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복음 3- 복음, 자존심과의 싸움

복음 3- 복음, 자존심과의 싸움

 

 

 

 

 

 

 

 

 

 

 

 

복음 3- 복음, 자존심과의 싸움 (12:1-21)

 

기준은 어디를 향합니까?

기준의 방향은 복음의 방향과 같아야합니다.

복음의 방향은 사람입니다.

 

안식일의 목적은 사람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영원한 안식을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에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게 만든 것이 사람들의 기준입니다.

<사람> 위한 <기준> <기준> 위한 <사람>으로 변질 되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너무 고파 이삭을 잘라 먹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였다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어난 일들을 말씀합니다.

안식일이 존재하는지 말씀합니다.

 

다윗이 안식일에 성전 안에서 다윗과 제사장들이 범한 일을 말씀하십니다.

성전 <안>에서…입니다.


성전의 주인이고 성전보다 이가 여기 있다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12:6)

 

성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안식을 의미합니다.

성전 밖에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성전을 강조하십니다.

아무나 아무렇게나 안식일에 먹어도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의 방향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성전 , 그리스도 안에 있을 안식의 의미가 가능해집니다.

 

안식일의 주인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12:8)

 

주인과 함께 있는자는 성전 안에서 자유합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 있지 않는 자는 모든 것이 죄의 짐입니다.

이것도 지켜야하고 저것도 지켜야합니다.

 

그러나 안식의 주인이신 그분의 안식의 의미는 기준이 아니라

기준의 방향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안식의 의미와 안식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다시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바로 바리새인이 한손 마른자를 들어 그의 손을 안식일에 고치는 것이 가한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12:11 12)

 

안식의 목적은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위해 행할 선이 있는데 행치 않으면 그것은 옳지 않다는 것입니다.

 

안식의 주인되신 예수님께서

안식의 방향은 사람이어야한다고 하십니다.

사람의 고통과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 하는 것이 안식의 의미이고

그것을 위해 안식을 만드셨음을 다시 알게 하십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닙니다.

그래 그렇게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안식일도 주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지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안식의 주인의 의도와 다르게 갑니다.

안식의 주인이 세운 기준은 사람인데

사람을 살리자고 하는데,

먹이자고 하는데,

고치자고 하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주인을 죽이자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12:14)

 

사람이 적으로 지내다가 마음이 되는 것은 같은 적을 만들면 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과 군인들은 서로 적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새로운 공공의 적이 나오자 서로 친구가 됩니다.

 

평소 원수였는데 새로운 공공의 적을 만들면 얼마나 친한 친구가 되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안식의 의미를 설명해도

사람들은 사람을 위한 기준이 아니라 기준을 위한 사람으로 정신세계와 이념세계가 변화되면

어떤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기준만을 지켜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말도 맞습니다.

뜻도 맞습니다.

그런데 <자존심> 상한다는 것입니다.

 

기준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껏 내가 믿고 살아온 것이 틀렸다는 것에 대한

그것이 사람 때문에 드러났다는 것이 기분 나쁘고

죽일 만큼 미운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쫓겨나고 후에 일어난 가장 일은

살인 사건입니다.

가인과 아벨입니다.

서로 형제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은 서로를 죽이는 일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가 실패하자

나의 약함을 돌이키는 것이 남았습니다.

나의 기준을 바꾸는 일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기준을 바꾸지 않고

내가 틀리게 기준의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합니다.

 

그것이 죄의 속성이고

그것이 자기 중심적인 죄된 인간의 마음입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인데

율법을 위해 하나님도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무엇을 위해 율법을 지키는지

율법을 주셨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율법의 방향,

복음의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존심> <기준>입니다.

<감정> <하나님>입니다.

말도 맞고 논리도 맞고 하나님의 의도도 알지만

내가 기분 나쁘고 자존심이 상하면

사람은 <죽일> 사람입니다.

 

자존심이 기준인 사람의 특징은

 

첫째, 공공의 적을 만들 사람을 찾습니다.

 

이때 찾는 사람은 평소에 사람이 원수인지 아닌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내가 공격하려는 사람과 관계가 좋은 사람이면 됩니다.

생각에 동조하고 평소 내 생각 틀려도 사람을 죽이는데 의논할 상대면 충분합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12:14)

 

 

그래서 의논의 대상으로,

사람을 죽일 의논의 대상으로만 말이 맞으면

사람이 얼마나 정직한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지 마귀의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내가 죽일 사람의 흠을 가지고 있고

죽일 사람의 생각과 반대이면 무조건 의논의 대상입니다.

 

둘째, 살리기 위해 의논 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죽이기 위해 의논합니다.

 

여기에 무서움이 있습니다.

기준이 잘못되면 마지막은 반드시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기준의 적용을 자신에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세운 기준이 비록 <>이지만

의를 세우기 위해 자신이 의에 <적용 대상자> 삼으신 것입니다.

 

기준의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입니다.

잘못된 기준의 모양은 기준에 나는 예외를 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없이 쏟아내는 말과 기준을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하지만

나에게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적용의 예외가 나입니다.

 

이것은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이기 위해서 기준을 들이대는 곳에서

여지 없이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모든 기준은 자기부터 적용이 되야합니다.

안식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장 먼저 자신이 그것을 적용하십니다.

사람을 위하시는 ,

사람을 살리는 ,

그리고 자신도 예외 없이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걷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기준을 들이대며 말을

살리기 위한 것인지

죽이기 위한 것인지 살펴야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살리는 길을 택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좋은 길은 자신이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동일한 적용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되지 않는 이유는

기준의 뒤쪽에 숨은 나의 자존심이 있어서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사람은 되는데 나는 안되느냐는 자기 비교와

상한 자존심 때문에 결코 해결되지 못합니다.

해결은 겉으로 보기에 상대방이 죽어야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는다 해도,

예수님이 죽는다 해도 결코 자유함이 없는 자존심의 늪에서

스스로도 꼼짝하지 못하는 고통에서 몸부림만 있습니다.

 

 

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나는 그렇게 못하는데 하는 사람을 보면 맞는데

그냥 기분이 나빠집니다.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습니다.

 

자존심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자존심 때문에 죽게 됩니다.

기준이 잘못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기준이 바뀌면 사람들은 내가 죽여야 대상입니다.

 

사람이 없어져야 말이 맞고

사람이 죽어야 내가 기준이 되기 때문에

모든 세상의 사람,

나와 더더욱 가까이 있는 사람은 내가 이겨야 하고

내가 밟아야 하고

내가 눌러야 하는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대상자들입니다.

 

복음은 자존심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믿는 것입니다.

자존심의 끝은 살인입니다.

에덴동산 이후 처음 상한 마음은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이 형제를 죽입니다.

 

예배의 기준을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창4:5-6)

 

 

그럼 우리의 기준을 바꾸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기준을 바꾸지 않고 자기의 기준이 정당하다고 하나님께 조차도 항변합니다.

항변의 모양은 자존심을 건드린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형제여도, 가족이어도,

부모 자식이어도 그렇습니다.

 

기준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면

우리는 우리의 기준을 바꿔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기준보다

내가 세운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잘못된 길의 상처는 고스란히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되려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떤 바른 기준을 하나님이 제시해도 기준을 바꾸지 않고

스스로 세운 기준으로 자기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내가 목숨처럼 여기는 자존심을 복음이라는 이름 앞에 내려 놓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도 용서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이해하고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복음 안에서 받아들이는 것이며

더더욱 잘하는 것을 격려하고

더더욱 아낌없이 위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자존심 때문에 기준을 제시합니다.

복음의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주신 의도가 아닙니다.

다만 나의 기준,

나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공공의 적을 같이 찾아 의논하고

죽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아픔입니다.

세상은 상처입니다.

 

성전 안에서는 안식이 있습니다.

그분 안에서는 하늘의 평화가 있습니다.

내가 세운 기준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기준의 ,

이끄심의 삶에 살아왔던 모든 삶의 경험과 방법을 내려놓고

오직 따름의 삶만이 복음의 삶입니다.

 

 

우리가 가장 마음 상하는 것은

그래서 바로 사람입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

나보다 칭찬 받고 사람을 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나의 공격의 대상이고 미움의 대상이고

아픔의 대상입니다.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나의 기준이 바뀌지 않으면 안에 죽이려는 독과 악이 넘쳐납니다.

그것이 우리의 아픔입니다.

 

진리가 찾아 수록 우리는 더더욱 악이 강하게 일합니다.

하나님이 예배의 기준을 제시하면 수록

우리 안에 강한 악과 미움의 자존심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고 죽이고 싶고 악함을 의논하고 싶은 사람을 찾아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해야합니다.

자유하지 못하는가?

자존심입니다.

내가 세운 나의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합니다.

 

하는 것은 한다 박수치는 사람,

실수 것은 못했다 인정하는 사람,

기준 찾아오면 나의 기준을 정직하게 수정할 아는 겸손함이

우리를 자유케합니다.

 

성령을 따르는 ,

복음의 삶은

확실성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신뢰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 그분의 기준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죄의 속성이 세포세포 속에 박힌 우리의 기준을

날마다 새롭게 갱신하시고

교정하시기에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앞에서

불확실성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 가보는 위에 아버지의 손을 잡은 어린 아이처럼

길에 대한 신뢰가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신뢰로 길을 따라가는 아이의 마음으로

우리의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복음이 이끄는 영광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나의 기준이라는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복음 안에 자유하게됩니다.

 

 

 * 어둠에서 나오는 것이 복음입니다.

언제든지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세상의 길입니다.

세상에서 어둠으로 살던 나의 기준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오직 성령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이끄심을 따라 기준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성령안에 걷는 길이 길입니다.

 

길에 나의 자존심과 기준은 나의 걸림돌이며

아픔을 낳는 공장입니다.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기준이기를 기도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