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4- 복음은 성령에 대한 반응입니다. (마12:14-37)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예수님이 꼭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사람이 많이 좇는지라
예수께서 저희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계하셨으니"(12:15-16)
자신을 나타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곧 <성령>입니다.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바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2:17-18)
예수님이 자신을 알리지 말라고 하시며 경계하신 것은
자신이 세상과 다투고 싸우고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일 하겠다는 겸손의 표시입니다.
이사야가 전한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은 오직 성령을 통해서 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를 철저히 숨기시고,
사람들과 다투지도 소리를 치지도 않고
길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19)
예수님은 철저히 자기를 숨기시는데 그 이유는 복음의 사역은 결국 성령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예수님께 주셔서 그가 성령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 일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심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꺼져가는 심지도 꺼지 않고 상한 갈대도 꺽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그렇습니다.
성령을 통해 일하시는 예수님은 자신이 심판하지 않고
기다리고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을 성령께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12:20)
자신이 사람을 심판하고
자신이 사람을 정죄하고
자신이 사람을 어떻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십자가의 길만 가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세상을 심판하고
사람을 심판하시는데 그 일은 성령께 맡기겠다는 그분의 겸손함입니다.
그래서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도 정죄하지 않고
어떤 사람도 예수님이 사역하는 동안은 심판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복음은 예수님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결판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일은 바로 <심판>입니다.
성령을 따르면 구원이고 영생이지만
성령을 따르지 않으면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안식일에 관한 논쟁이
귀신들려 눈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는 일로 이어지고
이 일은 결국 성령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12:22)
무리들은 이것을 보고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안식일 문제로 예수님을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은 다른 이야기를합니다.
이 일은 한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을 힘입어 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12:24)
이 말에 예수님은 이 모든 사역의 핵심은 바로 성령임을 증언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12:28)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성령에 대한 말씀을 다시 던지십니다.
바로 내 말을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만 성령을 거역하면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1-32)
복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떠났던,
세상을 사랑해서 떠났던 성령께서 내 안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을 내시고
그 길을 걷게 하는 것은 성령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찾아오시는 성령을 거역하면 거기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은 결국 성령을 따르느냐 따르지 않느냐로 결정이 됩니다.
심판의 기준은 성령이 있는 자와 없는 자입니다.
성령을 따르는 자 따르지 않는 자입니다.
성령은 흙이냐 영원이냐를 결정하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역사합니다.
내 안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역사하는 성령을 따르는 곳에는
나무와 열매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은 그렇다 치더라도 성령의 일하심,
성령으로 일하시는 열매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무로 열매를 알듯,
성령의 일은 성령의 열매로 그것을 아는데 너희는 그 속에 악이 있어서
말로 성령을 거역하여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12:33
그래서 말을 잘 하라고합니다.
말이 곧 심판을 결정합니다.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12:37)
복음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일을 귀신이 했다고 하면
그 사람의 말이 결국 심판을 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은 그렇다 하더라도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이끄심을 거절하고 거부하면
거기에는 사함을 받지 못하는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사람들과 소리를 지르지도,
사람들과 다투지도 고함을 치지도 않았습니다.
이유는 성령께서 그분의 사역들을 진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말은 거역해도 되지만
성령의 말은 거역하면 안된다고 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12:32
말은 <선악과>와 같습니다.
성령의 일을 성령의 일이라 인정하고 두어야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거부하고 부정하고 외면하면 그것은 선악과를 내가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이 내 안에서 역사하면
그저 묵묵히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만 남습니다.
그러나 악이 쌓인 사람,
나무가 악한 사람은
말로 그 자신의 열매를 결정합니다.
오늘 예수님을 그들에게 이 말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고
말로 성령을 거부하지 말며
성령의 역사들 고침들 회복등을 부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성령의 일임에도
내가 싫은 사람,
내가 아는 사람들의 약함과 약점 때문에 성령의 일까지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조심해야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의 허물과 약함 때문에 성령의 일까지 부정하고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성령의 이끄심까지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조차도,
예수님의 말씀 조차도 거부하면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면 아픈 상처가 남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거부 한다는 것은
내 맘에 이끄시는 성령의 이끄심을 거부하는 것과 함께,
성령의 일하심과 성령으로 되어진 일들을 말로 부정하는 것도 포함이 됩니다.
그래서 말의 중요성,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결국 구원까지 연결이 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10:10]
복음은 성령의 일에 동참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성령의 마음에 따르는 것입니다.
복음은 성령의 일에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로마로부터의 압제를 저주했지만
하나님은 복음을 위해 로마를 유대에 있게 했습니다.
성령의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판단하지 못합니다.
아무렇게나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일이나
사역자의 일이나
사람의 일을 말로 정죄해서는 안됩니다.
말로 우리는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했던 말,
그 말이 결국 나를 결정합니다.
성령의 일을 입으로 시인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말 자체를 안해야합니다.
말을 내 뱉는 순간,
선악과를 따 먹는 것과 같은 일이 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가볍게
아무 생각없이 성령의 일을 판단합니다.
사람을 정죄하고 사람을 판단합니다.
성령의 일,
말로 거스려서는 안됩니다.
복음은 성령의 일하심 안에 찾아오며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성령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성령의 은혜와 영원의 풍성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조차도 성령께 전부를 맡겼습니다.
복음은 예수 예수 하며 뭔가 큰 것을 기대하며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고 그분의 생각에
나를 복종시키며 시인하는 순간 순간의 작은 삶,
그것이 복음입니다.
* 프레토리아에 있는 전쟁기념관입니다.
빈무덤입니다.
이곳은 흑인들과 벌인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백인들의 입장에서 세운 전쟁기념관입니다.
그런데 이 곳에 매년 12월 16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빈 무덤에 아프리칸스로 적힌 내용은 <아프리카를 당신을 위하여>입니다.
마지막 전쟁당시 이들이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아프리카를 당신께드립니다라고 맹세했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승리를 주셨음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남아공은 에이즈와 강도 강간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 중에 한군데입니다.
제가 사는 곳은 이 나라에서도 가장 높은 에이즈 환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 명 중에 한명입니다.
왜 이 나라가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고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가 도둑과 강도와
안전의 문제로 힘겨워하는가?
아프리카를 당신께 드리겠다는 그들의 말이
지켜지지 않아서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죽음을 두고,
생명을 두고 맹세한 말은 기억하십니다.
아니 작은 말도 성령의 일하심 앞에 기억하십니다.
말로 하나님의 역사를 거부하고 성령의 인도를 따르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픔입니다.
선교팀이 올 때마다 이 곳에 가면 저는
이 무덤을 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비록 전쟁에서 이겨서 기념관을 만들었지만
하나님께 드린 말이 아픔으로 돌아온 역사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위에서 밑을 보고 찍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