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군 4,5- 거저 주는 사람 그래서 거저 받는 사람(마10:5-10)
늘 그렇습니다.
주님은 늘 먼저 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내가 뭔가를 해주면 당연히 대가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데 오늘 주님이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가서 병든 자를 고쳐주고 죽은자도 살려주고 귀신도 쫓고 권능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결코 대가를 받지 말고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
복음은 그렇습니다.
공짜입니다. 값없이 돈없이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는 것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우리는 늘 복음을 위해서 일하고 늘 대가를 받으려합니다.
대가를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대가를 사람으로부터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일군의 네번째 조건은
<거저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능력과 은사를 나의 능력, 나의 은사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능력과 은사로 무엇인가를 하고 어떤 대가를 사람으로부터 기대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법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
일군의 조건은 받은 것이 거저 받은 선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가진 능력과 은사와 힘이 거저 받은 것이라는 인식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전하는 복음은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공짜입니다.
내가 받은 것이 거저 받았고
그래서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닌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사람과 계산을 하려합니다.
그것이 본성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해주고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합니다.
내가 어떤 일을 통해 큰 은혜를 끼쳤는데 그 사람이 몰라주면 섭섭하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을 욕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일군, 하나님의 사람은 그러지 말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일군의 기초는 <거저 받은 것>입니다.
섭섭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은혜를 모를 수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전제를 답니다.
"거저 받았으니" 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
우리가 받은 구원,
우리가 받은 능력,
우리가 받은 남들이 가지지 않은 재주는 다 거저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잊혀지면 우리는 늘 <계산>하려 합니다.
맞습니다. 계산을 해야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과 계산 하라고 하십니다.
"여행을 위하여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자기의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라"(10:10)
일군이 계산해야할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자꾸 사람과 계산하려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군의 다섯번째 조건으로
<거저 받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거저 받는 것에는 철저한 주님의 계산이 있습니다.
주님은 계산이 철저하신 분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잘 알듯이 일한 만큼 계산하시는 분입니다.
계산에 철저한 분입니다.
준것만큼 찾으시고 일한 만큼 돌려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계산의 기초는 우리의 <거저 주는 삶>입니다.
거저 받은 것을 아는 사람만이 믿음으로 거주 줄 수 있고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가는 일군만 하나님의 계산법을 기다립니다.
그 <계산법>은 사람들에게 거저 주고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는 것에 익숙한 삶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주님께는 거저 받았다는 인식은 못하고
사람들과 계산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꾸 문제가 됩니다.
사람은 받는 대상이 아니라 거저 주는 대상입니다.
자꾸 거주 주십시오.
그래야 주님이 계산하시고 다시 거저 주십니다.
왜 섭섭합니까?
준 것이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섭섭합니다.
왜 섭섭합니까?
줬는데 알아주지 않으니 섭섭합니다.
왜 기분 나쁩니까?
자꾸 나만 주는 것 같으니 기분 나쁩니다.
자꾸 내가 줘야하는 것이 기분 나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합니다.
주님의 계산법은
내가 거저 주는 삶의 기초 위에 존재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계산법,
주님이 일군에게 채우시는 방법입니다.
주지 않으면서 받으려하고
내 것이 아닌데 내 것이라고 착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것인데 나의 어떤 이름을 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 일군의 모습이 아닙니다.
시대가 타락할수록
복음이 쇠퇴한 시대일수록
거저주는 일들이 사라집니다.
초대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자기의 가진 것을 필요에 따라 거저 나누어 주는 모습입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행2:44-45)
언제 우리에게 복음의 영광이 주어집니까?
거저 주는 삶이 있을 때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7)
받은 바 은혜를 나누는 삶이 사라지는 곳에는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
하나님이 날마다 <더하시는> 은혜가 없습니다.
믿음의 반대 말은 합리와 이성이라고 수십번을 말씀드렸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는 자꾸 따지고 계산합니다.
아닙니다.
교회는 일군은 믿음으로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거주 주는 자에게 거주 주신다는 믿음으로 가야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시대가 악할 수록 믿음을 보겠느냐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믿음보다 합리와 이성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고
필요를 따라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보다 더한 자기만의 계산과
세상보다 더 악한 따지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 곳에는 플러스 알파의 은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거기에는 오직 나의 수고와 나의 열매만 있고 그래서 자기 영과 자기 이름만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거저주는 사람이 일군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이름으로 거저 주신 것을 거저 나누는 삶의 자세가 하나님의 플러스 알파를 더합니다.
언제 복음이 흥왕 했습니까?
거저 주는 곳,
거저 나눠주는 사람,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는 일군에게 나타납니다.
주님은 우리를 일군으로 보내시면서 이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거저 주고 거저 받는 사람,
그 원리와 주님의 계산법 안에 사는 사람이 일군입니다.
일군이 많은 시대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일군은 많은데 주님의 일군이 아쉬운 시대입니다.
일 잘하는 사람보다
이 주님의 원리대로 사는 사람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거저 주는 사람>
한번 욕심 내 보지 않으렵니까?
그런 사람,
그런 일군 만나면 주님이 춤을 추실텐데 말입니다.
일군!
거저 주는 사람,
그리고 거저 받는 사람입니다.
* 남천교회 의료팀과 선교지 방문팀이 일을 다 마치고 한국으로 가셨습니다.
3군데의 선교지와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에 의료봉사를 하시고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봉사를 하고 특별 찬양을 하고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번에는 특히 오기스교회의 5명의 장로와 3명의 안수집사 임직식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교회들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선교지 방문은 남천교회 20주는 기념 선교지 봉사였습니다.
남천교회가 선교를 시작한지 20년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축복을 하나님이 거저 주셨는지요…
이 모든 축복과 은혜는
자기의 돈을 들이고 시간을 들리고 마음을 드린 하나님의 일군들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일군에게 주시는 거저 부으시는 은혜가 더욱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늘 그렇습니다.
선교지를 다녀가신 분들에게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가 많았습니다.
이번팀에게도 일군에게 주시는 <거저>의 축복이 풍성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하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