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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에 대한 오해 3- 기적과 능력이 임하면 된다는 오해

복음에 대한 오해 3- 기적과 능력이 임하면 된다는 오해

 

 

 

 

 

 

 

 

 

 

 

복음에 대한 오해 3- 기적과 능력이 임하면 된다는 오해(11:16-30)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토양입니다.

 

씨가 문제입니까 땅이 문제입니까?

씨뿌리는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씨가 아니라 토양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고라신과 벳세다 그리고 가버나움을 마음 놓고 욕하십니다.

이유는 기적과 권능을 많이 베풀었는데도 그들이 변화되지 않아서입니다.

 

"예수께서 <권능><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11:20)

 

우리는 복음에 대해서 오해 사는 것은

권능과 기적을 보여주면 회개하고 예수를 믿겠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오늘 이시간 예수님이 오셔서 권능을 베풀고 기적을 보여줘도 안믿을 사람은 안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셔서 직접 권능을 행해도 안믿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전에 시대를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세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11:16-17)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의 시대까지 특징은

자기가 모든 것의 기준입니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세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기다리던 세례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외쳤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고 세례요한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귀신 들렸다고 말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11:18)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니까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특성은 자기 기준입니다.

다른 사람이 환경이 아닙니다.

내가 먹으면 먹는 사람이 맞고

내가 먹으면 먹는 사람이 정상입니다.

 

그래서 지금 세대는 피리나 곡을 해서 풀어지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고

아무리 예수님이 기적을 베푼다 한들 그것으로 변화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오해입니다.

아무리 권능을 행해도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살기에

기적과 권능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복음이 능력과 함께 찾아오면 사람들이 믿고

나에게 능력이 많이 주어지면 나를 통해 하나님께 많은 영광이 임할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가짜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능력을 받으면 사람은 반드시

자기 영광에 취해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됩니다.

 

복음의 원리는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은 권능과 기적으로 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권능과 기적으로 찾아간 고라신과 벳세다 그리고 가버나움을

향하여 책망하셨습니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11:21)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면 그 성이 오늘날까지 있었으리라"(11:23)

 

 

이들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이들이 권능과 기적에 외면했을까요?

복음은 권능과 기적으로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을까요?

말씀이,

씨앗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땅입니다.

토양입니다.

도시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잘나가는 도시들입니다.

토양이 다른 어떤 사람이나 능력과 권능을 우습게 여기는

<높아짐> 토양을 가지고 있어서입니다.

 

 

애굽에서 행해진 열가지 재앙 중에

바로왕이 우습게 여긴 재앙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세의 재앙을 자기들의 술객들이 동일하게 행했을때입니다.

 

나도 정도는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 술객들도 자기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므로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출7:22]

 

복음을 능력이나 권능으로 접근하면

세상의 법과 길과 식과 같아집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런 능력이나 권능으로 바꾸지 않습니다.

오늘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정도는 나도 한다는 높아짐의 토양속에 있어서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능이나 기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능이나 기적이 아니라 한마디도 그들의 심령에 찔러 쪼개는 <토양의 준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많은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일하시는 번째 사역은 말씀,

씨앗을 뿌리는 것이 아니라

<토양을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능력과 권능으로 접근하는 어리석음을 가집니다.

그러나 방법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입니다.

그들이 나를 따르는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동일합니다.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주를 따르게 하는 것은 권능과 기적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복음이 복음으로 찾아가게 하는 것은

땅의 <소망 없음> 대한 인식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토양의 준비는

첫째, 우리의 소망 없음에 대한 인식입니다.

 

가버나음의 특징은 높아짐입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11:23)

 

이들 권능으로 기적으로 변화되지 않는 곳의 토양의 특징은

하늘까지 높아지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마음이면 어떤 말씀,

어떤 기적과 권능이 와도 돌이키지 않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와도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못하는 일은 높아진 그들의 마음에 복음을 넣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넣기 위해 우리 가운데 낮아짐을 허락하십니다.

나에 대해서 소망 없음에 대한 인식이 찾아올

 우리는 권능과 기적이 아니라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권능을 달라고 기도하지말고

적은 말과 능력으로도 일할 있는 토양을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나에게 권능을 달라고 기도도 해야하지만

진정한 능력은 성령의 임하시는 ,

토양의 변화입니다.

 

토양은 한번의 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토양의 변화는

돌이 빠져야하고

작은 돌들을 걷어내야하고

흙을 뒤집고 비료를 뿌리고 비가 와야하고

땅이 씨를 받아들이기에 적당한 체질로 변화될

씨가 뿌려지면 뿌리를 내리고 가지가 생기고 잎이 생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토양의 변화는 생각하지 않고

씨의 능력,

말씀의 능력,

말과 사역의 권능만 구합니다.

 

아닙니다.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토양이 문제입니다.

 

복음의 대한 오해 세번째는 권능으로 접근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기적과 능력이면 해결 된다는 오해입니다.

 

주님도 못하는 일을 내가 하려합니다.

주님도 고라신과 벳세다 그리고 가버나움에서 처참하게 물러나셨습니다.

왜요?

세례요한이 준비를 시켰지만

그만큼 세대는 자기 중심적이고

높아진 마음 때문에 복음이 복음으로 여겨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보다 복음처럼 보이는 것이 많은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복음보다 달콤하고

복음보다 유혹적이고

복음보다 재미 있는 것이 많은 세상에 사는데

지나가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한다고 그들이 말을 믿겠습니까?

 

복음이 복음이 될려면

그들의 토양이 준비되야합니다.

그래서 기도해야합니다.

 

사람,

교회,

도시와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면

하나님 복음의 토양이 되게 주옵소서라고!

 

복음이 없어서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토양이 되지 않아서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입니다.

먼저 땅을 준비시키신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마3:3)

 

 

복음의 <능력>보다 복음의 <토양> 우선입니다.

예수님도 책망한 도시에서의 권능과 기적을 우리는 복음이라는 이름하에

다시 구하고 다시 실패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복음은 능력과 권능이 우선이 아니라

준비된 토양의 가난한 심령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가난한 하고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시51:17]

 

 

능력과 권능으로 일어난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이 와도 핍박하고 죽입니다.

왜요?

자기의 능력과 권능으로 자기의 세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이 아니라

상한 심령과 준비된 토양을 달라고 기도해합니다.

 

능력으로 임한 곳에는 철저한 자기 헌신과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능력과 권능의 장소는 하나님을 외면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능과 기적보다 상한 심령의 토양입니다.

 

권능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주님이 주시면 가집니다.

그러나 상한 심령의 토양은 주님도 어쩔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허락한 아픔과 눈물이 축복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가난한 심령과

어떤 말씀과 뜻에도 아멘으로 나아가는 상한 마음의 토양이 축복이며

복음을 복음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도 못한

권능을 통한 복음의 일을 멈춰야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상한 심령이면,

사람들의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의 상한 심령을 예수님이 찾아가자

강제가 아니고 강압이 아니고

마음과 물질과 삶을 열어 복음이 복음되게한 삭개오의 삶을 기억해야합니다.

 

복음은 때로 권능이 일을합니다.

그러나 권능이 권능되게 하고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상한 심령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땅에서 처음으로 말씀을 전파하시면서 전한 것이

 

<심령이 가난한 >입니다.

복음은 소망 없는 마음에 피어난 영생의 꽃입니다.

 

 

 

 

 * 성령의 권능은 우리의 소망없음 위에 피어나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소망없음의 고백없는 권능은 다시 우리를 아담되게하고 다시 바벨탑을 쌓게 합니다.

평생을 살며 복음을 붙들고 사는 동안

땅에 소망 없음과 하나님의 하나님의 되심이 아름답게 드러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태어나 아이에게나

평생을 달려온 나이든 노인에게나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은 상한심령에만 보이는 천국의 문입니다.

천국의 삶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