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마13:53-58)
"가가 가가?"
이 말은 "그 사람이 그 일을 했던 내가 아는 그 사람입니까"라는 경상도 말입니다.
오늘 천국비유를 선포하신 주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들은 말이 이 말입니다.
"가가 가가?"
주님은 창세로부터 감추인 비밀을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감추인 천국의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그 자신을 여러 비유로 설명하시고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셨는데
비유를 설명하신 내용과 전혀 반대의 반응이 찾아옵니다.
바로 "가가 가가!"입니다.
예수님이 수 많은 기적을 베푸시고 놀라운 말씀과 지혜를 회당에서 가르치시는데
그것을 지켜본 고향의 많은 사람들은 그 내용보다
내가 아는 그 목수의 아들 예수가 맞느냐는 반응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저희가 놀라 가로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뇨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13:54-55)
우리는 잘 나가는 사람이 내가 잘 아는 사람,
아주 유명한 사람을 내가 아는 사람인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입니다.
너무 <잘 안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 아버지도 알고,
너희 어머니도 알고,
너의 형제도 누이도 다 안다는 것입니다.
때로 이런 친분관계가 좋은 작용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뭔가 <도움>을 받을 때입니다.
한마디로 높은 자리 덕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아쉽고 내가 어려울 때 내가 아는 사람의 친분 관계를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문제는 거기까지입니다.
"그래 잘하네~" 까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죄를 지적하고
구원을 이야기하고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할 때는 그 사람과의 친분 관계는 도움이 아니라
해가 되는 결과를 낳습니다.
인간 세상의 관계는 아는 친분은 곧 힘이됩니다.
능력이 됩니다.
학연과 지연과 혈연 관계는 세상의 힘의 논리로 다 나에게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구원의 문제,
천국의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독이됩니다.
우리의 잘못된 관점 중에 하나는
내가 잘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어릴적부터 잘 알고
그 집안의 허물과 약점과 어린 시절까지 다 알 때는 그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영적인 문제에서는 더더욱 그것이 심합니다.
첫째, 친분의 벽을 넘어야합니다.
우리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의 설교를 들을 때 잘못된 관점 중 하나는
내가 아는 그 사람의 배경을 안고 설교를 듣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의 똥싸고 얻어먹던 그 과거의 도마 위에 그 사람의 설교 평가합니다.
곧 그 설교는 듣고 행하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그 사람을 평가하고 요리하는 생선일 뿐,
내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습니다.
왜요?
내가 너무 잘 알아서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이 목사고
내 사위가 목사인 성도,
우리 집안에 선교사가 있고
내가 너무 잘아는 사람이 사역자라면 그 사람은
신앙적으로 손해를 보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내가 너무 <잘 알아서>입니다.
예수님이 창세로부터 감추인 비밀을 비유로 설명하시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완전히 박살이 났습니다.
누구에게요?
예수님의 가정과 과거를 안다는 친분관계의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려움입니다.
전도를 할 때,
복음을 전할 때 우리의 말이 우리의 말로 들립니다.
하나님의 복음으로 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천국 말씀으로 들리지 않고
우리의 말이 그들에게 과거를 알고 가정을 알고 약함을 알고
가정의 아픔과 어려운 과거를 아는 내가 아는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알기에 어떤 말도 하나님의 권위로 받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처참합니다.
그 사람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합니다.
능력을 맘껏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참 능력을 그들에게 보여주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은 친분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보는 사람에게만 역사합니다.
성숙이 무엇입니까?
성숙은 친분의 관계로 그 사람을 해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관계적 측면에서 그 설교자의 말씀을 해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입니다.
설교자의 아픔은 다 살지 못하고 정답을 말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행한 약함과 허물과 과거의 부끄러움을 가지고 설교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픔입니다.
할 수 있으면 가능하면 그런 허물과 약함과 과거의 부끄러움이 없으면 좋지만
사람이기에 그런 것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설교의 자리는 본인의 삶을 떠나서 정답을 말 해야하는 자리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정답입니다.
진리입니다.
길입니다.
그런 분이 오늘 무참히 박살이 납니다.
거부당합니다.
믿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능력을 더 이상 행치 않으십니다.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13:58)
정답을 산 사람이 와서 말을 해도 우리는 그 정답을 믿지 않습니다.
누가 와서 정답을 말해도
친분관계적 측면,
그 사람의 과거와 살아온 배경이나 약함의 관점을 아는 사람은
늘 <손해>라는 것입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의 깊은 삶의 내면을 모르는 사람이 더 은혜를 받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에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처럼 정답을 말해도
우리의 친분 관계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 친분관계,
소위 잘 안다는 <관계적 걸림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환영 받지 못한다는 이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합니까?
둘째. 진리가 아니라 도덕과 윤리로 설교자를 판단합니다.
시대가 악할수록 세상은 교회를 진리가 아니라
도덕과 윤리 그리고 친분관계로 교회를 해석하고 설교자를 해석합니다.
물론 교회는 순수성과 거룩함으로 서야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예와 같이
어떤 정답의 삶을 가지고 나아가도 그들은 도덕과 윤리와 친분관계로
그 진리를 판단하고 해석합니다.
이 시대가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왕성하고 그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교회와 진리와 나아가 설교자를 윤리의 잣대로 판단합니다.
얼마나 도덕적인가
얼마나 윤리적인가
얼마나 깨끗한가로 판단합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아무리 거룩하고 깨끗해도 세상은 우리를 더더욱 죽이려합니다.
주님은 오늘 고향에서 배척을 당하시고 미움을 당하셨습니다.
주님이 정답이 아닙니까?
주님이 거룩하지 않습니까?
윤리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습니까?
누구보다 순결하고 거룩한 주님은 친분관계,
내가 그 사람 잘 안다는 안면적 측면 때문에
그 말씀의 권위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문제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얼마나 거룩하냐 설교자가 교회가 이 정도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이어야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거룩함으로 나아가면
그냥 싫다고 합니다.
그냥 밉다고 합니다.
왜냐고 물어보면 이유는 없다고합니다.
그냥 싫다고합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미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8]
미워서 윤리와 도덕으로 친분관계로 그 벽을 치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께 속한 자를 무조건 미워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무조건 미워한다고 그 빌미를 주어서는 안됩니다.
윤리와 도덕과 친분관계가 말씀의 능력을 제한한다고
윤리와 도덕과 친분관계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것만이 복음을 증거하며 하나님의 권위를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비된 자,
주님이 택한 자를 우리 약한 질그릇 같은 우리를 통하여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완벽함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 윤리와 도덕과 친분관계(과거를 아는 것)로 말씀이 제한되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세상의 가리워진 걸림돌인 윤리와 도덕과 친분관계의 벽을 넘어서
하나님의 길을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사는 자,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보다 거룩해야 하지만
그러나 허물과 과거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의 관점이
윤리와 도덕과 친분관계의 과거를 잘 아는 것으로 말씀의 능력이 제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약점을 잡으면
그 한가지 약점이 말씀의 권위를 제한 하는 희석제로 삼아버립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너의 과거를 알아~라는 친분의식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권위를 제한 시켜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이 친분관계의 제한성 때문에
능력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문제입니까?
주님의 윤리와 도덕,
친분관계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친분관계를 가진 자들의
이 <친분관계의 제한성> 때문입니까?
잘 생각해야합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누가 설교를 해도
본인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은 본인이 챙겨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사람을 보게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던 사람들도,
완벽한 주님을 보던 사람들도 허물을 찾았습니다.
창조주시며,
세상을 창조한 윤리와 도덕과 모든 것이 완벽한 주님에게도
사람들은 내가 너의 과거를 안다는 것입니다.
너의 집안을 알고
네 아버지의 허물을 알고
네 어머니의 과거를 알고
네 형제들이 어느 학교를 나오고 어느 직장을 다니고
네 누나들이 누구 집에서 어떤 삶을 사는지 아는데
네가 전하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문제입니까?
주님입니까?
아닙니다.
우리의 <친분관계의 제한성>
즉 그 사람의 행위와 관계적 측면으로 보는 우리의 <관점>입니다.
우리의 훈련이 무엇입니까?
자연을 보고 자연을 지으신,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지만 사람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하여 일하시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 훈련이 되지 않으면
이 땅에 어떤 사람이 설교를 해도 우리는 실패하게 되고
믿음의 걸림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 하는 사람이 됩니다.
시대가 악하여
한국교회가 어려워
자꾸 이 눈을 잃어버립니다.
자꾸 그들의 윤리와 도덕으로 교회를 보고
그들의 과거로 설교자를 대하고 교회를 대합니다.
완벽한,
흠도 점도 없는 주님이 와도 흠을 잡을 세상에서
우리는 자꾸 보지 말아야 할 사람의 친분관계적 제한성에 걸려
우리가 나아가야 할 은혜의 자리까지 나아가지 못합니다.
어린 전도사가 설교를 하고
설교를 마치고 나가면서
"오 00전도사 많이컸네~"라고 하면서 어깨를 툭치고 갑니다.
전도사의 설교,
내가 어릴적부터 봐 오던 코 흘리게 전도사의 말이 아니라
비록 그의 친분적 제한성이 나에게 있고,
도덕과 윤리와 인간적 연소함이 있지만
오늘도 성령으로 지금 나의 삶의 현장에서 거룩으로 초대하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그 설교가 들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늘도 고향에서 선지자에게 배척을 하고
급기야 주님이 와서 말씀을 전하고 능력을 전해도 듣지 않고 믿지 않던 그들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을 좀 사신 분들,
회당에서 설교를 듣고 사회적 위치가 어느 정도 있어서
세상을 판단하고 세상에서 영향력을 가지는 사람일수록 이것이 더합니다.
조심해야합니다.
설교자의 거룩함과 순결성은 기도함으로 본인에게 맡겨야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설교의 전달자로서 그 사람의 거룩성과 순결성을 보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나 말씀은 그런 약한 자를 통해서도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지금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입니다.
그렇기에 그 사람을 통해 성령이 전달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말씀을 통해 <내 안>의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별해 내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완벽한 주님이 와도 성에 차지 않을 마음으로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며
누구라도 배척하는 배척의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설교자로 목숨을 걸고 도덕과 윤리와 친분관계의 제한성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이 땅에 어떤 누가 이런 세상이 찾는 그런 완벽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그렇게 존경 받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주님이 와도 배척을 받는 이 세상에서,
주님이 오면 미움을 받는 이 악한 세상에서
세상처럼
네가 한 말대로 네가 그렇게 사느냐고
네가 전하는 말대로 너는 그렇게 깨끗하냐고 외치는
주님의 고향 사람들,
내가 너의 과거를 아는데 내가 너를 못 믿겠다고 말하는 그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쉽게 사역자를 바꾸고,
쉽게 담임목사를 바꾸고
쉽게 책임자를 바꾸는 잘못된 신앙의 유전이 고정화되고 있습니다.
아픔입니다.
슬픔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 목사님 때문에
우리 장로님 때문에
우리 구역장과 내 옆 사람 때문에
신앙 생활을 망쳤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는 일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내가 사람을 보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어떠하든
그 사람이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성숙된 신앙이 이제는 필요한 것입니다.
친분관계의 제한성,
윤리와 도덕의 제한성으로 손해 본 것은
고향 사람들이지 주님이 아닙니다.
<완벽>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 완벽을 요구하는 것이 사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완벽이 아니라 세상이 버린 사람들,
세상이 포기한 나 같은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들을 하십니다.
완벽이 아니라 허물속에서 진주가 되십시오.
사랑할 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이방인도 한다 했습니다.
완벽한 사람도 없지만 완벽한 사람이 설교하면
누가 안듣겠습니까?
그래도 세상은 그 완벽에 등을 돌립니다.
주님을 부인한 사람,
사람을 돌로 쳐 죽인 사람,
베드로와 바울 같이 허물 많고 허점 투성이인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성령을 믿으며
믿음으로 그 말씀 따라 간다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넷째, 그래서 같은 눈길을 가져야합니다.
주님을 향하여 허물 많은 나는 용서하고 용납하고 은혜를 달라고 하면서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전하는 상처 입은 치유자들을 향한
눈길은 여전히 관계적 제한성으로 거룩과 은혜의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나를 향한 주님의 눈길과
그들을 향한 주님의 눈길이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아픔은 이것입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듯 하지만
실상은 완벽의 덫에 빠진 <완벽주의> 환자와 같을지 모릅니다.
복음은,
복음은 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완벽이 아니라
허물 투성인 사람에게도 용서와 용납의 은혜로 내밀어 주신 주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눈길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향하여 보내시던 그 눈길로
나도 평가의 자리에 서 계신 어떤 사람을 동일하게 쳐다보는 것,
그것이 복음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 눈길을 내가 얻고
그 눈길로 내 앞의 그 사람을 보지 못하면
내 안에 구원은 아직도 멀고 먼 여행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용서 받은 감격은 감사하면서도
그 감사와 감격이
나를 통해 저들에게도 흘러가게 하지는 않습니다.
돌을 들어 심판해야 하는 간음한 여인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하신 주님의 깊은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것은 주님 자신을 성령과 연합하기 위해 자신이 지켜야 할 선을 지키는 것입니다.
어떤 심판도 성령께 맡기셨습니다.
주님은 능력과 기적으로 사람이 모일 때마다 한적한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마음,
주님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지키기 위한 스스로의 몸부림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없습니다.
돌을 던질 자들에게 다 돌을 던지고
칼을 들 자들에게 다 칼을 듭니다.
자기 영혼 속에 임한 용서와 용납과 성령의 연합의 깊은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주님의 그 눈길,
나를 향한 용서와 용납과 관계적 제한성 너머에 있는
그 주님의 따뜻한 눈길을 잃어버리고
윤리와 도덕과 관계적 제한성으로 우리의 영혼을 파괴해 가는 것입니다.
사단의 무기는 합리와 이성이며
도덕과 윤리라는 간판입니다.
실상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고
윤리적이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지만
단지 간판을 무기로 사용하는 세상의 악한 놀음에
주님은 오늘도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사단의 목적은
내 안에 이 주님의 은혜가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설교를 전하는 <사람>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양,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백성,
성령의 음성을 깨닫지 못하는 교회…
끝입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사람되게 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시는 하나님!
그분을 봐야합니다.
더 이상 사람을 보고
교회를 보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사라진 영혼의 음성이 들리게 해야합니다.
양에게,
잘 보지도 못하는 양에게
유일한 희망은 목자의 음성입니다.
세상은 관계적 제한성으로 그 음성이 들리지 않게합니다.
그것이 세상이 주는 합리와 이성의 함정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는 저희 율법에 기록된 바 저희가 <연고 없이>
나를 미워하였다 한 말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25]
세상은 도덕과 윤리의 허물도 이용하고 싫어하지만
세상은 <완벽>도 미워합니다.
은혜의 눈,
내가 받은 은혜의 눈으로 나를 보고
그 은혜의 눈으로 평가의 자리에 있는 그 사람을 같은 눈길로 보는 것,
그것이 주님이 원하는 마음입니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
<완벽>이 아니라 이 <은혜의 눈>입니다.
* 많이 난 상처가 은혜의 바다에 있을 때만
아름다운 윤기와 빛을 냅니다.
많이 난 상처가 은혜의 바다가 아니라
거친 세상의 산기슭에 있으면 살이 닿을 수록 상처를 냅니다.
만날 수록 상처를 냅니다.
은혜의 바다,
은혜의 눈길을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비록 거친 세상에 살지만
우리의 영혼은 은혜의 바다에서는
그 거친 상처가 아름다운 빛이 나는 보석같이 될 것입니다.
상처가 보석이 되는 것은
세상의 거친 삶의 산 기슭이 아니라
어떤 상처도 회복하시며 보석처럼 빛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속입니다.
상처가 상처가 아니라 영광이 되는 것은
바로 은혜의 바다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 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