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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영성3- 냉수 한 그릇

십자가의 영성3- 냉수 한 그릇

 

 

 

 

 

 

 

 

 

 

 

 

십자가의 영성3- 냉수 그릇(10:38-42)

 

우리가 세상에 머리를 숙이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이유입니다.

세상에서 뭔가를 얻을 것이 있을까 해서입니다.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이유는

내가 가진 것보다 세상에 소중한 것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보다 눈에 보이는 목숨에 전부를 걸고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날마다 보이는 목숨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9)

 

그래서 믿음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목숨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생의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땅에 살지만 땅이 영원이 아니라고 믿고

땅보다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 보장 되었다고 믿고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흔들리면,

나보다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있다는 믿음이 흔들리면

어김없이 나의 믿음은 흔들리고

자리에 <목숨> 위해 사는 일이 일어납니다.

 

 

목숨을 위해 산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선교지에서 순교를 하고

칼과 앞에 목숨을 내어 놓는 그런 절박한 현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오늘 제자들을 파송 하시면서 말씀하신 두 가지입니다.

 

<>으로 사는 ,

그리고 <성령> 아니라

생각과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흙이 되는 것이지요.

내가 목숨을 위해 산다는 것은 결국 가지를 말합니다.

 

돈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목숨을 잃고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돈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돈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돈을 나를 위해 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돈을 흘러가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면 어김없이 돈을 쌓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말입니다.

돈을 쌓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쌓는 목적이 결국 나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10:9)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이 바로 쌓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쌓음이 바로 목숨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목숨을 얻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아담이 먹은 선악과는 내가 없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함입니다.

가지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가지기 위함이 아니라 <잃기> 위해서 살라고 하십니다.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요"

 

목숨의 문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생사는 넘나드는 선교현장이 아니면 먹고 사는 문제,

돈의 문제입니다. 

 

 

목숨을 잃기를 각오해야 하는데 이것은 순교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제자를 파송 가장 먼저 말씀하신 먹고 사는 문제,

나를 위하여 물질의 쌓음을 말합니다.

제자는 먹고 사는 것이 보장 사람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면 그것에 매입니다.

그리고 물질을 쌓는 것도 자기를 위해 쌓지 않는자입니다.

 

목숨은 선교지에서의 순교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 사는 분도 있으나 지금의 시대는 거의 대부분이

삶의 현장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목숨을 잃기로 각오 하고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먹고 사는 문제와

물질의 쌓음에 자유해야함을 의미합니다.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땅에서 얻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잃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주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나의 생명도 주기 위해서…

내가 가진 생명을 잃어야합니다.

그것은 거창하게 순교가 아니라

날마다의 속에 가진 것을 잃기 위해서 사는 삶을 말합니다.

그것이 <순교적 >입니다.

순교적 삶은 <선교적 > 의미합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위해서…

나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위해서…

 

목숨을 잃기 위해서

먹고 사는 삶을 내가 아니라 주를 위해서 사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이름의 법칙>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로 이어서 <이름의 법칙> 말씀하십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1-42)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서 주를 위해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결국 선지자나 의인이나 작은 소자된 제자에게 대한 믿음의 분량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운 신앙은 오직 주를 위해 사는 거창한 순교와 세상에서 유명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것을 하려고 평생 꿈을 꾸지만

꿈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죽어갑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기 목숨을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서 사는 삶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이름의 법칙으로 풀어갑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의인의 이름으로,

작은 제자의 이름으로 대접을 하면 결국 주님을 대접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대접한다는 것이 나의 목숨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보고 대우합니다.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면 대단하게 대우하고

사람이 초라한 사람이면 초라하게 대우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대우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초라한 사람이라도 사람을 의인의 이름으로 대하고

사람이 초라한 작은 제자라도 사람을 주님의 이름으로 대접하면

의인의 이름의 ,

주님의 이름의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어떻게 주님을 대우하느냐가 주님도 나를 대우하십니다.

 

우리는 너무 세상의 관점에서 대우하고 대접합니다.

사람이 세상적으로 크면 크게

사람이 세상적으로 작으면 작게!

아닙니다.

 

믿음이 사람을 크게 여기면 주님은 사람이 아니라

믿음대로 크게 대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름의 법칙입니다.

 

내가 사람을 의인의 이름으로 대접하면 의인의 상을 받고

내가 사람을 선지자의 이름으로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내가 작은 제자를 주님의 이름으로 대하면 주님의 이름의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대한 대로 주님은 대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입니다.

어떤 믿음을 심었는가가 주님의 대우도 달라집니다.

 

<이름의 법칙>입니다.

이름은 믿음의 길로 이루어집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10:42 )

 

 

우리는 십자가의 영성을 무슨 거창한 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십자가의 영성의 삶의 현장은

그저 믿음으로 행하는 이름의 법칙에 다른 냉수 한그릇의 대접입니다.

이것이 나의 목숨을 위해 살지 않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행해야합니다.

나의 이름이 아닙니다.

나의 이름으로 냉수를 대접하지 않아야합니다.

세상적으로 자가 아니라

보잘 없는 자라도 주님의 제자의 이름으로 냉수를 대접하는 것이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우리는 나의 목숨이라는 거창한  명분 때문에

삶의 작은 이야기가 들리지 않습니다.

주를 위해서 산다는 거창한 때문에 강물처럼 흘러가는

많은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제자들의 목마름이 보이지 않습니다.

삶의 작은 노래가 들리지 않고

제자들의 슬픈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목마름도 거친 숨소리도 귀에 들리지 않고 오직 나의 위대한 꿈과

주를 위해 살겠다는 열정만 남아

삶의 구석 구석에서 빛을 발할 나의 십자가의 영성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일군을 파송하시며

돈으로 시작되어 거저주고 거저 받는 일군의 영광을 말씀하시면서

결론적으로 주님은 삶의 가장 평범한 일상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이름의 법칙…

낙엽이 이는 작은 바람 같은 소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발자국 소리에 작은 냉수에 발을 씻어가는 쉼의 자락으로

인도하는 나의 작은 믿음이 주님의 거룩한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일군은

거창한 순교와 세상을 뒤집는 놀라운 능력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에서도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 날의 낙옆 아래에서도

폭풍우 치는 겨울 밤의 바람 아래에서도

새싹 가득 채우는 나뭇가지의 아지랑 밑에서도

 

주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나의 작은 냉수를 내어놓는 일상의 조각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작은 조각의 파편들을 만드는 사람의 성령의 행하심을 통해

하나님 나라는 거룩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목숨을 잃는 삶은…

작은 냉수들의 합창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우리는 것에 영혼을 다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놓아야 건내지 못한 잃어버린 냉수들이 상처로 남는 것입니다.

나의 목숨을 얻기 위해 전해줘야할 잃어버린 냉수 그릇들을 회복하는 !

그것이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얻은 구원!

주님과 나눈 냉수 그릇으로 얻은 세상의 감격입니다.

 

우리는 냉수 그릇에 너무 많은 이론과 논리가 있습니다.

 

 

첫째, 나와 나는 서로 상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4:9)

 

 

당신과 나는 상관도 없고 굳이 내가 줘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천사들에게 대접했던 아브라함의 축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참새 한마리도 그냥 떨어지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일대 일로 만나는 만남을 주셨는데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찾아오게 하셨습니다

 

작은 소자는 소자가 아니라 영원한 생수를 경험케하는 마중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냉수를 대접하지 않으니

목숨만 남고 영생의 생수를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관 없는 소자가 아니라 축복의 소자입니다.

 

 

 

둘째, 있는 형편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4:11)

 

 

우리는 마음은 있지만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형편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없어서입니다.

선교를 도우고 어려운 이웃을 도우고 냉수 한그릇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마음이 없어서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형편대로 제자를 받으시고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냉수 한그릇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형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 예수님 당시의 형편입니다.

형편이 아니라 정확하게 내가 누구를 대접하는지 몰라서입니다.

 

주님은 제자들 대접하는 것은 나를 대접하는 것이고 나를 대접하는 것은 보내신이를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형편이 아니라 내가 대접하는 그가 누군지를 알아야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대리자이고 작은 소자들을 주님의 대신들입니다.

축복을 가져다 ,

하늘의 평강을 가져다줄

그들이 가진 평안을 받아 누리게 되는 평안의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형편을 운운하고

그릇이 없다하고 우물이 깊다합니다.

 

냉수를 대접할 대상을 알지 못한다 말하고

우물이 깊다고 돈을 벌기 어렵다고

나눠줄 여유가 없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여인은 지금 우물을 물을 뜨러 왔습니다.

자기를 위해 깊은 우물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달라는 이가 누군지 알지 못하니 냉수 한그릇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셋째, 주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해서입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었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먹었으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4: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4:26)

 

 

주님은 우리에게 냉수 한그릇을 주라는 것은 성령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원하는 배려입니다.

냉수 한그릇은 세상의 법으로 사는 우리에게 성령의 법안에 살게하는 가장 중요한 낮은 마음입니다.

 

성령은 높은 곳에 있지 않고

예수의 영으로 가장 낮은 곳에 있습니다.

작은 소자에게 마음을 주지 못하면 성령은 우리 안에 일하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냉수 그릇을 대접하라는 성령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할

환경과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어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냉수는 그냥 냉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게 하시는 문을 여는

모세의 <지팡이>이고

오병이어를 드린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며

다윗이 던진 <물맷돌>입니다.

 

 

 

주님은 모세의 지팡이와

어린 아이의 도시락과

다윗의 물맷돌을

부활 후에 <냉수> 바꾸시는 것입니다.

 

 

보잘 없고

미미하고

눈에 보이지 않고

이것으로 도대체 무엇을 있을까 했던

지팡이와 도시락과 물맷돌이 구원의 바다를 가르고

오천의 사람을 먹이고

적의 가장 대단한 장수를 죽여 전쟁을 승리로 만드는 핵심입니다.

 

그것이 지금 성령의 시대에 <냉수 한그릇>입니다.

 

 

십자가의 삶이 위대한 어떤 것이라고 꿈꾸고 살았다면

아직 세상의 비늘이 눈에 벗어지지 않은 변화되기 전의 사울입니다.

 

십자가의 삶이 예수를 믿기 전과 같이

삶을 쌓고 얻고 채우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면

성령을 경험하기 전의 열두 제자입니다.

 

십자가의 삶이 열심히 해서 뭔가를 이루는 것이라고 믿었다면

주님은 여전이 그런 당신 때문에 다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앞에 하나님이 주인임을 고백하는

두려움을 넘는 나의 작은 삶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자격을 얻기 위해 높이 올라가고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얻은 모든 것을 흘러 가게 하는 삶의 현장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삶을 얻기 위해 많이 쌓는 것이 아니라

삶이 성령의 일하심에 쓰임 받기 위해

모세의 지팡이처럼

다윗의 물맷돌처럼

어린아이의 도시락처럼

주님의 이름으로 내어드리는 작은 삶의 일상입니다.

 

 

십자가의 영성을 알지 못하면

작은 일상을 이루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지 못한 사람은 사람취급도 하지 않으며

뭔가 업적과 성과를 얻지 못하면 대접조차 하지 않는 세상의 사람보다

악한 사람으로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나게 하신 냉수 한그릇의 주인공들을 인정하십시오.

참새도 이유가 있어야 떨어지는데

인생에 나와 만나게 하신 소중한 작은 소자들을 냉수 한그릇으로

주의 이름으로 대접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에게 크고 놀라운 일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성령이 주시는 일상에서의 냉수 한그릇 흘러가게 하는

일상의 순종을 원하십니다.

 

엘리야가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알고

주님이 하신 것은

일상에서,

아침,

점심,

저녁 그거 까마귀가 가져다 주는 음식 앞으로 나아가는

작은 성령의 음성에 귀를 귀울일줄 아는 낮은 마음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에서 엘리야를 회복한 것은 폭풍도,

하늘의 불도 지진도 아닙니다.

그저 세미한 음성입니다.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상태가

그는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을 가는 영원의 사람이 것입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19:12]

 

 

세미한 음성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영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냉수 그릇은 육체의 목마름을 채우는 물이 아니라

영원의 생명을 얻게 하는 성령의 마음입니다.

성령의 음성입니다.

성령의 불입니다.

생수의 강으로 인도하는 깊은 산속 옹달샘입니다.

 

엘리야는 비가 오고 오지 않는 능력을 가졌고

엘리야는 가는 곳마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중심에 섰고

죽은 과부의 아들을 살리고

850 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승리지지만

정작 하나님의 음성안에 거하는

냉수 한그릇의 영적 비밀을 알지 못했기에

그에게는 흙에서 영원을 사는 십자가의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세미한 음성을 듣는,

냉수 한그릇을 옮겨다 심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이

그에게는 그와 같은 사람이 붙고

사람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어지는 은혜가 있었습니다.

 

 

어디를 향하여 가십니까?

무슨 놀라운 일을 하시려고 기도하고 능력을 달라고 구하십니까?

무슨 일을 하겠다고 하나님이 날마다 보내시는 천사들을 냉수 한그릇 없이 돌려보내십니까?

무슨 대단한 업적을 남기겠다고 날마다 안에서 세미하게 말씀하시는

성령의 음성을 무시하고 생각 마음 논리 합리에 빠져

아담과 같이 날마다 선악과를 드리고 계십니까?

 

그래서 고기 많이 구워드셨습니까?

 

 

작은 소자를 보게 달라고 구해야합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유명한 자를 구원하려 보낸 하나님의 유일한 길이 아닙니다.

나와 같이 보잘것 없는

눈에 띄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만삭되지 못한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답입니다.

 

십자가의 길과 다른

어떤 사람,
능력,

일을 구하는 곳에는 결코 세미한 주의 음성이 들릴 없고

주님이 만나게 하시는 냉수 그릇의 주인공이 보이지 않습니다.

 

열매는 주님이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께 붙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열매를 맺으려니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귀신도 권능도 행하게 달라고 기도합니다.

아닙니다.

그렇게 가면 거짓 선지자가 것이 뻔합니다.

가짜가 것이 뻔합니다.

 

열매는 주님께 드리고

작은 음성에 순종하므로 작은 소자가 보이고

작은 소자에게 냉수 그릇 대접하는 작은 순종이

우리를 그분의 평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영성!

냉수 그릇입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9:48)

 

 

십자가의 영성!

이래도 안보이십니까?

 

세상과 반대로 보아야 십자가의 길은 보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성령의 마음입니다.

 

 

 

 

  * 4살된 수빈이입니다.

한국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이런 어린 아이같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눈에 띄지 않는

주님의 제자들을 대접하는 것이 성령이 일하시는 통로입니다.

무슨 대단한 일이 십자가의 길이 아닙니다.

인류 기독교 역사는 대단한 일로 복음을 위하다가

너무 많은 아픔을 겪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이런 작은 아이같이 미미한 주님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마음을 전달 하는 것입니다.

일로 주님은 그분의 일을 묵묵히 그러나 놀랍게 이루어 가십니다.

 

(사진: 김동인  편집;서대경)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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