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6 - 복음, 씨가 아닙니다 밭입니다.(마13:1-26)
우리는 신앙을 환경에 초점을 맞추려합니다.
환경이 좋아지고 더 좋은 일이 많아지고…
그것 복음의 본질이 아닙니다.
씨가 문제입니까 밭이 문제입니까?
에덴동산에서 환경이 문제였습니까 아담의 마음 밭이 문제였습니까?
예수님의 시험이 광야에서 했습니다.
주위에 환경이 뭐가 있어야 시험이 되는데 왜 광야에서 시험을 합니까?
뭐가 있어야 시험이 되는데 광야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시험의 본질, 신앙의 본질은 환경이 아닙니다.
환경은 이미 다 주어진 것입니다.
다만 믿음으로 반응하는 밭이 문제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시험은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시험의 본질은 우리의 마음 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여러가지 비유로 복음을 설명하십니다.
그 첫째가 씨를 뿌리는 이야기입니다.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
돌밭, 가시떨기 위, 그리고 좋은 땅입니다.
네 가지 땅입니다. 네 가지 밭입니다.
이 비유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밭입니까 씨입니까?
씨가 아닙니다.
밭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문제는 밭을 준비하지 않고 씨를 갈아 치운다는 것입니다.
씨를 문제 삼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씨를 문제 삼는 사람들,
환경을 문제 삼고,
축복의 유무를 문제 삼는 사람들을 이사야의 말씀을 들어서
<완악한 사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이 완악한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왜 비유로 말씀하셨을까요?
잘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서입니까?
말씀을 잘 풀어 설명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알아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13:11)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13:13)
허락되지 않은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13:14)
이상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하시는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어떤 사람은 천국 비밀을 알게하시고
어떤 사람은 천국 비밀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밭>의 비밀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씨뿌리는 비유의 핵심은 씨가 아닙니다.
씨는 이미 좋은 씨입니다
그것이 전제입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13:24)
말씀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밭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씨를 뿌려도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은
밭이 잘못되었다고 전제하시면서
그들은 아무리 보고 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를 주님은 <완악함>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13:15)
이 완악함은 다름 아닙니다.
두꺼워진 마음입니다 .
원래 어원은 <밀납으로 칠해진 두꺼워진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12장에서 복음을 설명할 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울어도 곡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씨가 아니라
밀납으로 칠해진 감각없는 마음,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굳은 마음의 상태를 완악함이라 표현합니다.
그래서 어떤 씨가 떨어져도 밭의 문제 때문에
씨가 싹을 틔우지 못하는 상태 그것이 <완악함>입니다.
완악함이 올 때 그러나는 증상은
첫째, 다른 사람들의 말이 안들리고
둘째, 내가 원하는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내가 원하는 소리만 들리고
내가 원하는 것만 보이는 상태가 <완악함>입니다.
이들에게 씨는 그냥 씨입니다.
희망이고 소망이고 생명의 근원이 아닙니다.
그냥 한낱 흩날리는 작은 씨입니다.
그래서 이 씨가 뿌리워져도 밀납으로 칠해진 두꺼워진 마음 때문에
씨를 받지 못합니다.
그럼 좋은 밭은 왜 좋은 밭입니까?
씨가 왔을 때 그것에 전부를 거는 사람이 좋은 밭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에게는 천국복음이 허락 되었다고 합니다.
왜 이들에게는 허락되고 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을까요?
결과론적으로
제자들은 그 씨가 뿌려졌을때 전부를 다 버리고 그 <씨>를 잡았습니다.
그것이 좋은 밭입니다.
어떤 밭이 돌짝밭인지,
어떤 밭이 가시덤불인지 어떤 밭이 길가 밭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씨가 떨어졌을때
그 씨에 전부를 거는 밭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자꾸 씨를 탓합니다.
우리는 자꾸 환경을 탓합니다.
우리는 축복을 환경의 형통이라합니다.
우리는 내 앞을 막는 것이 없는 것을 복이라합니다.
아닙니다.
<형통>의 원래 어원은 <뚫고 나아가는 힘>이 형통입니다.
요셉의 형통은 환경이 아닙니다.
그 모든 환경을 뚫고 나아가는 힘,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임재에 전부를 걸고
그 모든 환경을 이겨 나가는 작은 씨앗의 겨울을 이기고 나아가는 힘이
<형통>입니다.
그것이 <좋은 밭>입니다.
아무리 좋은 씨가 떨어져도 이 완악한 마음은
절대로 그 씨에 전부를 걸지 않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이고,
자신이 원하는 소리만 들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들려주기 원하는 소리,
예수님이 보여주기 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이 환경이 문제여서 선악과가 보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 있는 목적,
자기 속에 있는 형통,
자기 속에 있는 죄의 방향성이 그를 선악과로 향하게 했습니다.
신앙의 복은 환경이 아닙니다.
신앙의 복은 들리는 귀이고
신앙의 복은 보는 눈입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13:16)
복음은 좋은 환경 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씨를 씨로 느끼는,
그 작은 씨라도 생명처럼 여기는
나에게 소망없음과
생명의 씨로 기뻐하는 우리의 가난한 심령입니다.
어린 아이같은 마음입니다.
왜 열두 제자입니까?
왜 그들에게는 이 천국 복음이 허락되었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왜 어떤 사람은 선택되고 어떤 사람은 선택되지 않았는지?
선택된 사람은 그 작은 씨 하나에 인생을 거는 사람이고
선택되지 않은 사람은 그 작은 씨는 내 인생의 다른 어떤 것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선택되지 않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복은
밭입니다.
이 씨가 찾아올 때,
떨어질 때,
그것에 전부를 주고 살수 있는 마음의 상태 그것이 좋은 밭이고 복있는 인생입니다.
아직도 씨가 문제로 보이십니까?
아직도 환경을 바꾸려고 달려가십니까?
우리의 일은 밭을 일구는 일입니다.
씨는 늘 있습니다
씨는 늘 그자리에 떨어집니다.
문제는 그 씨를 씨로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눈과 귀>입니다.
마음 밭입니다.
사람들이 목사를 향해 책망합니다.
사람들이 설교자를 향해 원망합니다.
왜 그 모양이냐고?
아닙니다.
좋은 밭은 성경을 보고도 감동을 받습니다.
좋은 밭은 성경을 듣고도 영혼에 빛을 발견합니다.
성경이 있고
성령이 있고
내 좋은 밭이 있으면 그 사람은 삼십배, 육심배, 백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우리는 자꾸 환경을 찾습니다.
좋은 씨를 찾습니다.
좋은 형통을 찾습니다.
좋은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
좋은 것은 오직 들리고 보이는 내 마음 밭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자꾸 사람을 보고
환경을 보고 더~! 더~라고 외치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목사를 원하고
더 나은 교회를 원하고
더 나은 나의 환경을 원하기 때문에
들어야할 말씀이 안들리고
보여야할 영혼들이 안보이고
느껴야할 하나님의 마음을 못느낍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그 밭을 갈아 엎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갈아 엎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합니다.
하나님의 처음 일은 씨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씨를 생명이며 유일한 희망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의 완악하고 밀납으로 쳐 발라놓은 마음밭을 바꾸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를 바꾸지 않고 세상이 바뀌라합니다.
교회가 바꾸지 않고 세상을 바꾸려합니다.
내가 변하지 않고 목사를 변하라고하고
내가 땅을 기경하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을 갈아 엎으려합니다.
그것이 <완악함>입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광야에서 있었습니다.
요단강의 세례를 받으시고,
오직 한가지 기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
생명의 씨 한가지를 가지고 광야로 가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환경도 없고 나를 시험할 어떤 것도 없는 곳에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성령님은 아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씨가 아니라 밭이라고…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주님이 붙잡은 것은
이 말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이 말씀,
하나의 씨로 그분의 마음에 전부를 걸었습니다.
마귀를 이긴 힘은 바로 이 단 한마디의 <하나님의 씨>입니다.
배가 부르면
그 씨가 씨로 보이지 않고 지나가는 바람으로 보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씨는 씨가 되지 않고 그냥 많은것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기경은
그 하나의 씨가
전부로 여겨질 때까지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일하십니다.
우리는 배가 부릅니다.
생명의 씨가 씨로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완악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작은 씨가 전부로 보이지 않는 우리의 마음 밭입니다.
복음은 그 작은 씨가 전부로 여겨질 때
복음의 영광이 내 삶에 피어나는 것입니다.
<씨>가 아닙니다.
<밭>입니다.
씨가 씨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
그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 씨가 뿌려진 어떤 땅도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아무리 작은 민들게 씨도 작은 흙만 있으면 꽃을 피웁니다.
우리 인생에 우리가 할 일은 그 땅을 기경하면
언제나 주어지는 씨로 인해 열매를 맺습니다.
환경이 아닙니다.
오직 나의 마음밭 입니다.
세우려 하지 말고 땅을 기경해야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