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 대한 오해 1- 엘리야와 세례요한의 오해(마11:2-15)
내가 살면서 가장 슬픈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이 나를 오해하는 것은 그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 모르니까, 멀이 있으니까!
그러나 가장 가까이 나를 아는 사람,
평생 나를 지켜보고 나를 가장 잘 알아주어야 할 사람이 나를 오해하면
그것처럼 힘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복음에 대해 너무 많이 오해합니다.
너무 많이 듣고 너무 잘 알 것 같은데
우리는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 너무 많이 오해합니다.
이유는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하는데
새 술을 낡은 부대에 넣어서입니다.
복음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세상의 상식과 방법과 길이 아닌데
예수를 믿으면서 여전히 세상의 법과 길과 식을 따르기 때문에 우리 안에 깊은 허전함이 남습니다.
그것은 비단 우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엘리야의 문제이며 세례 요한의 문제이고 열두 제자의 문제였습니다.
첫째, 내가 기대한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복음이라고 오해합니다.
평생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준비하고 광야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왔고 사역을 시작했고
그래서 뭔가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대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일어 난다는 것이 겨우 보지 못하는 소경 몇이 보고
앉은뱅이 몇 명이 일어나고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사람 한두명이 일어나고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복음이 전파되는 것…
고작 그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겨우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이 알려지는 이 한가지를 위해
세례요한은 평생을 광야에서 집없이 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고생하며 살았습니다.
급기야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고
그분이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제 무슨 일입니까?
평생 준비하고 예비하고 그렇게 그렇게 고생하며 살았는데
그분이 오면 나라가 바뀌고
그분이 오면 그분을 그렇게 예비한 내가 뭔가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그분이 오면 나라와 민족이 모두다 하나님을 믿게 될 것으로
억압하던 정치세력도 하나되고
우리를 억압하던 로마도 물러가게 될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왔는데…
나는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에…
똑같은 일이 엘리야에게 일어납니다.
주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고 하나님을 모르고 악을 행하던 왕과 나라에
내 말이 없으면 비도 이슬도 없다고 선언하고
목숨 걸고 살았습니다.
가라는 곳에 가고
까마귀를 통해서 얻어먹고
과부의 집에서 얻어먹는 수치를 겪으면서 겨우겨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날이 와서 갈멜산에서 불이 내려 850명의 거짓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줄 알았습니다.
왕이 물러가고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천국이 임할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런일은 고사하고 다시 이세벨여왕이 그를 죽이겠다고 달려듭니다.
하나님을 위해 평생을 살았는데 돌아오는 것은
죽음의 위협이고
도망을 가야하는 현실입니다.
세례요한도 오해하고 엘리야도 오해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도 믿고
능력도 맛보고
말씀도 전하고 놀라운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기대하던 어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했습니다.
내가 기대하고 내가 바라던 그 나라를 기대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엘리야도 세례요한도 오해하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늘 복음을 오해합니다.
어떻게요?
내가 기대한 대로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복음은 내가 기대한 대로 절대고 가지 않습니다.
왜요?
우리의 세포세포속에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법,
새 술을 담을 새 가죽부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하는데
우리는 새 술을 여전히 낡은 가죽부대에 담고 있어서입니다.
충돌입니다.
갈등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이유로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내 마음이 더 허전하고 더 아픈 것입니다.
내가 평생 믿고 달려온 복음이 겨우 이렇게 나를 대하는가에 대한 아픔입니다.
평생 예수님을 준비하고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살았는데 왜 감옥입니까?
평생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릿 시냇가에 살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빌어 먹었는데
왜 살인협박입니까?
이런 모든 오해는 복음에 대한 오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합니다.
새 술은 반드시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합니다.
새것을 넣었는데 새술이 문제가 아니라 낡은 가죽 부대 때문에 터져버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가죽 부대를 바꿔야합니다.
복음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뀌지 않으면 늘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복음은 그런 것입니다.
내가 기대한 것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너무 평범하고 작은 것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세미한 음성이라고 표현한 하나님의 그 음성 앞에 내가 서는 것입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우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있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19:12-13)
복음을 오해하면 우리는 늘 갈등합니다.
하나님의 새 술을 오해하면 늘 다른 곳에 서 있습니다.
내가 기대한 어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신이 그리스도입니까?
내가 다른 사람을 더 기다려야합니까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3)
이 말은 지금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로 인정할 수 없고
다른 어떤 일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례요한의 마음이냐 제자들을 가르치려는 의도냐는 주석가들의 견해가 있지만
의도가 어떠하든 질문은 지금 하는 당신의 일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맞는지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자 세례요한이나
선지자의 대표였던 엘리야나 모두다 오해하는 것!
<복음>입니다.
아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우리는 늘 복음을 오해합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내가 기대한 어떤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기대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복음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내가 기도하고 준비하고 기다린 일이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그분의 방법으로 그분의 사람들에게 이루어가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입니다.
사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형태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만드시고 사람을 사랑하사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모든 애정을 다 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잃어버린 유일한 한가지 사람입니다.
사람을 회복하고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위하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어떤 것을 기대하고 살아갑니다.
이미 구원을 받고 하나님 나라 안에 살면서
더 나은 것을 쌓으려하고
더 좋아진 형편을 기대하고
더 좋아지는 직장과 통장과 집과 차를 기대합니다.
이미 얻은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이 아니라 자꾸 다른 어떤 것을 섞으려합니다.
그래서 복음이 자꾸 변질됩니다.
얻었으면 그것을 가지고 사람을 세우는 자리에 서야합니다.
사람이 세워지지 않는 모든 것은 허무입니다.
내 욕심이고
내가 전하는 <내가 복음>입니다.
엘리야에게 주신 세미한 음성의 마지막은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신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지혜는 사람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를 세우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실패는 여호수아 시대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을 만들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사람입니다.
복음이 사람으로 향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향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아닙니다.
다른 예수님을 기다리는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복음은 사람입니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사람을 섬기고
사람을 아끼고
사람을 존경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세상이 대접하지 않던 사람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 복음에 대한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둘째, 보고도 오해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11:4)
들어도 이미 내안에 새 가죽부대라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이 없으면
예수님이 하는 일은 내 맘에 안듭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내가 주인으로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그곳에 그 길에 그 방법에 나를 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이 이루어져도 그것이 천국인지 알지 못합니다.
천국을 말하고
천국을 살아도
그것을 듣고 보아도 그것은 그들에게 천국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옆에서 보아도 들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벨탑 영성에 갇힌 세상 아니 성도는
옛 가죽부대의 의식속에서 보면 참 천국의 발걸음과 삶은 다 하찮게 보입니다.
별거 아니게 보입니다.
대단한 바벨탑 같이 높이 올라가고
많이 모이고
큰 일이 일어나야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골에서 몇 명 두고 목회하는 목사나
한 두명 부여잡고 평생을 씨름하는 선교사는 별거 아닌 사람입니다.
직업이 별볼일 없고 재산이 별로 없이 그저 자리만 채우는 성도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아픔과 슬픔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낡은 가죽부대>입니다.
선교를 나오기 전,
긴 시간은 아니지만 저의 마음에는 나도 모르는 바벨탑의 영성이 있었습니다.
세심한 음성을 듣고
복음의 참 본질을 알기 전까지 낡은 가죽 부대의 식과 법으로
새 포도주를 채우고 살았던 시간입니다.
만약 계속 그렇게 사역을 했다면 저는 엘리야가 가졌던 의문과
세례요한이 가졌던 당신입니까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라는 의문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복음은 새 가죽부대에 넣는 새 포도주입니다.
낡은 가죽부대인 바벨탑의 영성으로 채우는 새 포도주가 아니라
새 포도주에 합당한 새 가죽부대를 가져야합니다.
복음은 사단이 심어놓은 세상적으로 놀라운 어떤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보잘 것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찾아오셔서
이름을 불러주심으로 의미 있는 인생이 되게 하는
세상적으로 소박하나
한 영혼 영혼에게 천국을 얻는 놀라운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 안에 찾아온 복음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길은
우리가 잃어버린 천국이 어떤 형편의 사람이든지
그들의 영혼에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높은 성을 쌓으려 예수를 믿으십니까?
엘리야처럼 불을 기대하고 지진을 기대하고 세상적으로 놀라운 업적을 기대하셨습니까?
세례요한처럼 예수를 믿으면 내가 왕궁에서 살고 세상이 뒤집어 지는 어떤 것을 기대하셨습니까?
그것이 바벨탑인지 알지 못하십니까?
복음은 겨자씨와 같고 누룩과 같습니다.
있는듯 없는 듯
그러나 시간이 가고 그분의 때가 되면 놀라운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열매가 아니라 복음의 열매 하나님의 열매입니다.
내가 이루었다고 자랑할 필요도
자랑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대한 것을 위해 복음을 이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내가 얻은 구원이 너무 놀랍고 놀라워서
내 전부를 다 팔아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더 가지려고 이 세상 바벨탑을 쌓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성령과 동행하며
그분이 나를 통해 오늘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의 감격을 허락하실지
묵묵히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슬픈 일은 복음을 아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슬픔은 집을 나간 탕자가 아니라
집안에 있는 첫째 아들,
그 아들이 진짜 탕자입니다.
가난하고 억눌리고 슬퍼하고 눈물 흘리는 자들에게
천국이 전해지는 것!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집도 없이 거할 곳도 없이
평생을 떠남의 삶을 사신
예수님이 전부를 거신 삶과 사역의 핵심입니다.
우리 다른 것 말고
<복음>,
이것만 붙들고 살면 안되겠습니까?
우리를 기다리는 수 많은 가난하고 억눌리고
복음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하면 안되겠습니까?
이 일에 우리가 증인이 되었는데…
우리는 자꾸 나를 증명하려합니다.
<나>를...
* 우리가 가던 길을 바꾸어야합니다.
엘리야도 모세도 세례요한도 오해했던
<내가복음>에서 참 복음으로 바꾸어야합니다.
그래서 들을 때 들리고
볼 때 보입니다.
우리가 좌절하고 실망하는 것은
복음을 오해 하는 것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복음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복음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복음입니다.
그 생각,
나의 낡은 가죽 부대를 버리는 것!
그리고 새 복음의 원리,
하늘 나라의 원리를 심는 것이 복음입니다.
내가복음에서 천국복음으로 변화 되는 것!
그것을 인정하고 낮은 자리에 내려 오는 것이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이 아닙니다.
내가 변해야 복음이 보이고 들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