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는 <발걸음>입니다. (마14:13-21)
오병이어는 시대의 영적 어둠 속에 피어난 소망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이 죽자 예수님은 곧 피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들에 가시니 "(14:13)
세례요한의 죽음은 한마디로 시대의 영적 거장이 순교를 당한 사건입니다.
온 사람들이 실의에 빠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마음 아픈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위해 보내진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님 한분 만을 위해 보내진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그의 사명을 다하고 옥에서 목 베임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가장 마음 아플 사람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홀로 있고 싶으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자라고 칭해 주었던 시대의 영적 거장이자 자신의
길 만을 위해 살았던 세례요한이 죽어서입니다.
시대의 어둠이 마음 아프고,
그렇게 죽어간 세례요한으로 마음이 힘드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빈들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슬픔도 잠깐 여러 마을에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 숫자가 큰 무리가 되어 예수님 앞에 섰습니다.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13)
이 광경을 본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함께
더 없는 슬픔이 밀려왔습니다.
그 슬픔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심장의 타오르는 슬픔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14)
여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심장의 소리입니다.
창자에서 나는 울림,
심장에서 터져 나오는 통탄의 마음입니다.
왜 이 마음이 나왔을까요?
바로 세례요한의 죽음입니다.
시대의 아픔입니다.
영적 지도자로 알던 요한의 죽음으로 이 무리들이 갈 곳이 없자
더더욱 예수님께로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온 것입니다.
엄마를 잃은 아이가 아버지에게 더 집착하듯
세례요한의 죽음은 사람들로 예수님이 어디에 있든지 찾아가게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예수님!
자기의 길을 위해 죽은 세례요한의 슬픔과 함께
영적 길을 잃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방황하며 유리하는 이 무리를 보시고
그 마음에 심장에서 들리는 애타는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목자의 마음의 기초는 이 마음입니다.
목자없는 양들을 보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저녁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이어
제자들이 나섭니다.
"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이 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14:15)
바로 그들이 온종에 굶었고 먹을 것 없이 저녁이 되어서입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전염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그 무리와 함께 있는 동안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 무리들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도록 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어린 아이의 오병이어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 오병이어가 오병이어가 되는 핵심은 바로
이 제자들의 <섬김의 마음>입니다.
제자들이 불쌍히 여기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았고
그리고 제자들의 섬기는 마음,
뭐라도 줘도 먹게 하려는 이 마음이 하나될 때 오병이어는 기적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쌍히 예수님의 심장의 소리와
섬기려는 제자들의 섬김의 애타는 마음이 하나될 때 어병이어는 의미가 있습니다.
작은 것이 어딘들 업습니까?
작은 도시락,
작은 물질이 어딘들 없습니까?
작은 것이 없어서 오병이어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을 경험한 제자들의 <섬기는 마음>이 없어서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명확하게 지적합니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너희가 그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16)
시대가 어두울수록,
영적인 인물이 없을수록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그럴수록 제자들의 섬김의 마음,
섬세한 섬김의 마음이 예수님을 일하게합니다.
그것이 오병이어 기적의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과 제자들의 섬김의 섬세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먹을 것이 얼마나 있는지 찾아보라합니다.
그리고 찾은 것이 어린 아이의 물고기 두마리 보리떡 다섯개입니다.
"제자들이 가로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17)
이것을 찾는라고 제자들이 얼마나 돌아다녔겠습니까?
남자만 오천명이 있는 무리중에서 제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지르면서
일일이 한 사람씩 확인하면서 찾은 것이 오병이어입니다.
그리고 주님께 그것을 가지고 옵니다.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의 의미는 제자들의 섬세하고 귀찮은 불편함을 감수한 섬김입니다.
오병이어는 제자들의 <불편함>을 감수한 <섬김의 씨앗>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드린 오병이어를 기억합니다.
아닙니다.
어린 아이의 오병이를 찾도록 만든
제자들의 섬세한 베려와 섬김의 씨앗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이 시대에 어디 오병이어가 없어서 기적이 없습니까?
어떻게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납니까?
첫째, 예수님께 나아온 길을 잃은 무리들의 목자를 향한 뜨거움입니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무리들, 군중들,
양들이 할 일은 목자를 향하여 어떤 곳에도 가겠다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기적의 기초인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을 잃은,
영적인 희망을 잃은 양들의 목자를 향한 수고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합니다.
시대가 어둡고
교회가 힘들고
영적인 길을 잃을 때 더더욱 목자를 향한 마음을 포기합니다.
멀리 홀로 계신 예수님!
배를 타고 홀로 멀리 가신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무리들의 수고를 기억해야합니다.
오늘 사건 이전에 예수님의 고향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억해야합니다.
자신이 창세전부터 감추인 비밀이라고 제자들과 비유를 설명하고
제자들과 고향을 갔는데
모든 고향사람들은 "가가가가!"라고하며 예수님을 향한 마음을 포기 했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고 절망하며 많은 권능을 행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무것도 모르는 무리들이 세례요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홀로 계신 예수님께 멀리 여러 마을에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의 열정,
예수님의 뜨거움,
예수님의 심장의 소리는 여기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둘째, 목자의 불쌍히 여김을 보고 느낀 자만이 섬김으로 나아갑니다.
제자들이 왜 식사 이야기를 할까요?
예수님의 마음,
무리를 향한 불쌍한 마음을 옆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작은 섬김,
불편한 자발적 섬김으로 나아갑니까?
목자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홀로 있고 싶어 들판으로 갔지만
시대가 어두울수록 목자를 향한 마음으로 나온 무리를 향한
불쌍히 여김의 사역을 베푸시는 주님을 본 제자들이
그 마음을 따라 굶은 무리를 향한 식사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누가 자발적 불편함을 감수합니까?
누가 섬김의 씨앗을 뿌립니까?
불쌍히 여김,
심장에서 들리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주님을 본 사람만이
이 자발적 불편함을 감수합니다.
섬김의 씨앗을 찾기 위해 수천명의 사람들을 이리저리 찾아 헤메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은 것이
자발적 불편함과 섬김의 씨앗을 뿌림으로 찾은 것이 바로
오병이어,
어린 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입니다.
어른만 오천 아이와 여자까지 만명에 이를 사람들속에서
일일이 찾아가면 수소문하며
귀찮은 발품을 판 섬김의 씨앗을 뿌린 제자들의 유일한 음식이 바로
오병이어입니다.
오병이어 안에는 어린 아이의 드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의 자발적 헌신과 섬김과
예수님처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흘러왔기 때문입니다.
셋째, 자발적 섬김의 마음을 가진 자가 나눔의 기적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를 드시고 축사하시고 그리고 자신이 나누지 않습니다.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누어주라고 하십니다.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19)
주님은 자발적 헌신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직접 주지 않습니다.
그분의 사람들,
예수님의 그 불쌍히 여김을 보고 느끼며 따른 <제자들>에게
나눔의 축복을 허락하십니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주자고 했습니다.
그들이 먹지 못하고 주리니 먹을 것을 사주자고 한 사람들은 제자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하라합니다.
힘든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내가 자발적 헌신의 마음,
섬김의 마음을 가지지 않습니다.
내가 발로 찾아 오병이어를 찾고
내가 그들에게 먹이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한 제자들,
자발적 헌신의 마음을 가진 섬김의 사람들에게 나눔의 축복,
오병이어의 풍성함을 보여주십니다.
오병이어가 없어서 주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가진 불쌍히 여김의 마음을 보고 느끼며
그 마음을 따라 먹을 것도 우리가 주자고 말하는 <제자>가 없어서입니다.
누가 오병이어를 경험합니까?
내 것은 없지만
나의 작은 자발적 수고를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입니다.
작은 빵을 들고 현장으로 가는 선교사
작은 생선을 들고 그들에게 찾아가는 종들,
아무것도 도움이 안될줄 알지만
작은 것이라도 마음으로 나누는 종들을 통해
그 다음 축복인 풍성함의 축복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축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없으니
마음도 안가집니다.
내가 안가지고 있으니 주님께 먹을 것을 주자고 말도 못합니다.
없어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무리들을 향한 <불쌍히> 여김을 내가 몰라서 그렇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본 사람,
불쌍히 여김을 느낀 사람은
무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마음 때문에 자발적 섬김과 헌신의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오병이어를 찾습니다.
이것이 귀하게 기적으로 남기를 기도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은 오병이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병이어를 가져온 제자들의 마음을 보십니다.
뭐라도 채워주고 싶은 주님의 불쌍히 여김을 따르는
자발적 헌신과 섬김의 섬세함이 우리를 오병이어의 풍성함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마을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치 않으십니다.
그러나 목자를 찾아 나온 수 많은 무리와
그 무리를 향한 자발적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 제자들의 마음이 하나되어
남자만 오천을 먹고 남은 광주리가 열 둘입니다.
주님입니다.
주님이 하십니다.
그러나 그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무리의 목자를 향한 <발걸음>과
제자들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오병이어를 찾는 <발걸음>이 모여
<열두 광주리>를 남기는 것입니다.
시대가 어둡다고 합니다.
교회가 길이 없다고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어두워서 어두운 것이 아니고
교회가 길이 없는 것이 아니고
무리와 같이 주님을 향한 발걸음이 없고
제자들과 같이 오병이어를 찾는 섬김의 발걸음이 없는 시대입니다.
영적 거장인 세례요한이 죽어도
무리들의 목자를 향한 발걸음만 있으면
어두울수록 소망이 있고
그 무리를 향한 섬김의 마음만 있다면
우리 손에 들린 작은 물고기 작은 보리떡은 또 다시
주님의 축사를 통해 열두 광주리를 남게 만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어둡다고 말하지 맙시다.
영적 거인이 없다고 아파하지 맙시다.
오병이어는 시대를 빛낸 세례요한이 죽은 후에 나타났고
가장 영적으로 어두울 때 일어난 소망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구역방문이 시작되었습니다.
5,6구역이 몬스트로노스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각 구역이 현지인 교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기도하고 일년에 한 두차례 방문을 하십니다.
작년보다 올해가 더 성장한 교회를 보고 기뻐하십니다.
오실 때 점심으로 잔치 식사를 준비해주셔서 아름다운 교제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필요한 것들도 지원해주시고
늘 기도와 후원으로 섬기시는 교회를 통해 선교지 교회는 아름답게 세워져갑니다.
작은 발걸음입니다.
섬김의 씨앗입니다.
이 발걸음을 통해 하나님의 오병이어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아름다운 섬김에 각 가정마다 하나님의 오병이어의 역사가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