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7 - 복음, 깨달음입니다 (마13:18-23)
왜 돌짝밭이 생기고 길가 밭이 생기고 가시밭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왜 이런 밭들이 생기는지 아십니까?
좋은 밭은 왜 좋은 밭입니까?
오늘 씨뿌리는 비유를 풀어 설명하시는 예수님이 명확하게 그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그것을 <깨달음> 입니다.
천국 복음의 핵심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닫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씨뿌리는 비유를 풀어주시면서 왜 좋은 밭이 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시작부터 설명하십니다.
그것을 천국 복음을 들어도
<깨닫지 못함>입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13:19)
왜 악한 자가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는다고 합니까?
그렇게 된 것이 길 가에 뿌려진 자라고합니다.
길가 밭이라고 합니다.
왜요?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 일어나는 밭이 길가 밭입니다.
돌밭에 뿌려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니 잠시 좋다가 뿌리가 없어서
어려움이 오고 힘든 일이 생기니 포기 하는 것입니다.
천국 말씀을 깨닫지 못하니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말씀이 말씀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국 말씀에 대한 명확한 깨달음이 없이 없으면
어려움도 힘든 일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 다 좋은 밭이 못되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우리는 환란과 핍박과
세상의 염려과 재물의 유혹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런 것들이 우리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서 악한 자가 그것을 이용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13:19)
우리는 복음을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자꾸 힘과 파워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보다는 뭔가 능력을 가지는데 우리의 모든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기도도 말씀도 설교도 모든 프로그램도 우리가 말씀을 깨닫는 것보다
우리의 능력을 쌓기 위해 이용하기 때문에 복음의 생명력이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능력은 씨라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일하지 우리가 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의 씨가 우리 안에 일하려면 우리 안에 이 천국 말씀을
<깨닫는 능력>이 생겨야합니다.
여기서 깨닫는 능력이 무엇입니까?
다들 능력을 좋아하시니 깨닫는 것도 <능력>으로 표현을 해보려합니다.
첫째, 깨닫는 능력은 어디서 옵니까?
절망의 끝자락에서 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부르신 사람들의 특징 천국 복음을 깨닫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인생에 절망이라는 벼랑 끝에서 이 세상이 소망이 없다고 느끼는 마음에서 천국 말씀의
깨달음은 능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절망의 벼락 끝에 선 사람들을 부르셨고
그들에게 친구가 되고 천국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유는요?
이 세상이 희망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천국 말씀은 많은 것 중에 한가지이기 때문에 결코 들리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세상의 절망의 끝자락에서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서 있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은 환경이 좋고 나쁨을 말하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내 마음의 밭이 다른 어떤 것도 희망이 되지 못한다는 고백을 드릴 수 있는
마음의 절망 상태 그 마음이 천국 말씀의 깨달음을 여는 희망의 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는 능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라
바로 인생의 절망이라는 벼락끝이 능력이 됩니다.
둘째,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요단강에 발을 담그셨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6-17)
소리를 곧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들은 소리는 소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함께함을 예수님은 확증하셨습니다.
성령으로 함께하시며 소리로 함께하신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깨달은 하나님입니다.
사도바울이 에베소교회에게 보낸 내용 중에 능력은 바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우리의 눈을 밝혀서 소망과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능력이라는 것입니다.(엡1:17-19)
예수님의 천국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원토록 함께 하겠다고 하신 그 말씀이 천국 복음입니다.
지옥은 다른 곳이 아닙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는 모든 곳입니다.
천국은 다른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모든 곳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이 없다고 느낀 인생 절망의 벼락 끝에 선 사람들에게
복음은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한다는 그 소식입니다.
그 음성입니다.
그것이 깨달아지는 사람은 이 세상 것에 원래 미련이 없었습니다.
소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팔아 천국 밭의 보화를 사는 것입니다.
그럼 깨닫는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셋째, 깨닫는 다는 말은 내 것을 전부 판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깨닫는 다는 말은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원어로는 이해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understand 한다는 말이며 동시에
그 이해한 것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걸고 행동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 깨닫는 다는 말이 무엇인지 다시 몇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바로 밭에 감추인 보화와 진주 장사 비유입니다.
깨닫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천국 말씀을 깨닫고 좋은 밭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비유를 통해 다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들의 공통점은 밭에 감추인 보화와 진주의 가치를 알고
자신의 전부를 팔아 그것들을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말한 깨닫는다는 의미는
천국 말씀을 듣고
자기의 전부를 팔아 그 하나를 사기 위해 모든 값을 치룬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씨 뿌리는 비유를 설명하기 전에
누가 내 형제며 자매며 모친이냐는 말씀에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그들이라고 하신 말씀을 먼저 하셨습니다.
우리는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는 의미를 겨우 교회 다니고
겨우 헌금하고 겨우 봉사하고 겨우 겨우 하는 그것을 깨닫는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천국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 전부를 <임마누엘>의 영광과 축복을 알고
그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전부를 다 드려 그 값진 것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입니까?
천국 말씀을 듣고 환란과 핍박과 염려와 재물의 유혹 때문에
이 감추인 보화보다 다른 것을 사고 먹고 마시는 것을 말합니다.
천국 말씀을 깨달으셨습니까?
그래서 자신의 전부를 다 팔아 그것을 사셨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복음과 말씀이 말씀하는 복음은 늘 다릅니다.
우리는 늘 내가 기준을 세우고 내가 원하는 만큼 드리고
그리고 나머지는 내 삶과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이 복음으로 생각합니다.
목사로서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사로서 말씀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가 듣고 내가 읽고 내가 아는 것 말고
복음이 말하고
말씀이 말하고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내가 아는 복음이 맞는지,
이 말씀이 내가 알고 있는 그 지식으로서의 말씀이 맞는지,
이 단어는 왜 사용을 했고
왜 이 말씀 앞에 이 말이 있고 이 말씀 후에는 이 말씀이 있고,
왜 예수님은 이렇게 설명을 하고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지…
성경이 말하는 말씀을 알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것을 너무 모른다는 무지와 아픔이 목사로서 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래서
날마다 그 말씀 앞에 서서 그 음성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럴싸한 예화도 하고
그럴싸한 철학과 문학과 정치와 사회 전반의 이야기로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목사가 말씀을,
성경과 성령께서 조명하시는 말씀의 의미도 잘 모르면서
세상이 말하는 교훈과 풍조와 기술과 기법들을 사용하는 것이 부끄러움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말씀 앞에 수년동안 서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그거 말씀이 말씀하려는 뜻을 알려고
묵묵히 날마다 같은 시간에 아니
하루 종일 그 말씀의 뜻과 그 단어의 의미와 왜라는 질문으로
열린 가슴으로 하늘을 바라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 말씀 한구절,
씨앗 하나가 내 안에 떨어졌다면
그것을 깨달았다면
내가 이렇게 살지 않을텐데…
내가 그 말씀의 뜻을 발견했다고
감추인 보화를 찾았다면 지금 보다 더 더 주님이 기뻐하는 삶을 살것이라는 확신.
나만이 아니라
내가 발견한 이 보화를 그들도 알게 된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목사가 말하든 말하지 않든
하늘에서 떨어진 참 복음의 말씀,
한 알의 씨가 그들의 삶에 깨닫게 된다면
그들의 삶은 전부를 다 드려 이 보화를 위해 살아가는
하늘의 사람이 될텐데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그렇게
오늘도 말씀 앞에 성령의 조명하심을 바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가가
우리의 평생을 좌우합니다.
30, 60, 100의 열매는 나의 열심이 아니라
씨의 능력과 생명력입니다.
다만
천국 말씀을 깨닫는 능력이 내 안에 있느냐 없느냐가 그것을 결정합니다.
가난하고 의에 주린 목마름이 어디를 향합니까?
천국 복음의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섰을 때 주님은 묻습니다.
왜 이렇게 살았는냐고?
그때 우리는 우리 목사 때문에,
한국 교회 때문에,
나를 상처 주고 나를 힘들게 한 그 사람 때문이라고 결코 말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천국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나의 무지 때문입니다.
그 무지의 밭은 바로 여전히 세상에 뭔가 얻을 것이 있다고 믿고
달려가는 나의 어리석음과 교만과 뭔가 더 가지려는 나의 욕심입니다.
여전히 뭔가 세상에 소망이 있다면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 천국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는 사람에게 깨달아지는
소식이 바로 천국 말씀, 복음입니다.
복음,
천국 말씀을 깨닫느냐 깨닫지 못하느냐가 결정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13:23)
우리가 깨달았다면
전부를 다 팔아 그것을 사게 됩니다.
깨닫지 못하니 여전히 갈등하고 좌절하고 도망하고 회피하는 것입니다.
천국 복음을 깨닫는다면
인생 전부를 거는 복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 희망봉입니다. (Cape of good hope)
먼 바다를 여행하던 절망의 바다 사람들이 절망의 벼랑 끝에서 발견한 곳이 이곳입니다.
그래서 이곳에 사람들이 오고 나라가 세워지고 아름다운 장소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절망의 벼락끝에서 발견한 그들의 희망봉을 통해
새로운 생명이 자라는 희망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런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절망의 벼락 끝에서 깨달은 천국 말씀이
그 사람을 살리고 가족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절망이라고 여겨지십니까?
그곳이 희망을 만나는 절망의 벼랑 끝이 될 것입니다.
모든 복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당신의 희망봉을 찾아주십시오.
그래서 당신처럼 인생 항해의 절망의 바다 끝에서
희망의 장소가 되게 해주십시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