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1- 내게 와서 배우라(마11:25-30)
예수를 처음 믿을 때는 복음의 기적과 능력에 마음이 가고
교회를 조금 알아가면서 하나님 믿고 잘 된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세월이 좀 더 흐르면서 뭔가 큰 일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열심히 해서
하나님께 큰 영광 한번 돌려야지 결심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뭔가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합니다.
그런데 열심의 끝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죄의 본능은 높음입니다.
가버나움의 악은 높아짐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내는 열심의 근본은 믿음의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내가 이루고 싶은 욕망과 그것을 이루려는 방법으로서의
믿음이 합쳐져서 이상한 모양의 새로운 종교가 탄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버나움의 높아짐의 길을 위해 예수를 이용하려했던 가롯유다의 법과 식입니다.
진짜 복음이 뭔지를 알기 전의 제자들입니다.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모세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열심을 내고
그 열심이 내 인생을 가버나움처럼 높아지게 만들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을수록 문제가 많은 교회가 됩니까?
왜 예수를 믿는 연수가 올랠수록 갈등이 깊어집니까?
권사님이 며느리와 갈등이 더 많고
안수집사 장로님들이 사회적으로 더 욕을 먹고
유명한 목사일수록 더 큰 문제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킵니까?
예수 믿는 것을 오해해서입니다.
복음을 오해해서입니다.
복음을 율법처럼 열심히 해서 뭔가 이 땅에서 뜻을 이루려는 세상적 가버나움의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복음을 이용해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한마디로 정의하십니다.
기적과 권능에도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 그들을 이렇게 정의하십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11:25)
예수를 믿고 우리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것에 강한 매력을 느낍니다.
이 슬기롭고 지혜있는 자들은 소위 세상적으로 열심해 해서 높아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늘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해서 이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복을 주셨다라고 하는
간증과 그들이 이룬 업적에 눈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나도 열심히 기도하고 나도 열심해 해서 이런 업적을 남겨서
간증집회도 하고 금메달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라고 결심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합니다.
열심에 목숨을 겁니다.
그래서 열심히 안하는 사람들은 사람도 아니라고 취급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세상의 영이 숨겨놓은 덫(trap) 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 덫은 우리에게만 아니라 사단이 예수님에게도 쳐 놓은 것입니다.
돌이 떡이 되게하고 높은 하늘에서 뛰어내려 다치지 않는 능력을 보여주고
세상 많은 사람이 부려워하는 영광과 부귀와 높음을 먼저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우리는 이 지혜롭고 슬기 있는으로 상징되는
열심으로 이룬 업적과 능력의 증명의 길을 통해 세상에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내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의 모습,
가버나움과 고라신과 벳세다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곧 말씀하십니다.
곧 감사하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이것>을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이것>을 나타내심을 감사하셨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11:25)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기에 감사하셨을까요?
이것은 높아짐에 목적을 두고 살았던 자들이 심판 받는 것을 말합니다.
높아짐에 목숨건 자들이 마지막에 결국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판받고
두로와 시돈보다 더 악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11:23-24)
한마디로 높음을 향한 추구의 삶으로 열심으로만 사는 소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심판을 받는 다는 것을 어린 아이에게 알게 하신 것을 예수님은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체질적으로 싫은 사람은 누군가?
예수 믿는 목적과 이유가 높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부러워하는 잘나가는 사람입니다.
기적과 권능에도 머리를 숙일줄 모르는 스스로 다 안다고 스스로 남들보다 낫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철저히 하나님 나라의 길과 법과 숨기시고 싫어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원하시는 예수 믿는 삶,
복음의 삶이 도대체 무엇인지 답을 말씀하셔야하는데
어김 없이 그 답을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으로 답을 주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11:28-30)
한마디로 말하면 내게 와서 내게 배우라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이 진 멍에과 짐이 너무 크고 힘든데 그것이 쉽고 가볍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에 그것을 우리가 배울 때
우리의 인생은 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배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복음에 대해 오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배움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과 <겸손>입니다.
<열심>의 반대는 <온유>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떨기 나무에서 만나기 전의 모습을 말하려면 하나님을 향한 열심입니다.
그러나 그 열심의 끝은 살인자입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을 믿는 참 의미를 깨닫기 전 하나님께 하던 향변의 내용은 나의 열심입니다.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왕상19:10]
여호와를 향한 잘못된 열심의 끝은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사도 바울의 열심의 끝은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고 다른 사람을 감옥에 잡아 넣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은 늘 나를 죽이고 다른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복음에 대한 잘못된 오해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철저한 무능과 죄로 나의 모든 열심과 방향은 하나님의 길과 반대라는 것이 복음의 전제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결코 선한 것이 없고 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곳에 복음의 길,
생명의 길, 영생의 길로 예수께서 그 길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하나님께 가는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의 길과 삶을 산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유일한 길,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었지만 믿는다는 삶의 길을 어떻게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천국을 들어가는 자격을 얻음과 동시에
천국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천국의 삶을 보장 받았지만
천국의 삶을 사는 것에는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그 삶을 이야기 하십니다.
내게 와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삶이 무겁고 수고한 인생을 향하여
어떻게 하는 것이 쉽고 가벼운데 그 삶에 대하여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바로 <온유>입니다.
이 온유의 단어를 이해하려면 모세를 이해야합니다.
온유하면 바로 모세를 향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셔서입니다.
온유를 우리가 오해하는 것은 성격이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아닙니다.
온유는 사람에 대하여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붙이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성에서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를 하나님이 주셔서입니다.
[민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가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잘 하는 것이 성격적으로 온유합니까?
십계명을 가지고 왔는데 사람들이 우상을 섬기니까 돌 판을 깨버리는 사람이 온유합니까?
지팡이를 두번씩이나 치는 사람이 온유합니까?
사람을 죽이는 성격의 소유자가 온유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온유하다합니다.
온유는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 붙이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스스로를 온유하다 표현한 것은 사람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에서 붙이는 단어여서 그렇습니다.
둘째, 온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온유는 <하나님에 대한 반응>입니다.
우리가 자꾸 착각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에 대하여 온유해야한다는 것 때문에 정작 복음이 요규구하는
온유의 의미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온유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우리의 영적인 성품을 말합니다.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에 모세가 변한 것은
바로 반응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감정과 생각에 반응했습니다.
자기 감정이 가라 하면 가고 죽이라 하면 죽였습니다.
감정의 끝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 자기 감정에 충실한 사람의 열심은 결국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사람은 절대로 자기 감정에 충실합니다.
열심에 충실합니다.
열심이 특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복음을 알게 되면
나에게는 선한 것이 없다고 철저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생각과 나의 마음과 나의 감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따릅니다.
모세의 삶이 40년 동안 그일 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의 움직임이 바로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에 따르는 온유의 훈련입니다.
성령의 제 1법칙은 들음의 법칙이자 <온유의 법칙>입니다.
(성령의 법칙1 참고)
우리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날마다 구현되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바로 성령의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내 마음과 생각에 주시는 작은 음성에
그대로 반응하는 <온유의 발걸음>입니다.
<진리>의 반대는 내 <감정>입니다.
<믿음>의 반대는 <합리와 이성>입니다.
그 감정과 이성을 제어하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 길이 바로 복음인데 그 복음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성령께서 왜 마음에 오셨을까요?
성령께서 마음에 오신 것은 우리가 가장 가까이서 듣고 따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흙이 영생이 된 것은 우리 마음에 생기가 호흡으로 찾아오셔서입니다.
온유는 내 안에 계신 성령과 호흡하는 것입니다.
주시는 마음과 생각을 들이 마시고
내가 다시 그 호흡을 내 쉬는,
지팡이를 내 밀고
요단강을 건너고
만나를 걷고
작은 음성에 따름으로 성령의 호흡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유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그것을 무시하고
온통 내 감정과 내 생각과 내 이성으로 열심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세상에서 이름 한번 내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보겠다는 작심과 결심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피 눈물을 흘리게 할 뿐 아무것도 아닌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모세이고
세미한 음성으로 주를 만나기 전의 엘리야이고
다메섹 도상에서 주를 만나기 전의 사도 바울이며
부활한 주님을 만나도 세상이 무서워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할 수 밖에 없었던
성령 받기 전의 제자들입니다.
우리가 언제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까?
성령께서 우리 속의 성전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일어서고 앉고
말하고 하지 않고
마음이 일고 일지 않고를 발견하게 되는,
각 사람위에 임하여
성령의 호흡으로 들숨과 날숨의 발걸음을 걷게되는 순간이
우리가 세상에서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 능력은 다른 능력이 아닙니다.
오직 온유의 능력,
하나님의 음성과 마음에 반응하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성령의 호흡의 온유가 드러날 때 우리는 성령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성령에 반응하는 온유의 사람이기에
세상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는 순간,
우리는 천국의 길을 보장 받았지만
천국의 삶을 살지는 못합니다.
천국은 누가 사는가?
천국에서 사는 호흡을 하는 사람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 것은
천국에서 사는 천국의 호흡을 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온유함으로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죽어서 성령으로 영원히 사는 호흡의 삶을 산다는 것은 만무한 일입니다.
우리가 평생 예수를 믿고
복음안에 산다는 것은
이 온유의 삶,
성령과 호흡하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열심이 아닙니다.
열심이 아니라 충성입니다.
열심은 사람에게 붙이는 단어가 아닙니다.
순종이고 충성입니다.
성령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생각과 마음을 주실 때
오직 그 생각과 마음에 반응하는 것이
세상에 대하여
육신에 대하여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면 평생 열심히 살았는데
끝에 여호와를 향하여 나의 특심과 열심이 대단해서 나만 남았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게되고
내가 너를 모른다고하시는 주님의 음성만 들릴뿐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성령의 호흡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
내 안에서 성경의 말씀을 들을 때 주시며
설교를 듣고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통해 주시는 그 마음과 음성에
온유의 음성으로 들숨 날숨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지혜롭과 슬기 있는 자들은 결코 하지 못합니다.
오직 자기의 들숨과 날숨의 호흡만 있습니다.
자기의 감정과 목표와 이성과 합리로 자기의 높음을 추구하지
이렇게 간단하고
어린 아이도 나이드신 어른도 할 수 있는
너무나 평범함 속에 숨겨 놓으신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이 진리를 어린 아이들에게 드러내신 것,
이 온유의 간단하면서도 성령의 호흡안에 사는 길을 만드신 것이
오직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11:25-26)
복음은 놀라고 대단한 것 속에 숨겨놓지 않으셨습니다.
어린 아이도 할 수 있는 평범함 속에 숨겨 놓으셨습니다.
세상은,
미혹하는 자는
자꾸 열심 뒤에,
더 높은 것 위에,
더 열심히 하는 곳에 복음이 있다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우리를 부추깁니다.
열심은 우리의 인생을 허무하게 만듭니다.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응하는 온유,
바로 성령의 들숨 날숨의 온유가 우리의 삶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나의 열매가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서 주시는 들숨에 나의 날숨으로 반응할 때
그분이 맺으시는 그분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내 열심으로 이룬 내 이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룬 성령의 열매가 내 삶에 가득한 것입니다.
산상수훈에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했습니다.
땅은 전쟁을 통해서만 받습니다.
이긴 자만 받습니다.
이긴 자는 나의 무기인 나의 감정과 힘과 능력과 생각과 합리적 사고가 아닙니다.
오직 그분이 주시는 생각,
그분이 말씀하시는 음성에 순종한 나의 순종에 승리가 있고 땅을 얻습니다.
여리고성을 이기는 방법이
세상 사람,
슬기 있고 지혜로운 자는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군사를 준비하고, 무기를 준비하고 전략을 준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온유의 사람은 성령의 들숨 앞에 귀를 귀울이고
그분이 요구하시는 날숨의 발걸음,
날마다 여리고 성을 묵묵히 도는 온유의 발걸음을 드리는 것 뿐입니다.
아직도 여리고라는 세상을 향하여 열심이라는
전략과 방법과 감정과 이성과 합리로 달려가십니까?
그래서 짐이 무겁고 삶이 어렵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
주님은 아십니다.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
그러나 쉽고 가벼운 인생의 길을…
그것이 온유의 삶,
성령의 들숨 날숨의 삶입니다.
위대한 삶은
들숨과 날숨에 전부를 거는,
작은 성령의 호흡이 이룬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끝없이 반복하시는 말씀이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작은 일!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일!
<성령의 호흡>입니다.
이 일로 우리의 평생이 결정납니다.
<열심>으로 사시렵니까 아니면 가장 작은 <호흡>으로 사시렵니까?
<복음>은 업적이 아니라
<호흡>입니다.
* 그네를 하나 타는 것도 왔다 갔다를 잘 해야합니다.
갈 때와 올 때의 흐름을 잘 타야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들숨과 날숨의 호흡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서 높아지는 가버나움이 아닙니다.
복음은 잃어버린 우리의 성령의 생기,
성령의 호흡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 호흡을 할 줄 아는 사람만 천국에서 천국을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이 땅에서 성령의 들숨 날숨의 호흡을 하는 사람만
이 땅에서 천국을 살고
저 천국도 보장 받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성령의 호흡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가 필요했습니다.
십자가가 진정한 십자가로 우리에게 의미 있으려면
참 성령의 호흡을 할 때입니다.
성령은 십자가를 지나고 십자가는 성령을 향합니다.
성령의 호흡!
죽느냐 사느냐
영생이냐 멸망이냐의 중요한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