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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군 7,8,9- 지나간 자리에 예수가 남는 사람

일군 7,8,9- 지나간 자리에 예수가 남는 사람

 

 

 

 

 

 

 

 

 

 

 

 

 

일군 7,8,9- 지나간 자리에 예수가 남는 사람(마10:16-18)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고 나면 이분 대단하다라는 마음이 들고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고 나면 이분을 이렇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대단하다라는 마음이 듭니다.

 

어떤 설교는 설교하는 사람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어떤 설교는 하나님이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0:16)

 

 

지혜로움과 순결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나간 자리에 내가 남을 것인지

예수님이 남을 것인지를 구분하라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남게됩니다.

나의 무용담이 남게되고

나의 대단함이 남게되고

나의 업적과 자랑이 남게 됩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에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공회에 총회에 임금과 총독들 앞에 서게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주님의 <보내심> 근거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10:16)

 

 

우리가 순결하고 지혜로와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보내심의 이유를 채우기 위함입니다.

보내심의 목적과 이유는 바로

 

<증인>입니다.

 

"또 너희가 나로 말미암아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가리니

이는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10:18

 

Testimony 입니다.

<증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뱀같이 지혜로운 것은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비둘기 같이 순결한 이유는 나를 증인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지나간 자리에 우리는 자꾸 <> 남기고 싶어합니다.

내가 말할 기회만 생기면 우리는 자꾸 <> 자랑하려합니다.

 

일군이 아닙니다.

일군의 일곱번째는 <지나간 자리에 예수> 남는 사람입니다.

 

말을 하고 설교를 하고 대화를 나눌수록 자꾸 자기가 쌓은 성을 말합니다.

아닙니다.

조심해야합니다.

순결해야합니다.

지혜로와야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바로 보냄입니다.

보냄의 목적은 예수를 증언하기 위함입니다.

증언하기 위해 순결도 필요하고 지혜도 필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자꾸 내가 남습니다.

나의 열매가 남고

나의 쌓은 성이 남고

나의 업적이 사람들의 마음에 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군이 되지 못합니다.

주인입니다.

나를 드러내는 주인입니다.

 

우리는 자꾸 나를 남기기 위해 주님을 이용합니다.

나의 사역을 위해 주님이 필요한 것인지

주님의 사역을 위해 내가 필요한 것인지 구분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주님의 일인 자꾸 나를 남기려합니다.

 

나를 남기지 않기 위해 일군의 여덟번째는

주님을 남기기 위해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삼가라 저희가 너희를 공회에 넘겨 주겠고 저희 회당에서 채찍질 하리라

또 너희가 나를 인하여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리니"(10:17-18)

 

일군은 주인 때문에 고난도 당하는 것입니다.

일군은 주인 때문에 사람들에게 욕도 먹는 것입니다.

맞기도 하고

끌려 다니기도 하고

오해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는 일군은 없습니다.

그것이 없는 일군은 일군이 아닙니다.

모든 일군은 고난에 동참하는 삶이 있습니다.

 

교회로 인해 나라가 복을 받고 경제적으로 복을 받으니

너나 없이 고난에 동참 하기를 싫어합니다.

적게 쓰고 주님의 증인의 삶에 헌신하기를 불편해합니다.

불편하니 외면하고 외면하니 일군이 아니라 주인이 됩니다.

 

시대는 경제적으로 많이 나아지고 형편이 좋아져서

자발적 고난이 아니면 고난을 찾기가 어려울 있습니다.

자발적으로 불편한 자리,

자발적으로 고난의 자리에 서지 않으면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일군의 삶은 어렵습니다.

 

헌금도 자발적으로 내가 불편할 정도로 해야합니다.

봉사도 자발적으로 내가 고난에 동참한다는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전도도 그러하고 선교도 그러합니다.

 

시대는 발전할수록 고난과 멀어지도록 만듭니다.

자발적 고난이 아니면 복음 증거는 어렵게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나간 자리에 예수님이 남는 것은

<자발적 고난> 통한 <불편한 >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난입니다.

그것이 일군의 삶입니다.

 

자꾸 내가 주인되려 하는 속에는 편하고 고난을 멀리하며

시간이 지나면 자랑만,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업적만 남게 되는 일이 남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필요하고 그래서 순결이 필요합니다.

일군은 증인입니다.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이야기를 하십니다.

증언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일군의 아홉번째는

<성령이 주도하는 사람>입니다.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0:19-20)

 

 

지혜롭고 순결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성령이 주도하는 것에 따르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도 성령께서 하게 하시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증인의 자리에 있을 ,

세상 사람들 속에 있을 우리는 자꾸 우리의 말을 합니다.

그곳에는 주님이 증거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일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일하심은 오직 자발적 고난속에서 피어나며

성령의 역사는 오직 주님을 주인 삼고 증인의 일군으로 사는 곳에 꽃이 피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성령이 일하게 하는 사람!

사람이 진정한 주님의 일군입니다.

 

사람이 흙으로 존재하다 영원이 된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호흡으로 들어온 때부터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2:7)

 

흙이 영생이 것은 하나님의 호흡, 성령의 호흡으로 사는 존재가 때입니다.

사람의 존재는 성령께서 주관할 때만이 영원이 되고 생령이 됩니다.

 

그런데 언제 성령이 떠납니까?

성령이 주관하는 인생이 아니라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고

자기가 주인처럼 결정하고 살면 다시 흙이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6:2-3)

 

 

인생의 결정권이 사람에게 있을 때부터 하나님의 , 성령은 사람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누가 영원입니까?

누가 성령의 사람입니까?

누가 증인입니까?

 

성령이 이끄시는 삶을 따르는 자입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고

성령의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자가 영원의 존재입니다.

 

영원의 존재는 오직 성령의 호흡으로만 사는 사람입니다.

지혜와 순결,

자발적 고난의 동참,

주인이 아닌 일군의 삶을 사는 모든 이유는

오직 <성령의 호흡>으로 사는 주님의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은 무리 위에 임하지 않고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성령은 사람과 호흡하며 사람의 마음에 선명하고 명확한 마음을 주셔서

성령이 이끄시는 사람을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은 오직 한가지 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4:1)

 

 

우리 삶의 핵심,

주인이 아니라 일군으로

흙이 아니라 영원으로 사는 핵심은

성령의 이끄심 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오직 예수를 증거하는 영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나를 증거하고

나의 이름을 드러내고

나의 영광을 드러내던 사람이

오직 성령에 의지하여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이 충만함의 증거는 안에 예수를 증거하려는 영이 충만한 것입니다.

악령의 충만은 예수의 이름을 빙자해 이름을 증거하려는 마음이 충만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확하게 구분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흙이 됩니다.

주인이 됩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게 됩니다.

 

한마디도 성령에 의지하는 <종의 영성> 필요합니다.

한마디가 한마디가 아닙니다.

 

종이냐 주인이냐

일군이냐 왕이냐를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주님을 증언할 말도 성령께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말은 그냥 말이 아닙니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사람이냐 흙으로 사느냐를 결정하는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한 곳에

오순절 마가 다락방입니다.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4)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자기 주도적 삶에서 성령 인도적 삶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께서 마음에 주시는 마음을 따라

마음을 말하고

음성을 순종하고

마음에 따라 자발적 고난과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일군의 삶입니다.

 

일군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주도적> 삶에서 <성령 주도적> 삶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지만

여전히 자기 주도적 삶으로 사는 삶이 있습니다.

이런 삶은 결국 자기 이름과 자기 업적과 자기 영광이 남습니다.

설교에도 사역에도 관계에도 모두 자기가 남습니다.

 

그러나 <성령 주도적> 삶은

결국 예수님의 이름이 남고 예수의 흔적이 남습니다.

예수의 사람이 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삶은

예수를 믿기에 성령을 주도적으로 인정하고

그분이 이끄심 안에 평안을 누리는 삶입니다.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고

생각으로 결론이 나지 않지만

그분이 주시는 마음과 생각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

그것이 바로 일군의 삶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마음을 받아야합니다.

그리고 말해야합니다.

우리의 실수는 성령이 말하지 않았는데 말하고

성령이 마음을 주시지 않았는데 행하고

성령이 확증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앞서 간다는 것입니다.

 

40년의 광야는 훈련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삶이 광야입니다.

그것이 훈련되지 않으면 가나안의 삶은 망하는 곳입니다.

 

복이 독이 되는 것은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일군의 삶은 성령이 이끄시는 안에 거하는

성령주도적 삶일

고난 중에도 평안이고

핍박 중에도 기쁨입니다.

 

그것을 아는 일군!

 

일군의 훈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이 움직이면 움직이는 훈련입니다.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훈련!

마음을 주시는대로 따르는 훈련!

그것이 주인의 삶이 아니라 증인의 삶을 사는 일군의 삶입니다.

 

어떤 음성을 받고 어떤 마음을 받았습니까?

그것을 행할 예수가 증거되고

안에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인생이 됩니다.

 

성령께서 주신 마음을 따르십시오.

그것이 일군이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

 

성령을 따르는 !

영원과 흙으로 나뉘는 기준입니다.

 

 

  * 예수를 믿는 것은 주인처럼 신었던 신을 벗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를 믿고 열심히 신을 신습니다.

이유는 주도적으로 열심히 살려고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신을 벗고 성령의 신을 신는 것입니다.

성령의 신을 신는것은 성령이 가고자 하는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루어질 성령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일을 목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힘없고 미천한 질그릇 같은 인생이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다들 힘을 빼야합니다.

매였던 신발의 끈을 풀고 신을 벗어야합니다.

그래야 '말하게 하심을 따라' 되고

이끄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성령의 호흡안에 거하십시오 .

그분의 호흡을 느끼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원하는 발걸음에 신을 벗고 가십시오.

그것이 일군의 삶입니다.

 

 

<사진: 임원아, 편집: 서대경 >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