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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심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심판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심판하지 마십시오 (13:24-30)

 

우리는 자꾸 내가 심판을 하려합니다.

내가 교회 안을 정리하고 내가 사람을 갈아치우려합니다.

담임목사까지도 장로와 안수집사까지도 자꾸 우리가 갈아치루려합니다.

그것이 지금 모든 교회들의 문제입니다.

 

아닙니다.

완벽한 에덴동산에 뱀이 찾아왔습니다.

뱀이 완벽한 에덴동산에도 있었음을 우리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대안이 교회입니다.

지상의 천국입니다.

그곳에도 뱀이 있음을 우리는 자꾸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그곳에도 가라지가 있습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있고 힘들게합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13:25-26)

 

우리는 자꾸 가라지에 관심이 갑니다.

이곳에 가라지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가라지가 있는 곳은 에덴동산에 뱀이 있던것 같이

교회 안에도 가라지는 언제나 있고

있을뿐 아니라 존재감도 큽니다.

 

그래서 종들은 가라지를 없애자고합니다.

얼마나 보기 싫고 불편하고 문제를 많이 일으키면 없애자고 할까요?

 

그런데 주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13:29)

 

 

종들의 마음은 충성심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지금껏 일한 수고의 대가가 가라지로 사라질것에 대한

사랑과 애정입니다.

그래서 가라지를 없앨까요하니 주인은 <가만 두라> 하십니다.

 

애정이 많은 사람일수록

주인을 사랑하고 주인의 수고를 아는 사람일수록

열정이 많고 충성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가라지를 보기 힘듭니다.

가라지가 자리고 교회를 힘들게하고 순수하고 여린 자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보는 자체가 고통입니다.

 

그래서 종들은 빨리 가라지를 없애고 싶은 마음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려 이것들을 멸망시키자고 말한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주님은 그냥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하십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을 명하여 하늘로 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9:54-55)

 

 

그냥 가자고 것이 아니라 <꾸짖으시고>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자꾸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불을 내려 저것들 순간에 사라지게 만들어야하는데…

불이 내려 저것들 확 심판해야하는데…

저거 차에 치어 죽지는 안하나…

저거 병에 걸려 죽지도 안하나…

 

요한과 야고보의 마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그렇게 마음을 가지는 종들,

그것도 주인을 사랑하고 충성의 마음과 애정의 마음을 가진 사랑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며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그냥 두라> 입니다.

 

 

우리의 심판적 불을 기대하는,

우리 눈에 가라지처럼 보이고

정말 가라지 같은 저들을 향하여 주님은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이유를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13:29

 

 

첫째, 주님의 관심은 가라지의 심판이 아니라 곡식의 보호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것은 남아 있는 한사람의 양이 상처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이 내려 심판을 하면 불이 사람만 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가라지를 뽑는다고 쇼를 하면 일로,

가라지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안에 많은 연약한 곡식들이 함께

깊은 상처와 아픔으로 그들조차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꾸 심판하려는 사람들의 심보는 그것입니다.

나는 저들보다는 낫다는 교만입니다.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우하느냐는 교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이렇게 대우하고 잘되나보자 라는 마음이 요한과 야고보 마음에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고 내가 주님의 택함 받은 제자인데라는 우월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가라지로 인해,

가라지를 심판하려다 혹여나 곡식이 상하게 되는

어린 양들의 상처와 아픔을 깊이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라지가 득세할수록

우리는 곡식의 보호에 더욱 힘써야합니다.

가라지에 대한 심판 아니라

약하고 연약한 새싹들과 여런 영혼들에 대한 관심이 많아져야합니다.

가라지가 득세할수록

그들보다 많이 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발걸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그것이 천국은 씨를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고 말씀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13:24)

 

우리는 천국이 사람,

가라지에 대한 심판의 마음보다

곡식을 지키고 보호하고 세우려는 주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세상의 끝이 갈수록

곡식에 대한 마음보다

가라지를 심판하려는 마음이 강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가 되면

씨를 뿌린 자의 마음보다

자기들의 의로움을 이루려는 주인적 행세가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그만 두라고 하십니다.

주인이 끝까지 가보자고 하십니다.

끝까지 가보는 것이 중간에 가라지를 심판하는 것보다 좋으니

그만 두라고 하는데

우리는 자꾸 중간에 심판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종이 주인이 되려합니다.

주인은 심판을 그만 두라하는데

종이 주인행세를 너무 많이 합니다.

그래서,

그래서 종이 주인행세를 하고 종이 심판을 한답시고

가라지 하나를 뽑으면서

곡식 수십 수백 수천을 죽이는것은 생각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가리지를 뽑는다는 이유로 곡식의 상처와 아픔과 교회를 떠남을

무시하는 일은 없어야합니다.

가라지를 뽑는다면

곡식에게 어떻게 하면 상처가 없고 어떻게 하면 아픔이 없고

어떻게 하면 그들이 힘들지 않을지 많이 기도하고 고민해야합니다.

 

주인을 위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종노릇하는 일은 없어야합니다.

 

둘째, 심판은 주님이 스스로합니다.

 

주님의 심판은 끝에 하는 것입니다.

과정 중에 누가 가라지인지 누가 곡식인지 알지도 못하는 무지함의 종들이

주인 행세를 하며 심판 하는 것은 심판이 아닙니다.

 

그저 감정이 좋고

내가 기분 나쁘고

내가 보기에 좋은 일로,

가지 중에 두가지 못한 일로 저들을 심판하고 정죄하고

돌을 던지게 되는 것은 멈추어야합니다.

 

 

예수님도 심판은 성령께 맡겼습니다.

요나보다 크고 솔로몬보다 이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불도 꺼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은

그들이 가라지인지 알곡인지 알지 못하는 무지한 종들이

가라지로 착각하고 알곡까지 죽일까하는 염려와,

성령에 대한 위임과 겸손의 마음으로 주님은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심판을 성령께 맡기셨습니다.

내가 과정 중에 심판하는 것보다

성령께 일을 맡기는 편이 좋기에 주님도 그것을 선택하셨는데

우리는 자꾸 우리들의 교회 안에 일어나는 일들속에

가라지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심판하려합니다.

 

<가만 두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기억도 못합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가라지를 심판하는 심판적 칼부림이 아니라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순수하게 지켜가기에 그분께 전권을 드리는 겸손함과

성령께 심판을 맡기신 예수님의 위임 속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나라가 서로를 가라지라 심판합니다.

교회가 서로가 가라지라 거기서 내려오라 욕을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고

서로가 서로를 불로 심판하라고 기도합니다.

 

눈물입니다.

아픔입니다.

 

에덴동산의 뱀도,

죽음과 십자가를 넘어 부활하여 성령을 이땅에 보내신 주님도

아직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데

우리는 자꾸 우리가 심판합니다.

 

이것이 이미 우리 스스로를 가라지라 심판한 결과입니다.

가라지는 있는 곡식을 상처 나게 하고

아프게 하고 그래서 스스로 교회를 떠나게 하는 것이 가라지입니다.

 

가라지 속에서도 스스로 견딜 말씀을 가르치고

이겨낼 성령의 힘을 길러내고

성령의 검과 믿음의 방패로 이모든 가라지의 공격을 이겨내야합니다.

 

무엇이 교회입니까?

교회는 가라지는 지금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주권과 주님의 일하심에 자신의 전부를 맡기는 것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주님의 주님되심을 인정하는 교회!

그것이 주님이 원하는 교회의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의 일행을 예루살렘으로 지나지 못하도록 사마리아 마을은

누가 봐도 주님 앞에 걸림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마리아 마을에 불을 내려 심판하라는

요한과 야고보를 돌아보시며 꾸짖으셨습니다.

 

가라지를 심판하라는 교회들의 야고보와 요한들을 향한 주님의 음성이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겠습니까

아니면 꾸짖으시며 <그만 두라> 하시겠습니까?

 

어설푼 우리의 심판으로 많은 곡식들이 아파합니다.

 

심판을 멈추어야합니다.

세상이 가라지를 뽑자고 말할

에덴에서도 뱀을 그대로 두고

가롯유다가 자신을 팔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팔리움을 당하신 주님의 마음…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종들의 마음입니다.

 

들었던 돌을 멈추어야합니다.

들었던 낫을 내려야합니다.

칼은 칼로 망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성령이 교회를 세우시니

주님처럼

모든 심판을 성령께 맡기면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입니다.

주인이 종에게 말씀합니다.

꾸짖으시며 말씀합니다.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 하노라"

 

 

 

지금 심판해야합니까?

주님도 심판을 마지막까지 성령께 맡겼는데

지금 심판해야합니까?

 

성령보다 앞서가십니까?

그것이 가라지의 모습입니다.

성령과 함께 호흡하지 못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두렵고 무섭습니다.

내가 <가라지> 아닐까!!!

오늘은 주님의 음성이 두렵게 들립니다.

 

 

<가만 두라!>

 

 

 

 

  

  * 모잠비크 농장입니다.

 

모잠비크에 개척한 3 교회를 중심으로 농사와 가축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람보전도사님을 중심으로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워 지역마을과 교회에

먹을 거리를 해결하고 길게는 자립의 구도로 가기 위한 프로제트입니다.

2-3 정도 진행이 되었습니다.

감사하게 교인들과 함께 농사를 짓고 수익금으로 가정에 수입이 돌아가도록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가 바자회를 통해 나온 수익금을 주셔서 자금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해가 갈수록 수익금도 늘고 농사 노하우도 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자립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농사는 잡초와의 싸움입니다.

잡초를 얼마나 뽑아주느냐가 농사의 관건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주님은 가라지를 그만 두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주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래서 힘이 듭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뽑아야하는데…

너무 뽑고 싶은데…

 

그런데 진짜는 잡초들속에서 살아 남습니다.

잡초속에서 살아 남은 것이 진짜 가치 있는 것이 됩니다.

 

일본의 사과로 유명해진 기무라 아키노리라는 사람을 아실 것입니다.

농약을 치고 키워야 사과농사가 되는데 유기농으로 토양을 변화시켜 키우려다

자살까지 하려던 사람입니다.

9년을 기다렸습니다.

잡초가 나고 태풍에 사과가 다 떨어지고…

농약을 치지 않고 그렇게 기다린 10년의 세월이 넘자

사과 나무는 어떤 태풍에도 어떤 병충해에도 넘어지지 않고

지금 사과로 만든 스프를 먹으려면 6개월을 기다려야합니다.

 

주님의 주님되심을 믿는 .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곳에만 교회의 순수성과 거룩성을 지켜지며

주님의 교회를 주님께서 어떻게 세우시는지 보게 됩니다.

 

 

주님의 주님되심을 우리의 교회 안에서

우리의 속에서 인정하는 !

그것이 믿음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