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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2- 내게 와서 배우라

복음 2- 내게 와서 배우라

 

 

 

 

 

 

 

 

 

 

 

 

복음 2- 내게 와서 배우라 (11:25-30)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생기는가?

죽어라 수고하는가?

무거운 짐에 겨워 무너질 같은 무게로 힘들어 하는가?

 

인생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벌이자 사랑은

바로 인생의 수고와 무거운 인생의 짐이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

죄는 다른 것이 아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말은 자기 , 자기의 전부를 자기가 책임지고 살겠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이 어떤지 마음껏 살아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주신 벌이자 사랑이 종신토록 수고하는 것이다.

그리고 땅은 수고의 대가를 주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종신토록 수고해야한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다.

그러나 땅은 인간이 수고한 대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이 인생이다.

 

그런 인생이 생기게 이유,

수고하고 인생의 무거운 짐에 힘들어 하는가?

시작은 바로,

높아지려는 본성이다.

그래서 인생은 상향성이라 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향하여,

인류의 인생을 향하여 결론을 내신다.

 

"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11:28)

 

쉬게 한다는 말속에는

인류를 향한 형벌이었던 종신토록 내가 수고해서 내가 먹는 것을 멈추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

주께가면 내가 일하지 않고 내가 수고하지 않은 것을 먹게하겠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내가 수고하고 내가 먹고

인생을 위해 내가 죽어라 달려야 겨우 가졌던 인생의 열매를

이제는 주님께서 주시겠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쉬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복음은 인생의 수고의 대가를 이제는 주님이 주심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그 복음이 나에게 와도 우리는 여전히

인생을 위해 내가 수고한다.

거기에는 <복음> 없다.

 

복음은 인생의 열매는 나의 수고가 아니라

심지도 않고 짓지도 않은 열매와 집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복음을 듣고 복음을 믿고도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고

여전히 인생을 붙잡고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로 심히 고통하며 산다.

 

거기에는 복음이 없다.

 

둘째로 쉬게 하겠다는 의미는 짐이 아님을 알게 하겠다는 것이다.

 

인생이 무거운 짐으로 아파한다.

무거운 짐과 힘겨운 여정으로 피곤한 인생을 산다.

이유는 한가지,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이다.

수고해도 수고한 대로 얻지 못하는 인생,

그리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인생의 무게가 우리를 짓누른다.

 

짐이란 것이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었다.

에덴동산의 삶의 본질은 내것이 아닌것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시고 그곳으로 옮겨 놓으신 것이다.

처음부터 내것이 없고

내가 책임져야할 것이 없다.

단지 내가 가진 일은 주님이 맡기긴 청지기적 임무와 책임이다.

최종 책임은 하나님이 해결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나면 인생의 마지막 책임은 개인이 지는 것이다.

그러니 해야하는 모든 일은 짐이다.

맡은 일도,

책임져야할 가족과 돌봐야할 모든 사람도 짐이다.

이유는 내가 최종 책임자여서 그렇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내게 배우라고 하신다.

첫번째는 온유였다.

온유는 성령의 들숨과 날숨의 호흡이다.

성령의 이끄심 안에서 쉬는 날마다의 호흡이다.

 

성령이 인생을 이끌지

인생이 성령을 호령하지 않는다.

성령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것도 통달하시고 아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가장 쉬운 길로 인도하신다.

우리의 날숨은 바로 인도의 이끄심에 따름이 다이다.

나아게 책임을 지라하지도 내가 열매가 없음 때문에 아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온유에 이어 둘째는 바로

<겸손>이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11:29)

 

예수님의 짐이 가볍고 인생이 쉬운 것은 겸손함 때문이다.

겸손함이 짐이 가볍고 인생이 쉽게 하는가?

 

그럼 짐이 무겁고 인생이 어려운가부터 생각해야한다.

 

이유는 내가 책임져야한다고 생각해서이다.

내것이라고 생각해서이다.

인생,

내가 높아짐을 위해 사는 인생은 모든 것이 무겁다.

그런데 겸손은,

높은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이다.

높아지는 자리는 성령께 맡기고 다만 종의 영성으로 서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났다.

그의 탄생지는 유대땅에서 가장 작은 베들레헴이다.

그리고 그는 유대의 왕으로 오시면서 나귀 등을 타고 오셨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마21:5]

 

 

예수님은 인생의 짐과 무거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취하신 것은 첫째가 성령의 이끄심에 자신을 맡기는 온유의 삶을 사셨고,

둘째는 왕으로서 구세주로서 왔으나 그의 자리를

겸손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가장 작은 도시에

구유에,

겸손의 상징인 나귀를 타고 평생 종의 영성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2:6-7)

 

예수님이 배우라고 하신 것은 바로 <종의 형체>이다.

우리와 예수님의 다른 것은

우리는 주인의 형체를 태어날 때부터 가지려하고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중에서도 가장 천하고 비천한 곳에서 태어나시고

왕으로서 나귀를 타심으로 왕의 형체를 입지 않으셨다.

 

이것이 주님의 쉼과 안식의 비결이다.

 

우리는 쉬기 위해 주인이 되려한다.

우리는 안식하기 위해 많이 벌려고한다.

 

그런데 주님은 쉼과 안식을 위해 종의 형체를 입으셨다.

주님은 오늘 우리가 쉬게되고 짐이 가볍게 되는 길은 오직

종의 형체라고 그것을 배우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짐이 무겁고 인생이 힘든가?

높아지기 위해,

높아지고 주인되기 위해 벌고 가지기 위해서이다.

그곳에는 결코 쉼이 없다.

 

땅에서 쉼과 안식과 인생의 가벼움은 섬기는 <종의 형체> 가지는 것이다.

 

종의 형체가 중요한가?

체질적으로 주인 노릇 못하도록 못을 박는 것이다.

구약에서 종신토록 주인에게 귀속 되기를 원하는 종은 귀를 뚫어 표시를 했다.

그것이다.

 

주님은 스스로 주인되지 않기 위해 종의 형체를 입고

어디가서 말도 못하도록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선한 것이 없는 갈리리에서 사셨고

태어난 족보 자체가 성령에 의한 혼전 임신이며

탄생은 구유이고

어디 선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이유는 한가지다.

<자발적 > 형체를 통해 결코 하나님이 아니고는 스스로를 높이지 못하는

종의 영성으로 사시기 위함이다.

 

우리는 일이 부끄러움이다.

다른 사람을 섬긴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을 개의치 않으셨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자유함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음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체질적으로 세상의 때문에 부끄러움을 참지 못한다.

남들 밑에서 섬긴다는 자체는 결코 있을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의 가벼움과 쉼의 길은 오직 온유와 <겸손>이다.

체질적으로 겸손의 길이 어렵기 때문에

주님은 종의 형체를 입고

많이 작고 부끄러운 곳에서 나셨고

왕으로서 나귀를 타고 오셔서 섬기는 자의 삶의 길을 가시는 것이다.

 

겸손은 사람을 섬기는 종의 형체이기도하나

하나님에 대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단어이기도하다.

 

온유는 하나님께 대한 단어이다.

겸손에 사람에 대한 단어이다.

 

주님은 철저히 하나님께 성령의 이끄심 안에 온유로 반응하셨고

사람에 대하여 철저히 섬기는 종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종의 자리는 내가 책임지지 않는 자리다.

종의 자리는 인생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믿음 안에서 가능하다.

믿는 자만 가능한 종의 형체가 주님의 쉼과 안식의 비결인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주를 믿는 이유가

종의 형체를 가지고 달려가는지

아니면 주인의 형체로 달려가는지 돌아보야한다.

 

우리의 열심의 이유가 주인이 되어 편안한 삶을 원한다면

거기에는 복음이 없다.

우리의 쉼과 가벼움의 근원은 바로

종의 형체인 <겸손>이다.

 

이것을 배우지 않으면서 없이 달리는

인생에는 오직 무거운 멍에와 어려운 인생의 길밖에 없다.

 

주님이 직접 내게 배우라고 하신 두가지,

<온유> <겸손>

우리를 쉼으로 인도한다.

 

인류의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

그런데 인생을 뜻대로 하려고 사는 곳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다.

 

하나님에 대하여 온유하고

사람에 대하여 종의 형체로 자신을 섬기는 종으로 사는 곳에

기쁨과 자유가 있다.

 

주인으로 살면…

수고하고 무겁다.

다른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도…

 

쉽고 가벼운 길을 아는 것이 복음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외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주님은 외치신다.

복음을 알고도 여전히 쉬지 못하는 인생을 향하여…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11:29)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이다.

주님의 멍에는 종의 형체로서 섬기는 일이다.

 

우리의 인생은 섬길 정체성이 결정된다.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섬기는 자이다.

 

멍에를 메야 보인다.

멍에를 메지 않고 보는 모든 것은 허상이다.

주인되기 위한 방편이다.

 

멍에를 메고 배우는 인생이 때야 주님의 말씀이 들리고

주님의 길이 보인다.

전까지 아무리 달려도 보이지 않는 인생,

무겁고 수고하는 인생이다.

 

멍에를 메야 보이는 진리를 과연 얼마나 알까…

그래서 주님은 멍에를 메고 배우라 하신다.

매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쉼과 안식의 길…

 

겸손은 종의 형체를 입는 것이다.

그것이 쉼과 안식의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주인>에서 <>으로 사는 길을 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복음을 여전히 주인을 더욱 주인되게 하는 것으로 여겼다면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

더더욱 무거운 짐이 되는 것이다.

 

복음은 종의 형체를 입을 비로서 보이는 하나님의 신비이다.

 

 

 * 주인 되기 위해 복음이 필요하십니까?

종이 되기 위해 복음을 믿으셨습니까?

복음은 우리를 종의 형체를 입게하므로

우리에게 주인이 주시는 채우심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인을 하나님으로,

우리 인생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도 여전히 인생의 무게와 수고로 힘드시다면

우리는 여전히 종의 형체가 없이 주인으로 복음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하고

복음은 우리를 쉬게하고

복음은 복음 스스로 일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목격하고 간증하는 삶이 복음의 삶입니다.

 

지금껏 어떤 삶을 살았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쉼의 은혜가 우리 인생에게 찾아 오기를 기도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