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군 10- 주인이 누군지 아는 사람(마10:21- 39)
두려움보다 강한 마음이 생기면 망합니다.
그 마음은 내가 <주인>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얼마나 강한지 어떤 세상의 마음보다 강렬하게 찾아옵니다.
아담이 그 마음에 속아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다 주인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하나님이 되고 싶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일군을 말씀하시면서 오늘 너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일군의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것은 누구의 이름을 위하여 사느냐입니다.
일군은 불려진 사람입니다.
일군은 권능의 사람이고 복음의 사람입니다.
일군은 거저 받았기에 거주 주는 사람입니다.
일군은 지나간 흔적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일군은 지나간 자리에 나의 흔적이 아니라 예수의 흔적이 남는 사람입니다.
일군은 자발적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일군은 성령의 이끄심안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모든 것을 하지만 일군의 가장 명확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바로 이름입니다.
누구의 이름을 위하여 사느냐입니다.
그것이 주인과 종, 주인과 일군을 구분 짓는 잣대입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0:22)
양의 탈을 쓴 이리가 있고,
일군의 탈을 쓴 주인이 있습니다.
첫번째부터 아홉번째까지 양의 탈을 쓰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넘어지는 한가지는 바로 <이름>입니다.
권능도 있고, 복음도 전하고, 흔적도 아름답고, 예수도 전하고,
고난도 자발적으로 참여합니다.
그런데 결론이 자기의 이름입니다.
일군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살지 않습니다.
바벨탑의 핵심은 자기의 이름입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4)
인류는 아담 이후에 결국 마지막에 남는 걸림돌은 자기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오직 한가지를 남기 셨습니다.
바로 예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권세아래 모든 머리를 숙이게 하셨습니다.
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까?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 자기의 이름을 걸고 사는 인생에
오직 유일한 주인, 유일한 왕은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을 걸고 기도하며
예수의 이름을 걸고 살면서 결국 드러내는 것이 자기의 이름이 됩니다.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뭔가?
하나님을 주인 삼고,
주인의 일군으로 사는 사람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가?
바로 <두려움>입니다.
왜 자기의 이름을 위해서 삽니까?
두려움입니다.
인생의 본질은 두려움이라 했습니다. (노트-인간의 본질 참고)
인생의 본질은 외로움이라 했습니다.
그 두려움과 외로움을 이기는 방법으로 자기의 이름을 내서 두려움을 떨쳐보려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주인을 두려워 하는 것이 인간의 답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보다 자기의 이름을 위한
강력한 열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두려움보다 강한 마음이 생기면 망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강한 욕망과 열정이 생기면 망합니다.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는 시작은 바로 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성경에 생육하고 번성하였다는 말은 겨우 몇 사람에게 허락됩니다.
창세기의 창조 사건과,
그리고 아브라함과 요셉입니다.
그리고 이 번성하고 생육했다는 말이 애굽에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사용합니다.
언제요?
바로왕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태어나는 남자 아이를 다 죽이라는 명령이 있고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브라가 그 명령을 듣지 않고 남자 아이를 죽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성경은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출1:17)
아담과 하와의 생육과 번성의 기초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과 생육의 기초는
나이든 히브리 산파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라 백성은 생육이 번성하고 심히 강대하며"(출1:20)
생육하며 번성의 기초는 바로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자기의 이름 때문이면 결국 바벨탑처럼 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의 대상이 하나님이면 생육하고 번성의 기초가 됩니다.
그것이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마음은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살 때 가장 조심 할 것을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합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우리가 힘들고 아무것도 없을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맘대로 뭔가 되고 자리가 잡히고 힘이 생기면
어김 없이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내고 싶어합니다.
그 때 찾아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내 이름이 사람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내 이름이 땅에 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이
바로 비교의식입니다.
사울왕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든 사울왕이 왜 마지막에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인이 누구인지 알지 못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이름입니다.
자기의 이름이 주인이 되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삼상28:5)
자기의 이름을 위해 사는 사람은 사람이 보입니다.
예수의 이름을 위해 사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명확하게 보이는 하나님이 눈에 보입니다.
영으로 사는 자는 육체에 갇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육체,
자기의 이름을 위해 사는 사람은 사람이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의 소리도 들립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삼상18:7]
자기의 이름에 갇힌자는 이름을 내기 위해 살지만 실상은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 더더욱 자기 이름에 집착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에 걸림이 되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 사람을 죽이려합니다.
그것이 사울왕과 다윗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의 핵심은 주인이 누구냐입니다.
하나님을 주인 삼고 사는 자는 하나님이 두렵습니다.
그러나 나를 주인 삼고 사는 자는 사람이 두렵습니다.
그들 자체가 두렵고, 그들의 소리가 두렵습니다.
창조의 번성과 생육,
이스라엘 백성의 애굽에서의 번성의 기초는 바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종이 상전보다,
제자가 선생보다 못한데
세상은 주인이고 선생인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하물며 일군과 제자겠습니까?
세상은 우리를 무조건 망하게 하려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10:24-25)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세상은
그의 일군도 그렇게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을 두려워하는 자는 모든 것을 이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백성을 자손 대대 지키시는 분이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산다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모든 번성의 기초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입니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내 이름이 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닙니다.
세상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참새를 예를 들고 머리털도 다 새심을 예를 드십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10:30-31
우리는 참새보다 귀합니다.
우리는 세상보다 존귀합니다.
하나님은 머리털도 다 세실만큼 나를 잘 아십니다.
몸이 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이 망하는 것을 두려워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려움 보다 강한 육체적 욕망을 몸도 영혼도 망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인삼고 일군으로 사는 경외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바로 <시인>하는 삶입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마10:32)
주님을 사람 앞에서 <시인>해야합니다.
시인이라는 말은 confess 입니다.
고백하고 인정하고 입증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 앞에 내가 믿는 주인이 예수님임을 고백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 고백의 삶은
주인을 주인으로 보여주는 것을 말합니다.
시간의 주인,
물질의 주인,
생명의 주인을 고백하며 사는 것이 주인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십시오.
사람 앞에 주님을 시인해야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사람 앞>에 주님을 주인으로 시인할 때입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 주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시간의 주인으로,
물질의 주인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내 이름>이 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내 이름 하나 높여보자고 주님의 주인되심을,
주님의 이름을 사람 앞에 고백하고 시인하지 못합니다.
예수 믿는 다고 고백하면 당장 죽음을 당하고 돌을 맞는 선교지의 상황도 아닌데,
우리는 주인을 주인으로 시인하지 못합니다.
물질의 주인 되신 주님을 사람 앞에 보여주십시오.
주님이 주신 물질을 주님의 주인 되심을 위해 사용해 보십시오.
그리고 사람 앞에서 주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시인하십시오.
시간의 주인되신 주님을 사람 앞에 고백해 보십시오.
아무리 중요해도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지키고 주님과의 그 약속 시간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사람 앞에 고백하십시오.
주님은 나의 주인이라고,
나는 그분의 일군이라고.
관계의 주인되신 주님을 사람 앞에 고백해 보십시오.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따라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고
품고 안아주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주님 때문에 안고 사랑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로 세상 앞에 서기 원합니다.
인생의 주인되신 주님을 사람 앞에 고백하십시오.
내 인생을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고
사람 앞에 그렇게 시인하고 달려가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달려가는 것은
보장 되지 않은 인생을 믿음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내 생명 조차도 드릴 각오로 일군의 주인되신 주님을 위해 전부를 걸고 가는 사람이 일군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10:38-39)
작은 시간,
작은 물질,
작은 감정의 조각들을 십자가 앞에 던져야합니다.
우리는 이미 십자가에 주인되기로 작정했던 내 삶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과 영원까지 책임지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주를 위해 살기로 작정하고 달려가야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일군입니다.
땅에 살지만 영원의 비밀을 아는
그분의 일군 말입니다.
일군은 그런 것입니다.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비교의 의식으로 좌우도 보지 않아하고
오직 부르심의 상을 좇아 묵묵히 예수의 이름에 전부를 걸고 가는 사람입니다.
없어지고 사라질 감정의 찌꺼기와 지나면 소용없는 내 이름의 영광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일군은 그런 것입니다.
일군은 그런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알고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내가 흙이였고
그분으로 영원의 삶을 사는,
육체를 살지만 육체에 갇히지 않고
영원을 살지만
육체 안에서 그분의 이름을 위해 전부를 걸고 사는,
일군은 그런 것입니다.
참새 하나도 하나님의 손길로 보고
머리털 하나로도 주님의 섬세함을 느끼는
그래서 세상 만물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영원과 육체가 하나된 성령의 비밀을 날마다 신비로 넘나드는,
일군은 그런 것입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원통 꼭지점의 하나님의 시각으로
불꽃 같은 눈으로 지금을 보고
지금 이곳을 영원의 시각으로 사는 사람,
그래서 세상에 매이지 않고
성령에 이끄심에 전부를 걸며
짐이 무겁지도
그렇다고 멍에가 어렵지도 않는
자유와 기쁨의 삶이 묻어나는
더 넓은 들판의 쉼을 주는 한 그루 종려나무.
일군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꿈을 따라 살지만
섬세한 삶의 현장
작은 아이 가슴의 아픔도
쓸어안고 가는
일군의 시선과 마음을 가진
그래서 그 일군의 작은 시선과 작은 손길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 받는
일군은 그런 사람입니다.
* 남아공의 사역자들입니다.
남천교회 선교팀이 오면 배목사님과 정목사님과 함께 사역자 미팅을합니다.
격려하고 말씀으로 방향을 정하고 귀한 식사로 위로하고 작은 봉투지만
그들과 마음을 나눕니다.
이들이 하나님 나라의 보배들입니다.
주님이 하지 않고 우리에게 그분의 나라를 맡긴,
약하고 힘없는 자들이지만 그들에게 그분의 나라를 위탁한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모잠비크와 신학생들은 참여를 못했지만
이들이 우리의 보배이고 미래입니다.
하나님이여 아프리카를 축복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