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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의 소리가 <자존심>보다 커야합니다

심장의 소리가 <자존심>보다 커야합니다

 

 

 

 

 

 

 

 

 

 

심장의 소리가 <자존심>보다 커야합니다(14:1-14)

 


세상 왕이 사는 기초는 자존심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는 기초는 심장의 소리입니다.

 

 

오늘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세레요한을 죽인 분봉왕 헤롯과 오천을 먹이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세상의 왕은 사람들이 따르는 세례요한을 죽이고

하늘의 왕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립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무엇이 이들을 움직입니까?

우리는 어떤 동기에 의해 움직입니다.

 

 

세상 왕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했습니다.

그것을 세례요한이 말하자 <자존심> 상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감옥에 넣었습니다.

 

잔치를 했습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너무 잘추자 너무 좋아서 해달라는대로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헤로디아가 그의 딸에게 세례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달라고 시킵니다.

사람들 앞에 약속을 왕은 자신의 자존심과 세례요한의 목숨 중에 하나를 택해야합니다.

결국 세상의 왕은 자존심을 택합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의 자존심이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고

다른 사람의 생존보다 중요하며

다른 사람의 상처보다 자존심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자존심에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놓아야합니다.

그것이 세상이 사는 기초입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이 상한 것은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을 사람에게 들이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들이댑니다.

 

섬겨야 하나님을 비교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섬겨야 하나님을 비교하고

다스려야 세상을 섬기며

없어야 형제간의 관계에 자존심을 세우고

세워야 세상 앞에서의 자존심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자존심> 끝은 <주인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진리> 반대는 <감정>입니다.

<자존심>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나의 자존심 때문입니다.

진리를 지키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서 진리를 진리로 지키지 못합니다.

진리를 지키려면 내가 죄인이 되고

내가 악인이 되고

내가 사람들 앞에 나의 약함을 고백해야합니다.

그것을 내려 놓는 것이 죽기 보다 싫은 것입니다.

자존심을 내려 놓으려면 차라지 죽음을 택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영적인 지도자인 세례요한을 죽여버립니다.

목을 버립니다.

쳐야 자신의 ,

자존심의 목을 치지 못하고

결국 다른 사람의 목을 칩니다.

 

십자가 상의 한편 강도입니다.

한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언듯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겨우 나를 기억해 달라는 말속에 강도가 낙원을 허락 받습니다.

 

 

<자존심>입니다.

강도가 고백한 것은 당신의 나라에서 나를 기억해 달라는 말속에

나의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는 죄인이고

나는 강도고

나는 악당이고

나는 이런 십자가를 져도 당연한 사람이라는 자기의 자존심의 목을 치는

고백이 바로 나를 기억해 달라는 고백입니다.

 

세상은 절대 그런 고백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사는 삶의 기초는 바로 자기가 왕이라는 <자존심>입니다.

 

 

세상이 사는 ,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을 다른 말로 풀이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민감성>입니다.

 

바로 <다른사람의 >입니다.

 

 

세상이 사는 법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입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헤롯왕은 세례요한의 지적에 말이 맞고 맞지 않고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목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사람들 앞에서 행한 약속을 행하느냐 안행하느냐를 다른 사람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자유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속에서 자존감을 찾으려합니다.

인기를 찾고

유명해 지고

많은 지지를 받으려는 마음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그러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많은 지지를 받으면

사람은 나의 원수가 됩니다.

사울왕와 다윗입니다.

 

천천이요 만만이라는 소리는 다른 것을 건드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살아갈 기초인 자존심을 건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존심>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내가 망가지고 내가 무너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를 고백하고

나의 약함과 나의 허물을 고백하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존심> 넘어 <자존감> 하나님 안에서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존심을 넘어 자존감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세상적인 방법을 취합니다.

인기와 돈과 명예와 학위와 지위를 이용합니다.

 

그것에 망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페이스북의 노트에 바로 문제를 깊이 묵상한 내용이 있습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한가지>라는 글입니다.

링크(https://www.facebook.com/sdkkorea?ref=tn_tnmn#!/notes/%EC%84%9C%EB%8C%80%EA%B2%BD/%EB%B0%98%EB%93%9C%EC%8B%9C-%ED%95%B4%EA%B2%B0%ED%95%B4%EC%95%BC%ED%95%98%EB%8A%94-%ED%95%9C%EA%B0%80%EC%A7%80/121277304665493)

 

 

읽어보기를 바랍니다.

자존심으로 사는 사람의 가장 특징은

 

세상의 소리에 민감합니다.

 

다른 사람의 소리에 민감합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예민합니다.

자존감이 약해서입니다.

자존감이 약하면 하나님이 불러도 죽게됩니다.

모세가 길의 숙소에서 천사가 그를 죽이려합니다.

사명을 받은 자가 하나님의 천사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문제에 놓였습니다.

 

<자존감>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입니다.

 

 

 

떨기 나무 불꽃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초자연적 기적을 통해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 죽임을 당합니다.

가는 길에서 하나님의 천사를 통해서 말입니다.

 

자세한 것은 노트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해결되지 않으면 평생 끌려 다니고 세상보다 악한 모습을 살아야하는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왕과 함께

하늘의 왕이 사는 법을 이어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로부터 그가 죽은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은 급히 홀로 있기 원하여 떠나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그에게 찾아옵니다.

세례요한을 잃은 무리들이,

군중과 하나님의 잃은 백성들은 목자를 찾아갑니다.

의지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버팀목으로 세례요한을 기대했는데 이제 그도 죽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기에 이제 그가 어디에 있든 그에게로 달려갈

시대적 상황과 분위기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은 여지 없이 목자 없는 양을 보는

뜨거운 마음,

심장에 불이 타는 듯한 열정으로

심장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립니다.

 

바로 <불쌍히 여김>입니다.

세상의 왕은 자신의 버팀목이 <자존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목자의 버팀목은 바로

불쌍히 여김이라는 원어의 의미인

심장의 들끓는 마음,

창자의 통곡,

심장에서 들리는 애끓는 마음입니다.

 

바로 <심장의 소리>입니다.

 

목자는 자존심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양이 아프면 목숨을 놓고라도 절벽을 기어올라갑니다.

아프면 목숨 내어 놓고 어떤 희생도 치루는 것입니다.

 

 

닭을 150마리 키운적이 있습니다.

닭과 함께 닭장에서 잠도 잤습니다.

아픈 닭의 똥구멍 똥도 손으로 빼주었습니다.

벼룩도,

이도,

닭들이 똥도 문제가 안됩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이런것이 목자의 마음이구나!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가면 전부를 있습니다.

 

바로 심장의 소리가 들리면,

심장에서 애끓는 소리가 들리면 그것이 가능합니다.

 

 

언제 그것이 가능합니까?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이 회복되면,

자존심을 넘어 자존감이 회복되면 목숨도 내어놓습니다.

심장의 소리,

그들의 아픈 소리가 들리고

그들의 눈물이 보이고

그들의 신음소리가 들립니다.

 

예수님의 심장의 소리의 근원이 어디입니까?

 

바로 <하늘의 소리>입니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린,

요단강 세례후의 하늘의 소리,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라는

하나님의 소리가 자존심으로 살지 않고

오직 자존감의 회복으로 심장에서 들리는,

목자 잃은 양들의 심음 소리와

눈물과 아픔의 소리에 반응하는 심장의 소리를 따라 전부를 던지는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사람의 목도 쉽게 버리는 가짜가 아니라

자신의 목숨도 기꺼이 내어 던지는

목자의 모습,

심장의 소리를 따라 걷는 진짜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심장의 소리로 움직이십니까?

나의 자존심으로 움직이십니까?

 

시대를 바꾼 부흥의 불씨는 바로 자존심을 내어던진

고백의 현장에서 시작되었음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자신이 잘한 것을 고백한 자랑의 장소가 아니라

자신의 무능과 자신의 허물과 자신의 죄를 고백한 자리입니다.

 

자존심의 소리가 아니라

심장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마음,

양들의 신음소리에 따라 반응하는 심장의 소리에

마음을 맡기고

고백을 맡기고

영혼을 맡기는 고백의 자리에서 시대를 바꾼 부흥의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존심을 바꾸지 마십시오.

선악과를 먹고 가장 먼저 일어난 사건은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입니다.

 

하나님을 지키지 않고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찾아온 가장 슬픈 일입니다.

 

십자가 상의 한편 강도,

사울왕과 다윗,

목매 죽은 가롯유다,

자존심을 하나님처럼 여기는 죄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의 단면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십니까?

당신의 자존심을 던져야합니다.

자존심의 <향유 항아리> 던져야합니다.

내가 평생 간직하고 깨어지지 않게 지켰던

<옥합 항아리> 깨야합니다.

 

그것이 깨어질

우리의 삶의 모든 현장에 십자가가 기억되고

당신의 삶도 기억되는 것입니다.

 

잊혀진 사람들처럼

그저 자존심을 지키다 사람으로 기억되지 않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야기 영원히 기억될 이야기로

당신의 자존심의 <옥합> 깨뜨린 사건이 기억될 것입니다.

 

우리가 깨야할 것은 바로 자존심의 항아리입니다.

세상은 죽어도 깨지 못하는 !

<자존심>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지금껏 몰래 숨겨놓은 <자존심의 항아리>

날마다 깨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양심도 팔고 영혼도 파는 곳입니다.

예수를 믿는 !

나의 모든 십자가에 죽은 것으로 믿고

<자존심의 항아리>속의 작은 한가지를 날마다 내어 놓는 것입니다.

 

세상의 왕과 예수님이 다른 !

세상은 자존심으로 살고 예수님은 심장의 소리로 사는 것입니다.

 

<심장의 소리> <자존심>보다 커야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 아이들을 자존심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웃음과 울음에 마음으로 대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하나님의 심장 소리를 듣는 법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불쌍히 여기는 마음,

심장의 소리를 따르십니다.

소리는 자신의 아들까지도 내어주시기까지 하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여전히 심장의 소리가 아니라

자존심의 소리를 따라서입니다.

 

자존심의 항아리가 깨어질

우리는 천국 백성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사진은 초등학교 1학년 다빈이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