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군1- 불려진 사람 (마10:1-6)
믿는 대로 되는 인생을 7번에 걸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부터 일군에 대해 묵상을 해 보려합니다 .
모든 묵상은 성경의 말씀에 근거해서 그날 그날 본문에 근거해서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인생은 믿는 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마지막은 일꾼을 보내 달라는 요청으로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오늘부터 일군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대충 10가지 정도가 나옵니다.
오늘 그 첫 번째를 나누려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의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제자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그 제자들에게 권능을 주셔서 파송하는 일을 봅니다.
그런데 그 일군들의 조건이 아주 중요하게 나옵니다.
그 첫째 조건이 바로 불려진 사람들입니다.
일군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불려진>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선택된> 사람들입니다.
선택이야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명확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여기 남아공의 많은 흑인 목사들은 스스로 자기 머리에 손을 올리고 안수를 해서
스스로 목사가 된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신학 교육이나 교단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보통 한 사람의 교인이 신학교를 가는 순간부터 학교를 정상적으로 졸업하는데 7년이 걸립니다.
초등학교를 못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그 사람들이 대학 검정과정을 수료하는데 1년,
그리고 diploma 과정을 다니는데 2년
정식 신학 대학을 나오는데 3년입니다.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는데 또 몇 년이 걸립니다.
총 정식 목사가 되는데만 7-8년이 걸립니다.
형편이 어렵고 정식 공부가 어려워 여러가지 이유로 정식 목사의 과정을 밟고
목사가 되는데는 경제적 학문적 문제가 다 해결되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남아공은 이렇게 인정된 목사가 되는 일은 참으로 고된 과정을 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고등학교 과정도 마치기 어려운 형편과 학문적 수준 때문에
아무 무인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스스로 목사라고 말하고 교회를 운영하게 됩니다
그것이 남아공의 현실입니다.
그와는 형편이 다른 한국도 있습니다.
교육수준과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이제는 누구나 목사가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구나 대학을 나오고 공부를 조금(?) 잘하면 신학교도 갑니다.
그런데 남아공의 현실과 한국의 현실이 상반되지만
과연 누가 일군인가라는 조건으로 따지면 다 아닙니다.
일군의 조건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
예수님께 불려진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10:1)
우리가 생각할 것은 목사만 일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일군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목사냐 교사냐 찬양대냐 아니면 식당에서 봉사하고 주차장에서 일하는 일이냐가 다르지
누구나 일군으로 설수 있는 조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조건은 바로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은사에 따라 직분에 따라 하는 일이 다르지만
결국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학력의 수준과 은사가 다 다르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일군의 조건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바로 <불려진> 사람들입니다.
일군은 불려진 사람들입니다.
일군은 절대로 스스로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니 스스로 된다면 그는 일군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스스로 능력이 있어서 되었다고 생각한 사람의 문제는
절대로 일군이 될 수 없습니다.
일군은 주인의 일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첫째, 일군은 내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일군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이유는
<가라>는 명령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일군의 기초 조건은 부르심입니다.
불려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불려진 이유가 바로 <가라>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입니다.
보내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열 둘을 <내보내시며> 명하여 이르시되 ~"(10:5)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10:6)
가지 않으면 흩으십니다.
흩어지는 것,
가는 것을 위해 부르셨습니다.
불려진 사람은 다시 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가진 않으면 권능이 없습니다.
받은 권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서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가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 늘 그대로입니다.
나만 좋은 일을 시키기 위해,
내 가족, 내 세끼, 내 인생만 위한다면 하나님은 일군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군중으로 무리로 먹을것만 먹고 기적만 보고 배부르게 할 것입니다.
일군과 군중이 다른 것은
배부르고 기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군은 가는 사람이고 가진 것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기억 할 것은 내 일을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일을 하기 위해서 불려지고 가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불려짐>과 <가게됨>을 아는 사람이 일군입니다.
<불려짐>과 <가게됨>을 삶으로 사는 사람이 일군입니다.
불려짐은 가게됨으로 연결되는 삶에는 고통의 다리를 지납니다.
이 고통의 다리를 지나지 않으면 가게됨을 가기 싫은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내가 불려진 일군이면 가게됨의 삶의 현장이 있는지 돌아봐야합니다.
둘째, 일군은 <불려짐>의 감격이 <가게됨>의 헌신으로 표현되야합니다.
먼저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인이 되기 위해 불려진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일을 위해 가게됨의 목적을 동반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불려짐의 감격을 특권의식 내지는 자신의 축복으로 머물려합니다.
가게됨을 사는 사람은 철저한 부르심 앞에 처절한 감격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철저한 불려짐을 경험한 사람만이 가게됨 앞에 철저한 순종과 헌신을 살게 됩니다.
이 철저한 부르심의 기초,
불려짐의 기초는 죄인의 <초라함>입니다.
베드로의 첫 고백은 주님의 부르심 전에 바로 이 죄인의 초라함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가게됨>의 조건은 불려짐이지만
그 불려짐이 효력을 발생하려면 이
죄인으로서의 <초라함>내지는
<자기 인식>이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주님은 고통이나 고난을 통해 흩으심의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 흩으심의 방법이 찾아오면 무섭게 찾아옵니다.
이 흩으심의 방법이 오기전에 자발적 종의 헌신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은 장소이기도 하고
그것은 물질이기도하고
그것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자발적 헌신은 자발적 초라함 내지는 자발적 자기 인식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비단 베드로만 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초라한 세리의 기도에서도 그것을 보여줍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13-14]
일군의 가장 큰 조건은 불려짐입니다.
그러나 그 불려짐의 효력은 가게됨으로 나타나야하는데
그 가게됨의 조건은 바로 죄인됨의 자기인식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주인과 종,
하나님과 죄인의 자기 자리에 대한 인식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은 곧 보내심으로 연결되는 삶이 일군의 삶입니다.
우리는 자꾸 일군에서 주인으로 살려합니다.
그 증거가 가지 않고 <이곳이 좋사오니> 라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살고 싶습니다.
영적인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이곳에서 이 장소에서 이 환경에서 이 사람들과 영원히 여기에서 머물고 싶습니다 .
그런데 주님은 자꾸 우리를 새로운 곳으로 가라고 합니다.
여기 마을에서 저기 마을로 가라고합니다.
이유는 주님의 <가게됨>의 목적을,
주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나의 <가게됨>으로 이루고 싶으신 것입니다.
셋째, 일군이 가장 조심해야할 것은 영적인 충족감입니다.
이 영적인 충족감은 우리의 영을 소생하고 삶의 의미와 이유를 채웁니다.
그러나 영적인 충족감은 자칫 우리를 이곳에 머물게 합니다.
영적인 카타르시스는 만족하는 자체로 머물게 해서는 안됩니다.
불려짐은 가게됨으로 나아가는 이유입니다.
영적인 은혜를 수련회나 선교지나 각종 말씀을 통해서 경험했다면
그 영적인 충족감은 반드시 가게됨의 현장으로 표현되어야합니다.
나의 어떤 것,
물질이나 시간이나 재정이 어떤 곳으로 가게해야합니다.
우리는 은혜를 사모합니다.
그런데 왜 사모합니까?
우리는 탁월한 목사와 목사의 설교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왜 기대하고 사모합니다.
잘 살펴야합니다.
내 영적인 충족을 위한,
내 영적인 <카타르시스>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가게됨>을 위한 목적을 위해서입니까?
설교를 살기 위해서 듣습니까 아니면
설교를 듣기 위해서 듣습니까?
스스로 잘 돌아봐야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변화산의 주님을 경험했습니다.
영적인 엄청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에 초막셋의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 초막셋을 짓자고 합니다
여기서 그냥 머물자고 합니다.
아닙니다.
주님의 목표는 변화산의 영적인 체험은
산 밑으로 내려가기 위한,
산 밑에서 십자가로 <가게됨>을 위함이지
여기 변화산의 영적인 경험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일군의 목적은 일군의 영적인 채움이 아닙니다.
능력이 아닙니다.
천국이 가까워 옴을 전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내 뜻대로 살고 싶습니다.
머물고 싶습니다.
내 어떤 것을 채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알고 <가라>고하십니다.
나의 어떤 것을 가게 하라고 하십니다.
나의 어떤 것을 가게하고
나를 가게 하는 사람이 일군입니다.
머물지 마십시오.
자신의 것을 쌓으려 하지 마십시오.
흐르게 하고
가게 해서 주님의 목적,
나를 부르신 부름의 목적을 이루십시오.
<불려짐>의 증명은 <가게됨>입니다.
그것이 <일군>입니다.
* 안식년을 다녀와서 처음으로 사역자 미팅을 했습니다.
각 교회 상황을 듣고 앞으로 할 일을 준비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도 신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주님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귀한 동역자들입니다.
함께 식사를 하고 남서울 은혜교회에서 주신 티셔츠도 교회들 마다
예배팀을 위해 10벌씩 나누었습니다.
귀한 섬김에 감사의 마음도 전합니다.
아름다운 남아공의 귀한 일군들이 신실하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도록 기도..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