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걸림돌5 (마9:32-34)
기적의 초점은 항상 하나님이어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적을 경험하고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면 우리는 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였나?
그 사람이 어떤 능력을 가졌나보다!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께 초점을 두어야합니다.
예수님은 5장부터 7장까지 산상수훈을 통해서 우리가 누군지를 설명하셨습니다.
빛과 소금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고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8장부터 9장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살아야하고
그런 삶을 살게하는 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8장과 9장의 초점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낫게하고 고치시고 치유하시고 모든 약한 것과 병든것을 짊어지시는
예수님에 관해서 기록하고 설명합니다.
오늘 귀신들려 말못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등장합니다.
그 사람까지 고치시고 치유하심을 드러내는 이유는 바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가하는 것입니다.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9:33)
우리는 늘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성 중에 어떤 영웅이 되거나 영웅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왕이 누구냐입니다.
누가 왕이 될 것인가입니다.
내가 되든지 아니면 누군가를 왕으로 세워 하나님의 자리에 왕을 만들려합니다.
사울 왕의 예가 그것입니다.
오늘 귀신들려 말 못하는 자를 고치고난 후 두 부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그 일을 보고 놀라워하며 이스라엘 가운이 이런 일을 본적이 없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일을 통해 성경저자는 하나님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려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의 반응은 정말 이상하게 나타납니다.
바로 귀신의 왕, 사탄을 의지하여 귀신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이스라엘 가운데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하고
한 부류는 사탄의 왕의 힘을 의지해 사람을 고쳤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이 이렇게 놀랍게 다른 반응이 나타날 수 있습니까?
답은 있습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관점은 언제나 한가지입니다.
그분은 왕이지만 그의 백성,
목자를 잃은 양입니다.
그것만이 오직 그분의 사역의 이유와 삶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오직 한가지 관점입니다.
누가 힘을 가졌느냐입니다.
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고통하며 신음하는 사람들의 아픔의 소리와
눈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을 지키려합니다.
힘있는 자는 힘을 가진자가 불편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님이 불편했습니다.
이유는 오직 한가지입니다.
<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백성을 무시하지만 또 백성을 두려워합니다.
백성은 평소에는 힘이 없어서 무시할 존재지만
백성들이 누구를 우러러보고 누군가를 향하여 마음을 줄때는
그들에게 힘으로 존재하는 존재가됩니다.
힘을 가진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백성들의 마음을 빼앗는 자,
백성들의 힘을 모으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힘의 원천이 불법이고
악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어가는 자들과 아픈 자들과 약한것과 병을 고쳐도
하나님께서 어린 양들과 백성들을 위로하고 회복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들의 힘을 빼앗는 존재,
그들에 왕의 자리를 빼앗는 존재로만 보는 것입니다.
첫째, 믿음은 힘의 논리로 풀지 못합니다.
세상은 힘이 필요한 곳이 아닙니다.
세상은 복음이 필요한 곳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힘의 원천이 누가 가졌는지를 궁금해합니다.
또 그 힘의 원천을 가지기 위해 열심을 다합니다.
이 세상은 힘의 논리로 시작된 곳입니다.
기억해야합니다.
이 세상은 누가 왕이 되고 누가 더 힘이 센가를 보려다가 생긴 상처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이 세상은 상처가 난무하고 아픔이 난무하는 곳입니다.
왜 예수님이 힘의 논리가 아니라
죽음의 논리,
섬김의 논리,
베풂의 논리,
사랑의 논리로 우리에게 찾아오셨는지 생각해야합니다.
힘으로 시작된 세상의 모든 대화와 이론은 <힘>입니다.
그 힘의 논리의 세상 한가운데서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이 질문은 힘의 논리의 집약체인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던지신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힘의 논리로 보는지,
아니면 너희가 나를 어떤 논리로 보는지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그 대답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그의 대답은 탁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것이라 말하시면서
한가지를 더 말씀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16:21)
그러나 베드로가 절대 그렇지 못한다고 합니다.
안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원어로 꾸짖는 정도의 수준으로 예수님께 말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2)
이 말에 예수님은 한순간에 돌변합니다.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이라고 말합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16:23)
베드로가 갑자가 사단이 되었습니다 .
오늘 바리새인들이 말한 사단의 왕이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이 말할까요?
그것은 힘의 논리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한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의미를 몰랐습니다.
반석이 무엇인지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는데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로 접근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힘의 논리의 반대로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그것은 반석을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은 깨진 반석 위에 세워집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은 맞습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힘의 논리의 한 가운데인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그가 고백한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어떤 그리스도시고 어떤 하나님의 아들인지는 그가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맞지 않으니 갑자기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대제사장과 서기관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이유는
힘의 논리입니다.
그 힘의 중심이 자기들이어야하는데 세상은, 백성은 예수님을 원하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세상은 철저히 힘의 논리로 교회에 접근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하나님이고 어떤 그리스도인지 알지 못하면
당장,
누구든지 사탄이 되고 사탄의 왕과 힘을 결탁한 사람이 됩니다.
반석이 무슨의미입니까?
구약에서 반석이 처음 나오는 곳은 바로 신광야 르비딤입니다.
그곳에서 마실 물이 없자 백성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돌을 던지려합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묻자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반석 위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는 것입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6)
한마디로 반석 위에 서 있는 하나님을 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물이 없다는 아우성에 백성들을 심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재판의 자리에 백성들이 서고
그 심판의 지팡이가 백성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반석,
즉 하나님 자신을 치게하신 것입니다.
심판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심판하심으로
심판 받을 세상을 대신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물을 통하여 흘러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반석과 심판의 지팡이,
그리고 십자가와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님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연결이 됩니다.
반석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깨진 반석입니다.
반석은 철저히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심판을 의미합니다.
셋째, 실패한 반석이 무엇입니까?
모세의 실패
그런데 왜 모세가 이후에 반석을 다시 치는 사건을 통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합니까?
"모세와 아론이 총회를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0-11]
사실 이때는 하나님이 반석을 치라고 하지 않고 명령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신의 감정과 믿음없음으로 바위를 두번 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 이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민20:12)
이유는 첫째 믿음이고 둘째 거룩함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반석이 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믿음은 반석이 스스로 깨어지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힘의 논리로 운행되는 세상에 스스로 깨어지는,
스스로 심판하는,
스스로 세상을 향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말입니다.
그 믿음이 하나님의 방법으로서의 명령입니다.
반석을 깨는 것,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므로 반석을 깨는 것인데
믿음이 없으면 자신의 힘을 개입시키려합니다.
자신의 방법을 개입시키려합니다.
세상의 힘의 논리와 치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접근하려합니다.
그것이 사탄의 일입니다.
그리고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기 원하십니다.
그 거룩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감정의 개입이 아닙니다.
하나님 스스로 우리를 위해 심판받고 하나님 자신의 거룩한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원하시는 사건이
바로 반석을 깨는 사건,
십자가에 자신의 아들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 인간적인 감정과 힘의 논리로 접근하는 모든 것은 바로 사단의 일입니다.
그 사단의 방법은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
그 사단의 힘의 논리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통해
교회를 세우겠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지 어떤 하나님의 아들인지는 알지 못해서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향하여,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하여 힘의 논리로 세상을 정복하려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르시려합니다.
세상을 이기려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에서부터 작정하고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고
자신을 깨고 찢고 십자가에 못박아서
세상에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섬김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걸림돌 5번째가 무엇입니까?
<힘의 논리>입니다.
세상이 힘을 가지려고 시작했는데
믿음을 가지고도 여전히 깨어진 반석이 아니라
완전한 반석으로 세상에 멋드러지게 예수 믿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마치 지팡이를 두번치는 모세와 같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막으려는 베드로와 같은 모습입니다.
여려분 아십니까?
반석을 깨는 사건이 언제 이루어지는지?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후에 주어집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해결되고 난후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 다 해결해주시고
세상은 먹고 사는 것으로 염려하지 말고 복음의 원리
깨어진 반석의 원리로 살아야 그것이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힘의 논리에서 넘어서지 못하고
가나안을 저만치 보면서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모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을 심판하고 세상을 안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이고 화해의 장소 세상과 하늘이 하나되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세상을 향하여 심판하지 않고
먼저 자신을 심판하심으로 우리가 마음 문을 열고
천국으로 누구나 들어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심판하셨기에,
하나님 자신을 죽이셨기에 이제는 방법이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스스로 심판하신 하나님은 어떤 누구도 어떤 죄도 용서하시고 받으십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힘에 논리에 잡혀 있으면
그 복음이 보이지 않고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믿어도 늘 복음의 반대편에서
사단의 논리에 잡혀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바리새인) 늘 힘의 논리로 우리를 봅니다.
그들과 같이 사는 우리는 늘 그렇게 힘의 논리로 그들을 이겨야 진정한 승리가 믿고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그들을 이기는 것은 <깨어진 반석>임을 하나님은 수천년 전부터 보여주시고
말씀하여 주시고 증거하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세포세포 속에 박힌 <힘의 논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힘의 논리에 갇힌 베드로를 향하여 다시 말씀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자기>입니다.
바로 힘의 논리로 갇혀 사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의 논리로 살아온 우리의 영혼이
참 복음을 들어도 <깨어진>은 들리지 않고
오직 <반석>만 들립니다.
<스스로>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세상을 심판하는 <힘의 논리>만 보입니다 .
이것은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힘을 가진 자가 더 힘을 구하고
스스로를 심판하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면
늘 상대방을 비판하고 심판하는 나 자신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왕을 많이 바꾸고
아무리 힘을 가져도
스스로 왕의 자리를 내어주고
스스로 깨어진 반석의 자리에 서지 않으면
복음은 복음이 되지 못하여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는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그것이 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참 의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세상을 바꾸지 말고 네 자신을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힘의 논리의 한 가운데인 가이샤랴 빌립보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가장 가까운 제자 베드로에게 하신
주님의 피묻은 외침이요 복음을 믿고 따라오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피묻은 외침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4-25)
* 세상을 이기는 것은 힘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먼저 가슴을 열고 그들에 안는 것입니다.
힘의 논리의 세상의 끝은 힘이 아닙니다.
힘의 논리의 세상의 끝은 내가 그 힘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것입니다.
깨어진 반석은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품기 위해 자신의 힘을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영원토록 살리기 위해 성령이 오시도록 자기의 자리를 비키셨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리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예수님의 삶이며
성령의 길입니다.
남서울 은헤교회 팀의 선교 마지막 시간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역자들과 포옹을 했습니다.
보는 저로서는 감격입니다.
나라가 하나되고
문화가 하나되고
사람이 하나되는 건
오직 가슴을 연 <안아줌> 밖에 없음을 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