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복음(마13:24-30)
왜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왜 저 사람들이 내 맘에 들지 않고
왜 저 일들이 내 맘에 들지 않습니까?
진리의 복음 때문일까요?
정말 진리의 복음 때문에 내가 의에 주리고 목이 말라
교회를 향하여 사람들을 향하여 왜 그렇게 밖에 못하느냐고 외칠까요?
<복음의 본질>과 <세상의 본질> 사이에서의 갈등입니다.
예수님은 여러 비유로 천국을 말씀하시면서 성경의 말씀을 이루려한다고 하십니다.
그 내용은 창세로부터의 감추인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13:35)
왜 복음이 시시해 보입니까?
왜 세상 사람들이 복음에는 관심이 없습니까?
왜 교회 안에 들어와도 늘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세상의 눈으로 복음이 일하는 방법과 되어지는 것을 보니 충돌이 일어나서 그렇습니다.
복음을 듣고 교회에 들어 왔지만
세상의 눈으로 복음을 보면 그렇습니다.
아직 복음의 의미와 하나님의 지혜로서 복음의 길을 알지 못하니
믿음,
예수 믿고 천국 간다는 그 한가지 사실만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 왔는데
예수를 믿는 다는 것,
복음이 어떻게 세상의 길과 다른지 알지 못하니
늘 복음과 내가 갈등을 일으키고
늘 나와 그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킵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창세부터 감추인 것입니다.
복음의 길과 원리는 창세부터 감추인 것이 예수님을 통하여 이제야 드러나고
그것도 비유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세상의 모든 기대와 다른 것입니다.
창세부터 감추어져서 아무도 모르는 방법으로 일하는 것,
세상의 방법과 길과 식이 아닌데도
우리는 자꾸 세상에서 배운 그 방식과 그 목표를 가지고 복음에 접근합니다.
그래서 늘 갈등이고
그 사람이 마음에 안들고 교회가 마음에 안드는 것입니다.
복음과 세상!
무엇의 충돌입니까?
첫째, 세상은 길이 아니라는 곳에 길을 만듭니다.
세상이 포기한 곳에,
세상이 아니라는 곳에 답이 있습니다.
오늘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을 드러낸다는 것을 예언한 성경은 시편78편입니다.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시78:2)
그런데 이 시편에서 길게 말하는 내용은 모두 하나님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신 반석에서 쪼개어 강을 내고,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하늘에서 만나를 주시며 수 많은 기적와 이적으로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마다 끝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배반과 하나님을 버림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같이 기록합니다.
놀라운 기적과 세상적으로도 기가 막힌 능력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심판을 기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그 모든 역사과 기적 가운데 다시 감추어진 것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겨자씨>입니다.
창세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이 드러나는데 그것이
천국은 마치 겨자씨 같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습지 않습니까?
시편 78편에서 말하는 놀라운 하나님,
세상을 놀라게하고
세상에 없는 법칙으로 세상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던 하나님을 말하더니
여기서는 겨우 겨자씨 비유를 하면서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이라고합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이스라엘은 수 많은 위대한 기적,
이 세상도 놀랄 초 자연적 기적을 경험했지만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세상을 따랐습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들을 대했지만
그들은 세상의 길과 방법과 식을 따라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신 창세로부터의 지혜,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을 예수님의 때까지 감추었다가
이제야 그것을 설명합니다.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이 비유가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겨자씨입니다.
어떤 것보다 작은 씨앗,
세상은 이런 것으로 도대체 무엇을 하겠느냐고 말할 만한
그 작은 겨자씨로 온 세상보다 큰 나무가 되는 것이 겨자씨입니다.
둘째, 내 눈에 좋아 보이는 것!
세상은 큰 것으로 큰 일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입니다.
우리는 자꾸 큰 사람이 되려합니다.
세상적으로 보기에 좋은 것을 고루려합니다.
다윗의 형들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고 새로운 이스라엘왕을 세울 때
사무엘을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새의 아들들을 다 모아 그 아들들을 첫째부터 봅니다.
엘리압입니다.
사무엘이 보기에 기가 막힌 왕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삼상16:6)
이 마음이 바로 세상의 가치입니다.
사무엘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그런 그도 엘리압을 보자 왕으로서 적합해 보였습니다.
그의 용모와 그의 스펙과 그의 지성과 그의 외모는 어디를 봐도 왕이 될 조건을 다 갖추어보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 안에도 여전히 있습니다.
이 가치로 인한 갈등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신앙이 좋을수록,
자리가 높은 사람일수록 이렇게 보기에 좋은 것에 속아 넘어갑니다.
교회가 사람을 뽑을 때 취하는 방법입니다.
<보기에 좋은 대로> 입니다.
이것이 결코 틀린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앞에 한 자가 빠졌습니다.
<내가>입니다.
내가 보기에 좋은 대로 입니다.
사무엘의 실수는 우리 모두의 가치입니다.
사무엘은 흠 없고 세상적으로도 뭔가 자격이 될 사람을 고르고 싶었을 것입니다.
왕이면 이 정도는 될 사람을 뽑고 싶었을 것입니다.
역시 엘리압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가 가정적으로도 훌륭하여 그의 딸 아비하일은 후일에
르호보암왕의 아내가 될 만큼 그는 그럴듯해 보이는 외형과 가정과 스펙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보는 눈이 있었다 .
신앙이 깊을 수록 빠지고,
인생의 연륜이 깊을수록 빠지는 유혹은 이것이다.
<내 보기에 좋은 대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쉽게 빠지는 갈등과 충돌은 이것이다.
우리 눈에 보기 좋은 대로 사람을 보고 판단하고
일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사람은 안되고 그래서 저 일은 내 맘에 안드는 것이다.
저 사람은 외형이나 스펙은 이정도는 되야되고
저 일은 세상적으로 이 정도 일을 해야 교회가 교회 같고
목사가 목사 같지 저렇게 일을 해서 뭐가 되겠나???
잘 기억해야합니다.
우리의 가치가 자꾸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좋은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일을 판단하고
담임 목사를 판단하고
시골의 몇명안되 보이는 목사님들을 판단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눈입니다.
그것이 복음과 충돌을 일으키는 눈입니다.
그 관점에 하나님은 한마디 하십니다.
"내가 그를 버렸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외모와 중심,
이것이 우리의 갈증의 요인입니다.
충돌의 핵심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자꾸 외모와 중심의 갈증을 일으킵니다.
시대의 선지자 사무엘도 갈등한 것,
<외모>와 <중심>입니다.
외 이 시대가 자꾸 <보기>에 좋은대로 갑니까?
자꾸 이뻐지려고 성형을 수십번 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끌려 가는 것은 이미 과거에 실패한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6:2]
중심을 잃은 인간,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눈이 사라진 인간이 취한 길은
바로 눈에 보이는 것에 따른 삶입니다.
이것이 인간본질인 상향성의 추구의 열매입니다.
이뻐서 이쁜게 아니라 저 사람의 아내보다 내 아내가 더 이뻐야 하고
내가 가진 것이 저 사람보다 더 좋아 보여야한다는 상향성의 열매입니다.
그 열매의 결과는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로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떠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3)
하나님의 영이 사람을 떠난 이유는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한,
보는 것에 따르는 삶의 가치를 취할 때부터입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영이 떠난 이유는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는 삶,
죄는 결국 보기에 좋은 대로,
남들 보기에 좋은 것을 취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인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감추인 비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결코 세상이 보기에 좋은대로 그분의 복음,
하나님 나라를 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갈릴리에 뭐 선한 것이 나겠냐는 것입니다.
뭐하나 세상적으로 왕적인 조건이나 메시야적 기대를
전혀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로부터 감추인 것입니다.
세상은 결코 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세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보고 세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보기에 좋은 일곱 아들을 다 버리고 세운 나머지 한명이 누구입니까?
목동 다윗입니다.
그런데 왜 그를 취했습니까?
왜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세운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양을 치는 우리에 있는 자입니다.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시78:70)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취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가 양을 치은 자,
형들보다 나은 것이 없고
왕을 선택하는 자리에도 들지 못하는 작고 작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스펙도 없고,
세상적으로 내 세울 것이 없는
그저 작고 초라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겨자씨는 천국을 말합니다.
셋째, 그 겨자씨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편 78편을 통해 감추인 것을 비유로 드러내심을 이루려하시는 예수님,
그 감추인 것이 바로
세상적으로 볼 것 없는 자신,
세상적을 더 작고 더 보잘것 없는 자신을 의미합니다.
씨뿌리는 자는 인자를 말한다고 비유를 풀어주실 때 설명하십니다.
"13:37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마13:37)
씨뿌리는 자는 인자인 예수님입니다.
천국은 씨뿌리는 자, 예수님입니다.
천국은 마치 겨자씨같다고 말씀합니다.
그 겨자씨는 모든 씨보다 작지만 모든 것보다 커진다고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13:32)
천국은 세상이 버린 씨,
세상이 외모로 볼 때는 다윗 같이
아무 소용없이 양이나 치고 있을 세상보다 작은 사람이지만
그렇게 작고 볼품 없는,
다윗이 양의 우리에서 양으로 선택되었듯이
예수님은 말 구유에서,
나귀를 타고 오셔서
세상적으로 외모적으로 조건적으로 아무것도 없을 그지만
결국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이 와서 쉬게 되는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갈등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이 창세로부터 감추인 이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복음의 길과 방법을 취하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시작했다
세상보다 더 세상적이 되는 교회,
눈에 보기에 좋은 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떠났는데도
복음,
외모가 아니라 중심으로 사람을 취하시는 이 방법을 알지 못하는
교회와 사람은
자꾸만 하나님의 영을 떠나게 만드는 교회로 만들고
자꾸만 세상보다 더 세상이 되는 교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축복은
탁월한 선교사들의 헌신과 피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적인 측면에서 놀라운 축복입니다.
한국을 선교지로 정하고 선교의 길을 나선것은
20대의 탁월한,
집안과 학문과 복음에 대한 열정이 뛰어난 선교사들의 헌신입니다.
부끄러움입니다.
저 같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을 선교사로 보내셔서
이곳 아프리카에 심으셔서
겨자씨 같이 볼품없는 자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시는 하나님의 열심에
그저 눈물로 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말입니다.
왜 축복의 땅 대한 민국 한국 교회에
실력있고
능력있고
학벌에
좋은 신앙의 가정들에서 나오는 탁월한 사람들은
선교지로 오지 않느냐는 의문을 가집니다.
왜 공부 잘하면 다 담임목사가 되려하고
왜 능력이 뛰어나면 더 높은 곳에 서려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길을 따르는 세상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쫓았던 하나님의 아들들의 비애입니다.
보기 좋은 형들을 왕 세우려했던 사무엘 선지자의 눈입니다.
세상이 버린 모퉁이 돌로
그분은 그분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의 눈이,
세상의 것으로 덧 씌워진 다메섹 도상의 바울처럼
우리의 눈에 비늘이 벗겨져야만 볼 수 있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만 가능한
하나님의 교정하시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동기 중에 미국에서 박사 공부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인도로 가려 준비 한다는 소식을 페북을 통해 보았습니다.
가슴이 뜁니다.
눈물이 납니다.
복음을 복음으로 알며
높아지나 낮아지기 위해 준비하며 기도하는 그의 발걸음이
예수님을 닮았다 여겼습니다.
소식에 단 한번 댓글을 달지 못했습니다.
귀한 준비,
높은 학문에 좀더 세상적으로 외모적으로
잘 나가는 목사가 되는 것을 보는 기쁨도 기다려지나
더더욱 그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그의 가장 귀한 것들을
다시 그리스도가 창세로부터 감추인 비밀인
겨자씨의 영광을 그의 삶으로 살아갈 것을 생각하면
천국에서 복음이 되어 천사들이 기뻐 노래할 것이라 믿습니다.
이 생각에 감사와 감격과 눈물입니다.
<복음>은 <외모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창세로부터 감추인 비밀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알 수도 볼 수도 없는
겨자씨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이 가신 그 길은 세상이 별 볼이 없다고 여긴
작은 겨자씨의 영광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천국을
작은 겨자씨 같은 우리를 통해 이루어 가길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겨자씨가 아니라
높고 크고 세상적으로 보기 좋은 외모복음에 미쳐
온 한국교회가 널뛰는 것에 마음 아파해야합니다.
어디서 문제인지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고민하고 기도하고 금식해야합니다.
외모복음,
하나님이 이미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겨자씨의 영광을 통해 그분의 일들을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2010년 10월에 기록한 글 중에 있는 자칭 외모복음입니다.
이 글을 기록한 글을 링크합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http://www.lovesa.or.kr/jsp/board/view.jsp?type=U11&seq=120&cpage=10&searchType=&searchKeyword=)
<외모복음>
"나의 얼굴은 조폭 가문 중에 명문가문 출신이요
난지 팔일 만에 어머니가 눈물 흘린 얼굴이요
자라면서 인상만 쓰면 경찰에게 검문당한 얼굴이요
사춘기 때는 둘째라면 서러울 달표면 무허가 판자촌이요
결혼 때는 하나님께서 아내의 눈을 가리워야만 결혼이 가능한 얼굴이다.
이런 나를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역자로 부르셔서
이렇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니
내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노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람을 부르실 때 외모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그 중심을 보시고 부르심이라.
내가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지금까지 왔으니
오직 나의 외모를 통하여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라.
이와 같이 우리가 다 외모로 부른 부르심이 아니요
오직 그분의 뜻을 따라 각 사람의 믿음대로 부르심이니
각 사람의 얼굴과 외모는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피었다 지는 들풀보다 못하니
외모가 되는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 것이요
외모가 되지 않는 자는 원래 없음으로 기뻐할 것이라.
오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사람이 외모와 보이는 것에 끌려 욕심으로 미혹됨이니
보이는 것이 잉태한즉 후회하게 되고
후회한 것이 쌓이니 돌이키지 못하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것들은 빛들의 아버지 하늘로부터 오나니
그분은 중심으로 우리를 부르셨느니라.
그런즉 우리가 외모와 보이는 것과 겉모습에 잘 속나니
그 중에 제일 조심할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니라" (외모복음 1장 말씀)
* 지금은 새롭게 건축해서 없어진 남천교회 이전 교회당입니다.
이곳에서 복음을 듣고
이곳에서 복음을 알고
이곳에서 결혼을 하고
이곳에서 사역자를 하고
이곳에서 파송을 받았습니다.
나의 외모를 보지 않고
나의 중심을 이해하고 중심으로 사랑하고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는 곳,
나는 그곳을 하나님의 평강이라 말합니다.
나의 고향이라 말합니다.
나를 외모로 보지 않고 중심으로 대한 나의 가족들…
<고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