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대한 오해 2- 복음의 상향성과 하향성에 대한 오해(마11:2-24)
예수님이 친히 말씀합니다.
"나 때문에 실족할 수 있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11:6)
누구나 다 실족하기 때문에 실족하지 않는것이 복이 있다고까지 말할 정도입니다.
누구나 다 실족할 수 있고 오해할 수 있는 일이 예수를 믿는 것,
<복음>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실족하게 된다는 말입니까?
무슨 이유로 실족하게 된다는 말입니까?
첫째, 복음의 상향성에 대한 오해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는 솔로몬도 아닙니다.
다윗도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아닙니다.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11:11)
사람들이 광야에서 본 사람은 선지자이며 선지자보다 더 큰 사람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예수님의 나심과 함께 미리 탄생을 예고하고 준비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길을 친히 준비한 위대하고 큰 사람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11:9-10)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인정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비하는 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낳은 자중에 가장 큰 자이지만 천국에서는 가장 작다고 말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11:11)
예수님도 인정한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세례요한이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도 저보다 크다고 합니다.
이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야합니까?
참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그럴까요?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해를 하면 그것보다 쉬운 이야기는 없습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수 없이 듣고,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 해야한다고 수없이 말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목숨 걸고 요한처럼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이보다 큰 자가 없는데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이보다 크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해를 해야합니까?
인간의 본질은 상향성이라 했습니다 .(인간의 본질 노트참고)
그래서 인간은 철저히 큰 것, 높은 것,
나보다 나은 것을 향하여 열정과 목숨과 명분을 다합니다.
그래서 늘 높이 오려고하고 더 큰 자 더 높은 자 더 이름 있는 자가 되려하고
되지 못하면 그런 사람과 친분을 가지거나 그런 사람과 관계 있음을 곧 나의 큰 자의
반열에 있음으로 연결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세상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세상의,
인간의 본질의 측면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선지자 보다 크고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예비하고 그분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언 되어졌고
그와 함께 일했고
그분의 길을, 천국을 예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세례요한은 세상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자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천국의 원리를 인간의 본질인 상향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절대로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천국의 원리로 보면 너무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는 가장 <작은 자>를 섬긴 자가 가장 <큰 자>입니다.
율법과 선지지의 예언은 요한까지입니다.
세상적인 본질의 적용은 요한까지라는 말입니다.
세상적으로 인간적으로 볼때
세례요한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인정한 여인이 낳은 가장 큰 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천국에서 가장 작은자 보다 작은 자입니다.
이유는 그는 온 세상이 다 알고 온 유대인이 그렇게 기다리던 유명한
메시야, 그리스도,
유대의 왕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사람을 위해 준비하고
대통령을 대접하고
세상이 다 아는 사람을 위하는 일은 세상적으로 가장 큰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천국에서 그것은 작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 본질의 상향성에 대한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천국은 한마디로 <하향성>입니다.
세상은 에덴에서 하나님이 지어놓으신 천국의 법과 길과 질서를 무시해서 나온 곳입니다.
그 세상의 법과 길은 늘 상향성의 특성을 가집니다.
그래서 더 큰 자를 섬긴 것이 큰 자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임하면,
천국을 예비한 요한 이후,
천국이 실제적으로 임하는 곳에는 이 원리가 전혀 먹히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상향성이 아니라 하향성의 원리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왜 자연을 보면 아름답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계시가 아름다운 것은 그곳에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향성의 원리를 그대로 보기 때문입니다.
물은 흘러 흘러 아래로 갑니다.
모든 것들은 떠남이고
버림이고
자기가 죽어 죽어 새로운 생명의 영광을 피우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이
자연 계시의 현장입니다.
세상만,
사람이 사는 이 죄된 세상만 상향성의 원리안에 충실합니다.
그래서 그런 관점으로 세례요한은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이지만
천국의 본질,
천국의 삶을 사는 하향성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극히 작은 자 중에 더 작은 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오해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상향성>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믿고 나아가는 방향이 세상보다 더 상향성으로 나아갑니다.
높아진 사람이 더 추앙받고
높고 이름있는 사람이 더 아름답게 묘사 되는 곳이 교회 안입니다.
다 세상이 심은 상향성의 원리가 우리 세포세포 속에서 춤추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들의 수고와 노력과 그들의 열심으로 이룬 높음과 이름을 무시하거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결코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천국의 높음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의 이런 인간 본질의 상향성은 요한까지라고 말씀합니다.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11:13)
인간의 크고 높음에 대한 개념도 요한까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로 인해 실족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믿었던 우리가 추구했던 상향성에 대한 인간 본질의 반대가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도 세례요한도 오해하고 실족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천국의 삶,
천국의 원리,
복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자를 준비한 세례요한은
인간의 본질적 측면에서 가장 큰 자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입니다.
천국의 삶은 <작은 자>를 섬긴 자가 <큰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큰 자이나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입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장 큰 자를 섬긴 가장 작은 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천국의 삶은 세상의 삶의 원리와 반대입니다.
큰 자를 섬기고 큰 자가 되는 것이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를 섬기고 작은 곳에서 작은 것에 충성하는 것이 곧 칭찬 들을 일이라는 것입니다.
상향성의 원리가,
낡은 가죽 부대가 내 세포속에서 춤추는 이상
어떤 복음도 복음이 되지 못하고
결국 불법을 행한 자들이 되어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생깁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예수님 때문에 실족하는 일이 허다하게 일어납니다.
아니 이 세상을 살면서 복음과 충돌하는 우리의 본질 때문에
늘 갈등하고 허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세상의 원리와 반대라 했습니다.
큰 자를 섬기는 자가 큰 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큰 자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심판과 마지막에 주님의 질문과 답은 작은
자를 섬겼느냐로 예수님을 섬긴 것으로 여기다는 것입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25:40]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눅17:2]
큰 자를 섬기는 것 누가 못합니까?
큰 자와 가까이 있는 것 누가 못합니까?
섬김의 대가가 있는 사람을 섬기고,
나에게 돌아올 보상이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 누구나 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올 보상 없는 사람,
나에게 돌려줄 수고의 대가가 없는 사람을 섬기는 것이 진짜 큰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세상은 큰 자가 되려합니다.
그래서 더 큰 자를 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큰 자를 섬기는 자는 가장 작은 자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세상에서 큰 자를 섬기는 마지막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섬겼으니 그보다 큰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직접 섬기는 일은 없습니다.
작은 자 속에 숨어 계시는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보고 내 안의 상향성을 추구하는 인간 본질을 보야합니다.
우리는 작은 자를 통해 그리스도를 봐야합니다.
우리의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약한 자 속에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 그리스도를 구원하는 일이 우리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참 큰 자입니다.
예수님의 갇힌 자리에 찾아가는 것이 큰 자입니다.
눈물을 닦아주고 형편이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들,
큰 자들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세례요한이 되려합니다.
더 큰 자를 자꾸 섬기려합니다.
더 큰 사람 되려합니다.
더 큰 자가 아니라 작은 자가 우리 옆에 많은 사람이 진짜 큰 자입니다.
더 큰 사람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
더 큰 사람은 이 땅에서 요한 이후에 없습니다.
큰 사람의 끝은 요한까지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하늘로 가신 후에 우리에게는 오직 큰 자가 아니라
오직 작은 자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신을
<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 > 라고 소개합니다. (엡3:8)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고전15:9)
큰 자는 세례요한으로 끝이 났는데 우리는 자꾸 세상의 원리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려합니다.
오직 작은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작은 자가 보이는 사람만 하나님 나라에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큰 자가 되려하고
내가 높은 자가 되려하면 거기에는 하나님나라고 그리스도고 만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 작은 자 > 속에 계십니다.
그 작은 자는 위에 상향성을 추구하는 인간본질에 있지 않고
천국의 본질, <하향성>속에 숨어 있습니다.
천국의 본질성은 천국을 향하기에 상향성입니다.
그러나 그 현장은 철저히 하향성속에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천국을 향한 상향성이어야하나
그 삶을 완성하는 것은 세상의 작은 곳,
작은 자속에 있기에 철저히 하향성이어야합니다.
이것을 오해하면 평생 살고나서 실족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이고 천국입니다.
숨바꼭질
아담이 죄를 짓고 하나님과 숨바꼭질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천국이 임하고
하나님이 숨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숨바꼭질을 하십니다.
에덴 동산에서는
하나님이 아담을 찾았지만
갈보리 십자가에선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어디에 계시는지…
작은 자 속에 숨어 계시는 하나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
크고 높고 위대한 곳에는 계시지 않는,
오르셨다 높아지면 다시 숨어 버리시는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푸시다 다시 깊은 곳으로 숨어버리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는 기적의 한 가운데
여인이 낳은 자 중 큰 자 가운데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가장 작은 자들과 함게하시는
숨바꼭질 하시는
꼭 꼭 숨어 계시는
에덴에서 나를 찾던
나를 부르시던 그 하나님!
이제는 내가 숨어 있는,
숨바꼭질 하시는 그 하나님을 찾아야합니다.
숨바꼭질…
꼭 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감사 기도했습니다.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에게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숨바꼭질…
숨바꼭질입니다.
천국은,
천국은 말입니다.
* 복음의 상향성과 하향성에 대한 오해는
인생의 마지막과 방향성 전부를 바꾸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대제사장들이 성경을 몰라서 예수님을 버렸겠습니까?
복음이 세상의 상향성과 합쳐지면 무서운 괴물이 됩니다.
복음이 세상의 상향성과 합쳐지면 세상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 됩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버렸던 그들이 추구하고 기대하던 그곳에는 없습니다.
모든 세상 사람,
하나님의 아들을 기대하던 그곳 그 길에는 없습니다.
숨바꼭질입니다.
천국은…
오직 하나!
내 영혼이 구원 받았다는 것으로 감격해 하는 자에게만 보이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영혼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자에게만 보이는 천국과 복음.
그 사람에게
천국이 보이고
복음이 보이고
<작은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