑해서
사랑해서입니다.
세상에서 못박혀 죽지 않도록
오직 성령 안에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도록…
우리를 서둘러 재촉하십니다.
사랑해서,
사랑해서 말입니다.
* 각 교회 고아들을 모으니 60여명이 됩니다.
작년 말부터 그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바자회 기금으로 마련된 장학기금을 에이즈로 병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에게 전달합니다.
드롱콥교회 고아들에게 아내가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학비를 내고 학용품을 살 수 있는 적지 않은 돈입니다.
늘 그래야합니다.
교회가 잘 세워지고
축복의 역사가 이어질 때 우리는 늘 주님의 마음이 있는 광야와
바다와 산으로 가야합니다.
그곳을 가야 그제야 보이는 영혼과
그곳을 가야 내가 누구이고 누구를 섬겨야할지가 보입니다.
교회가 성장할 때,
내가 축복의 현장에 있을 때
배를 타고 재촉하여 홀로 있지 않으면
절대로 보이지 않는 자들이 이들입니다.
홀로 눈물의 시간,
주님과 만나는 외로움의 시간을 보내야만이 보이는,
아프지 않으면 만나지 못하는 성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지나고
우리는 이 영혼들이 보이고 그들을 찾아갑니다.
재촉해야합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말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이 아니라
재촉하여 보면
주님이 보이고
주님이 보이면 주님이 마음이 있는 자들이 보입니다.
그때 섬기는 사람이 진짜 종입니다.
그러나 재촉하여 가보지 않은 사람이 섬기는 섬김은
결국 자기가 왕이 되기 위해
자기가 주인공이 되기 위해 하는 하나의 쇼일 뿐입니다.
재촉해야합니다.
그래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